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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믿음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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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 (마 15:21-28)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는 특이한 자동차 경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소위 '드랙 레이스'(drag race)라 불리는 단거리 주파 경주입니다.
  이것은 보통 4분의 1마일 즉 400미터 정도 되는 직선 구간을 얼마나 빨리 주파해 내느냐 하는 가속도를 겨루는 경주인데, 이 드렉 레이스에 쓰이는 자동차는 그 생긴 모양부터가 아주 특이합니다.

  우선 엄청난 가속도를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차체 후미에는 무려 7, 8천 마력을 낼 수 있는 커다란 엔진과 큼직한 바퀴들이 달려 있고, 그러면서도 방향성을 잘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앞쪽은 길쭉하고 뾰족하게 튀어나오면서 끝머리에 작은 앞바퀴 둘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드랙 레이스 카(drag race car)를 모는 운전자는 그 몇 초 동안의 짧은 순간에 바로 그 두 가지, 즉 차가 경주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똑바로 '방향'을 유지하는 일과 순간적으로 기어 변속들을 계속하면서 그 엔진의 '힘'이 최고의 가속도를 내게 만드는 이 두 가지에만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그 결과 드랙 레이스 자동차들은 정지 상태에서 불과 4, 5초 만에 시속 500킬로미터 이상의 엄청난 속도를 내면서 400여 미터의 경주로를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주파해 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성장에 있어서 바로 그와 같은 엄청난 가속도를 보여 준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본문에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된 이 여인은 마가복음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더 자세히 밝혀 주고 있는데, 이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에 속하는 베니게'란 뜻입니다.
  이 민족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북쪽으로 쫓겨 갔던 가나안 민족의 자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당하던 한 이름도 없는 이방 여인이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그 짧은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엄청난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정도로 급속도의 신앙성장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네 믿음은 정말 보통 믿음이 아니다."라고 칭찬해 주신다면 그 얼마나 짜릿할 정도로 감격 넘치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이런 '큰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과연 어떻게 '방향'을 잡고 무슨 '힘'을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바른 믿음'의 방향을 잡아 줍니다.

  본문 21절부터 25절에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할 줄 아는 겸손' - 큰 믿음이 시작되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그토록 크게 칭찬 받았던 여인의 큰 믿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별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바닥까지 최저의 자세로 낮추면서 예수님을 찾아온 데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첫 순간부터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사용한 '주'라는 칭호는 종이 상전을 부를 때, 혹은 당시 신민이 황제를 부를 때, 또 유대인의 경우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던 것으로서 상대방을 극진히 높이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곧 메시야를 칭하는 고유명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처음으로 상봉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임을 고백하면서 또한 자신의 주님이라고 극진히 높여 받들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겸손은 주님을 부르는 말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가짐에서도 또한 확연히 나타났습니다.
  25절에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절하며"라고 번역된 말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라는 뜻입니다.
  유대 사회의 풍습 가운데는 동양적인 것들이 많이 있는데 윗사람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자신을 한껏 낮추는 최고의 겸손을 한 눈에 보여 주는 자세입니다.

  이 여인의 겸손은 그뿐 아니라 이어지는 26절과 27절에서 자신을 "개"에다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통하여 그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개"라는 단어는 들개나 잡종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소위 '애완용 개'에 해당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것은 보통 최고의 모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가리켜 하는 대표적인 욕설은 'X새끼'라든지 'S. O. B.' 따위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신을 그처럼 '개'에다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도 거리껴하거나 반발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수긍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겸손,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오히려 개보다도 못한 존재에 불과함을 곧이곧대로 인정할 줄 아는 마음 -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첫 대면한 그 자리에서 시작된 그 여인의 믿음을 그토록 큰 믿음을 향하여 바른 방향을 잡고 출발하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점에 있어서는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 주었던 겸손함은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자리에서라면 정말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할,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아니 지극히 필요불가결한 자세임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기 위한 바로 이 첫 자세를 결핍함으로써 끝내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란, 무엇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것저것 다 제쳐 놓고, 우선 일차적으로 사람 편의 절대적이고도 무조건적인 겸손이 없이는 도무지 성립이 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원래부터 크나큰 '종적(縱的) 차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알게 됩니까?
  자식이 부모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제일 처음부터 자연히 배우게 되는 사실은 곧 부모가 자기보다 더 높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아기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크고 힘센 두 존재가 항상 자기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고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은 그 앞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고도 의존적인 위치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입에 젖을 물려주면 빨아 먹고, 바닥에 눕혀서 아랫도리를 벗겨도 꼼짝 못하고 그저 기저귀 갈아 주는 대로 당해야(?) 하며, 등에 업어 주면 업힌 채로 어디를 나가든지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곧 부모 앞에서 자식의 위치이며 이것은 피할 수 없고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유컨대 한쪽은 전능하고 한쪽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관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관계 속에서 아이는 아빠와 엄마라는 말을 배워 나가게 되고 좀 더 의식이 들면 그대로 믿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느 아이도 "당신이 정말 내 부모입니까?"라고 이성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부모와 토론하고 무슨 증명을 요구해서 자기가 판단한 후에 결론을 내려서 "아, 이 사람들은 정말 내 부모구나."라고 믿게 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처럼 불평등하게 보이는, 일방적인 관계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 가서 그 관계는 실상 세상에서 가장 확고부동한 혈연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는 단계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한쪽은 창조자이고 한쪽은 피조물인데 그 차이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차이와 비교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극단적인 종적 관계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사람 편에서 무조건적인 겸손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찌 부당하고 불공평한 원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죄인에 불과한 사람이 가져야 할 첫 자세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겸손, 이것 제쳐 놓고 다른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성경의 말씀은 너무나도 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불러 보셨습니까?
  그저 입에 발린대로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 자신은 그 앞에서 종이 되기에도 감당치 못할 심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진실로 부르고 계십니까?
  그런 성도는 이미 큰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아직까지는 신앙생활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교회생활에 돕는 일도 적지만, 일단 예배드리러 나와서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면 절로 자신의 머리가 수그러지고 그 심령이 땅에 엎드려지십니까?
  분명히 큰 믿음을 향한 바른 방향은 이미 잡고 나아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세상 어느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나름대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많고도 많은 죄가 생각나면서 정말 나는 개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절로 부끄러운 고백이 나오게 됩니까?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큰 믿음이 벌써부터 잘 자라나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런 겸손 없이, 예수님 믿는 것을 마치 세상 친구 하나 더 사귀는 것 같은 자세로 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에 불과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면서 나아가는 겸손 없이, 그저 하나님을 무슨 '마음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는 자세로서는 절대로 바른 믿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여인처럼 그저 "예수님, 정말 저는 개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엎드릴 줄 아는 겸손으로써 '큰 믿음'을 향한 바른 방향을 잡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낙심치 않고 기도하는 인내'는 '강한 믿음'의 힘을 키워 줍니다.

  26절 이하 28절에 기록하기를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끝까지 기도드리는 인내' - 바로 이것이 '큰 믿음'을 향하여 엄청난 가속도를 내게 만들어 주는 추진력이 됩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 역시 바로 이런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딸이 귀신병 들린 일,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어머니로서는 참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소리 질러" 즉 울부짖으며 청할 때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을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예수님께 애원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딸이었지만 "나를" 즉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25절에서도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재차 간청했습니다.
  딸의 고통은 곧 어머니 자신의 고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바로 그런 피맺힌 소원을 예수님께 부르짖어 아뢰어 왔던 것인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아까 23절에 보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겸손하기 그지없는 태도와 그처럼 애절하기 그지없는 간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히게도 묵묵부답이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보기가 딱했던지 23하반절에서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즉 "무슨 소원인지 얼른 들어 주셔서 보내소서"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그 같은 재촉에 예수님께서는 천만뜻밖의 대답을 들려 주셨습니다.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진의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하셨던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는 구체적인 계획과 그에 따른 우선순위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이스라엘 민족을 주요 대상으로 사역하시고 나중에 제자들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연단시키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인 지연작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그 여인에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셨지만, 물론 일부러 그 여인도 들으라고 하신 말씀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쌀쌀하게 반응하시는 예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5절에 보니 이 가나안 여인은 더 주님께 바짝 다가와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계속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지연작전도 오래 끄는 것이었지만 그 여인의 간구 역시 끈질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성경에 한두 번 나타났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시는 응답은 무려 25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친구 나사로가 죽을 병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 계시던 곳에 일부러 이틀을 더 기다리신 후에 출발하셨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도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애간장을 태우도록 일부러 미루시고 늑장을 부리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의 믿음을 더 큰 믿음으로 연단시키기 위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떻게 그 믿음이 연단되었습니까?
  로마서 4장 19-20절에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더딘 응답을 25년 간 기다리는 동안 아브라함은 점점 더 연단을 받고 점점 더 그의 믿음이 견고하여지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같은 믿음은 그가 만약 75세 때 즉시 그의 아들을 얻었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사로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지연작전에는 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4-15절에 기록하기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늦게 떠나심으로 인하여 나사로가 죽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더 확고한 믿음을 얻게 해 주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바로 그 지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부활의 믿음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우리 주님의 지연은 더 큰 믿음, 더 강한 믿음을 낳기 위한 의도적인 작전인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우리 주님의 지연작전은 그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주어져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인에게 먼저 줄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 같은, 마치 용광로의 불이 달구어질 대로 새빨갛게 달구어진 것 같은, 의도적인 말씀에 이 여인은 더더욱 그 믿음이 연단되어 이제 정말 극도로 순수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됨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녀는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연단을 받고 또 받다가 이제는 그만 스스로 자폭하게 될 것만 같은 벼랑 끝 상황에 와서 오히려 이 여인은 정말 순금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 그 말씀 맞습니다. 저는 정말 개같이 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선한 주인은 자기 기르는 개라 할지라도 굶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록 개가 주인의 자녀와 같이 취급받을 수는 없지만 개도 주인에게서 부스러기는 받아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그녀의 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둘 냉정한 주인'은 결코 아니신 것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결국 선을 베풀어 주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끝까지 확신하면서 인내하는 믿음이 바로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이 여인의 심령 속에 아름답게 결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내의 믿음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는 너무나도 멋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출발했던 믿음이 이처럼 큰 믿음으로 순식간에 성장하는 과정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오묘합니까?
  우리 소원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아무리 늦어 보이고, 아무리 주님의 반응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 한 그 선하신 주인께서 내게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지 않으실 리가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믿고 계속 기도하는 것, 바로 그런 인내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엄청난 가속도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들이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는다면 이 여인의 정금처럼 아름다운 믿음이란 연단될 시간도 기회도 없을 뿐인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데도 주님의 응답이 더디 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더 온전한 데까지 이끌어 올리시기 위한 의도적인 지연인 줄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못난 죄인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인 담에야 하늘 아버지께서는 결국 나에게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지 않으실 수 없다는 믿음을 오히려 더 뜨겁게 달구어 나가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처럼 끝까지 낙심치 말고 기도드리는 가운데 인내함으로써 결국 '그 소원대로 이루어지고야 마는' 큰 믿음의 응답 또한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칭찬해 주실 때 도대체 무엇을 보고 칭찬해 주실 것 같습니까?
  돈 잘 번다고, 공부 잘 한다고, 얼굴 잘 생겼다고 칭찬해 주시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해 주신다면 그 첫째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선 겸손할 줄 아는 것, 이것이 큰 믿음의 바른 방향을 잡고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좋은 상을 베풀어 주실 주인 되심을 결코 의심치 않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 바로 이 큰 믿음의 완성에 이르는 강력한 추진력이 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큰 칭찬받을 수 있는 큰 믿음이란 이처럼 쉬운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께서 큰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며, 목사나 장로의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로부터 큰 믿음 가진 자라고 자동적으로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정통 신앙의 뿌리를 가진 교단이나 좋은 신앙의 가정 출신이라는 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큰 믿음 가진 자라고 인정해 주시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 하나도 없다 할지라도, 오로지 예수님 앞에서 그저 겸손히 머리 숙일 줄 아는 신자,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끝까지 인내하며 무조건 예수님 의지할 줄 아는 신자 - 오늘도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성도들을 가리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크게 칭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 앞에는 오직 겸손만 가지고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오히려 사실상 아무 보여드릴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받은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사실상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응답을 지연시키시는 까닭에 더 아름답게 연단되고 있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경향의 모든 성도들과 특별히 오늘 학습과 세례와 입교를 받게 되는 성도들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출발하여 '당신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의지하는 인내로 성화됨으로써 실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큰 믿음'을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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