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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 (신 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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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시는 ‘나’ (신 2:24~25)

1. 자신을 바라보는 눈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세상사는 것이 무척 두렵고, 사람대하는 것도 두렵고, 주위 사람의 불행이 나 때문인 것 같고, 그래서 나만 사라지면 해결될 것 같다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나 하나쯤이야 사라져도···’ 란 생각을 늘 머릿속에 담고 삽니다. 저에게는 문제점이 참 많은 것 같아요. ··· 저는 한 번도 근심 걱정 없이 웃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저의 큰 문제점은 제 행동의 옳고 그름을 몰라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거···, 예를 들면, ‘안녕이라고 인사를 할까 말까’, ‘전화를 할까 말까’, ‘사무실에서 커피를 드실꺼냐고 물어볼까 말까’, ‘그것은 내가 잘한 행동인가 잘못한 행동인가’ 이런 것 하나하나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 행동에 대한 정답 지침서가 있어서 그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스무 다섯 살 된 여자입니다.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불안하답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답니다. 저의 지난 25년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삐걱거리시던 부모님이 고등학교 때 별거를 하시고, 그 별거 또한 어머니가 진 빚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혼자 자취하시고, 오빠와 저는 각각 큰고모 작은 고모 집에 맡겨졌습니다. ··· 지금 저의 직장도 불안하고, 제가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앞날이 너무 두렵습니다. ··· 얼마 전에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결혼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렇지만 어머니가 반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모아놓은 돈도 없기 때문이죠. 정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경우를 흔히 ‘자존감이 낮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존감이란 ‘자신의 존재 감각’이란 말로 대충 풀이가 되는 말인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감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처한 상황이나 자신의 능력, 그리고 구체적으로 몸매, 돈, 키, 지식, 학력 등에 대해 스스로가 만족하고 남들에게 부끄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꼭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판단한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남들보다 가난하다고 해도 떳떳하게 살아간다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고, 또 남들보다 약간 틀린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자존감이 높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존감은 자신의 정확한 능력치를 알고, 그 상태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존감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하면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자신에 대한 당당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좋고 높으며 나아서 가지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그러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남들 앞에 당당한 것, 그것이 자존감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라보시는 것

오늘 본문은 성도의 자존감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그런데 그 내용은 조금 색다릅니다. 색다르다는 이유는 뜻 밖에도 오늘 본문의 말씀이 “공포”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1) 공포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서 걷고 있는데 어떤 발자국 소리가 여러분 뒤를 쫓아옵니다. 누군가의 소리와 그의 존재가 느껴지는 순간, 아마 여러분의 머리털은 쭈뼛하고 곤두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누구나 한 번은 겪어봤음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가 두려움이나 공포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공포에서 오는, 일종의 자기 방어적인 두려움입니다. 넷째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말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는 홀로 있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두려움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2) 본문에 소개된 공포

제가 느닷없이 이 “공포심”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이 공포와 관련된 4가지 단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서워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하드(פחד)”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공포, 두려움'을 뜻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말은 ‘공포를 야기시키는 사람 또는 사물로 인한 강력한 공포의 감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에서 이 용어는 어떤 외적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고, 또 내적으로 두려운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도 쓰였습니다. 이 말이 ‘두려움의 원인이 외적이냐 내적이냐’가 정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본능적인 공포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두려워하다”라는 말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이르아(יראה)”로 소개된 이 말은 ‘두려움, 경외’를 뜻합니다. 요나서에 보면 뱃사람들이 요나의 일로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는 등 자신보다 강하고 크고 힘 있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낼 때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신이나 신의 역사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을 뜻하는데, 성경에서 이 말은 주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할 때 그 ‘경외’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세 번째 단어는 “떨다”라는 단어입니다. “라가즈(ׂרגן)”라고 하는 이 말은 말 그대로 '떨다, 흔들리다' 의 의미인데요. 이 말은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어떤 물리적 대상들이 흔들리는 것을 뜻했습니다(욥 9:6, 사 13:13). 그래서 땅이 진동하는 것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사람의 몸과 마음이 덜덜 떨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번째 “떨다”라는 말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하여 실제로 손발이나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포와 관련된 네 번째 단어는 “근심하다”입니다. “훌(חול)”이라고 하는 이 말은 우선 ‘여인의 해산의 고통’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몸을 뒤틀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다'를 의미합니다. ‘출산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큐티나눔반에서 여자분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출산의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임신하여 입덧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은 남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다가 출산을 하게 되면 ‘살아서 나올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고통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 때문에 출산의 지독한 고통을 잊기 망정이지, 그것을 잊지 못했다면 인류는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근심하다”는 말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 육신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말합니다.

3) 공포의 이유

오늘 본문에 왜 이러한 두려움, 혹 공포와 관련된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할까요? 광야의 이스라엘, 그리고 장차 가나안으로 들어가 가나안 정복을 해야 할 이스라엘은 항상 주변 종족들과 국가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상대보다 장비나 병력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열세에 있었습니다. 적의 장비와 병력만 쳐다본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서 밤에 제대로 잠이나 잘 수 있었겠습니까? 말이나 낙타를 타고 신출귀몰하게 우르르 몰려와서는 이스라엘을 치고 가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공포와 관련된 단어들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스라엘의 두려움을 이해하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적들을 보고서 두려워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말씀들은 이스라엘이 주변 부족과 민족과 나라들에게 이렇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 그들을 공포심에 젖게 하고, 그들로 오금이 저리게 하고, 그들의 온 몸이 두려움으로 벌벌 떨게 만드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사실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은 정말 별 것 아니고, 한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노예근성에 찌든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노예 민족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을 헤매고 돌아다닌 끝이라 꾀죄죄하고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거지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스라엘이 완전군장을 하고 아주 최신식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쪽을 향해 두려움을 가져야 정상인데, 하나님은 도리어 적들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얼마나 멀지 않은 직전, 아모리인들의 강자 헤스본이라는 나라의 왕 시혼과 그 나라와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공격을 해 왔습니다. 보나마나 뻔하게 이스라엘이 질 수밖에 없었는데, 도리어 헤스본 측이 어린 생명 하나 남지 않고 전멸을 당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거인 종족인 르바임의 후손이었던 바산이라는 나라와 그 왕 옥과 그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다가, 그들 역시 어린 생명 하나 남지 않고 전멸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당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자기 백성을 한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보다 앞서 행하시며, 그들의 전쟁을 대신 싸워주시는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치심으로서, 이스라엘은 주변과 온 세상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사람들이 헤스본과 바산을 물리치고 자기들 쪽으로 오는 이스라엘을 막기 위하여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고사부터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어느 외딴 산골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이 살고 있는 곳에서 몇 km 떨어진 작은 도시에 학교가 생겼습니다. 이 소년이 학교로 갈려면 나무가 울창한 밀림 지대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소년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굳세고 용감하게 성장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혼자서 그 숲을 지나 학교에 가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년은 대낮에도 울창한 나무에 가려 어두운 그 숲을 지나다녔는데, 그때마다 그 소년은 ‘곰이나 사나운 인디언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 학교를 다닌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오후, 소년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그 숲을 지나다가 길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곰을 보았습니다. 곰은 으르렁거리며 소년을 노려보았고, 소년은 너무 무서워서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도망친다 해도 곰이 소년을 따라 잡을 것은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곰과 맞서 싸울 수도 없는 곤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곰이 앞으로 넘어졌고, 그와 동시에 소년의 아버지가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튼튼한 팔로 아들을 안아 주며 말했습니다. "괜찮니?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매일 아침 학교로 가는 너를 뒤따라갔었고, 오후가 되면 숲에 숨어 너를 지켜보았지. 네가 용감하게 자라주길 원했기 때문에 너를 혼자 다니게 했지만, 그렇다고 아빠는 한 번도 너를 혼자 있게 한 적은 없었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들은 이 세상의 힘과 권세와 돈과 명예 앞에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하시고, 그 어떤 권세보다 높으시고, 그 어떤 부자보다 풍요로우시며, 그러면서 여러분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동행과 도우심 때문에 여러분은 공중권세 잡은 자와, 여러분의 삶의 여러 대적들 앞에서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약속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3. 주님의 눈으로 관점 옮기기!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 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지는 본능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인 “공포심”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낮고 부정적일 수록 더 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감이 있고 당당한 사람은 그만큼 자존감이 높고 두려움도 덜 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이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자신의 관점이나,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관점이나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 사람, 사물, 미래, 건강, 돈 등을 바라보면, 불안, 공포, 초조, 좌절,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여러분을 두려움의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되면 도리어 그것들이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의 법칙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살 것이냐, 인본주의 시각으로 만사를 보아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패배자로 살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시각으로 여러분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너무나 작은 이 세상이 여러분의 눈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인생과 해결책을 등진 사람들은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삶의 날개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늘 패배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사랑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세상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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