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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자 (시 145:18~21, 약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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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자 (시 145:18~21, 약 4:8~10)

C. S. 루이스의 이야기 가운데 ‘절벽 아래의 집’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산 절벽 아래에 집이 있었습니다. 이 집은 절벽 아래에 있기에 곧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가기는 하겠지만 살아서 가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 집에 가려면 산등성이를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면 자기 집과는 멀어집니다. 하지만 멀어지는 그 길이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자세로 나아갈 때 하나님을 가장 온전히 만날 수 있습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 영혼의 거리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치고, 만지고, 악수하고, 껴안아보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만은 예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 미는데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만졌다고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혼의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합니다. 고난은 주의 율례를 배우게 합니다. 때로는 죽게 합니다. 사실은 죽으면 가장 가까이 갑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가장 가까이 갔습니다. 사람이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갑니다. 가장 가까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왜 작아 보입니까? 왜 하나님을 축소합니까?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은 가까이 가면 더 높아 보이지만 인간은 가까이에서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남루하고 초라한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인이나 친척에게 존경받는 영웅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위대한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멀어지고,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사람을 가까이 하면 이중 손해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덕이 있습니다. 이중 이득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8절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하고 멀리해야 하고, 반대로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마귀 둘 다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둘 다 멀리 할 수 있습니까? 하나는 멀어지고, 하나는 가까워지게 마련입니다.

  저희 외가는 오래 전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귀신을 가까이 하던 집안이었습니다. 신주 모시고 마당에는 대나무에 알록달록한 천으로 기를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어릴 때에 집안에 신주 단지를 뒀는데 하루는 이 신주 단지가 마당에 내려가서 굴러다니며 춤추는 것도 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니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세상이 멀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를 멀리하면 좋은 자녀입니까? 아버지를 멀리하면 불효자식입니다. 누가 가장 효자입니까? 부모를 가까이 모시는 자녀가 효자입니다. 멀리 있는 효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 대접을 안 하면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을 가까이 자주 찾아뵈세요. 주일 교회에서 만나고 뵈세요. 아니면 전화라도 매일 하세요. 부모님을 뵐 날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뵈려고 해도 계시지 않는 날이 금방 다가옵니다. 부모님이 마음에 가까이 계시면 늘 찾아 뵙고 전화 드리는 일이 어렵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쾌락으로부터, 유혹으로부터 멀어지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여호수아 7:14에는 아간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의 사죄를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하나님께 가까이 오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려면 가까이 와야 합니다. 찬송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이들도 부모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면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면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야 문제를 해결받습니다.

  누가복음 15:1에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합니다. 가까이 오는 자들은 사랑이 많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까이 옵니다. 죄인인 한 여인이 그 따가운 시선에도 예수님 가까이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난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사랑이 많은 까닭에 이렇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좀 가까이 와봐”란 말과, “야, 좀 저리가”란 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랑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면 언제가 가까이 와보라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좀 떨어지라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라고 해도 가기 싫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가게 만듭니다. 나이 들면 남편이 가까이 오는 게 싫다면서요? 사랑 때문은 아닙니까? 가끔 길에서나 공원에서 연세 드신 부부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한쪽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밀며 다정하게 다니는 것을 보면 참 멋있습니다. 사랑이 적으면, 사랑이 식으면 가까이 하는 것이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까운 무당보다 먼데 무당이 용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건 무당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고, 가까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힘이 됩니다.

  자동차의 옆 겨울에 보면 “거울에 보이는 물체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옆 거울은 볼록거울로서 시야가 넓어지므로 넓게 보이게 합니다. 반면에 시야는 넓지만 물체는 작고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것 같지만 내 곁에 계시고, 내 곁에 계시는 것 같지만 내 안에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요 복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치 조건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십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멀리 떠나가는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28:15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야곱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에 16절에는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곁에 계시는 하나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중에 ‘호저 딜레마’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 날 호저 한 쌍이 죽어 있습니다. 호저는 ‘바늘두더지’라고 불리는 전신에 가시 같은 털이 있는 동물입니다. 서로가 가까이 가면 몸이 찔리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 죽을 지경입니다. 두 마리의 호저는 가까이 멀리를 반복하다 얼어 죽었습니다. 전신이 가시 같은 털로 덮여 있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습니다.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추위를 탑니다. 상처를 주지 않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너무 가까이 하면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또 너무 멀리 있으면 남이 되기 쉽습니다.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관계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있어야 좋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해야 안전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 다릅니다. 가까이 해도 상처를 주지 않고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45:18에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진실하게”라는 말은 ‘베에메트’라는 말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진리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위선적이지 않고 신실함으로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2004년 9월 1일 러시아의 북 오세티아 공화국 베슬란시의 어느 초등학교에 10명의 무장괴한이 들어가 어린이들을 강당에 몰아넣은 인질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어린이 170명을 포함한 33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인질 사태로 어느 소녀가 잡혀 있다가 탈출하였습니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불명이 된 이 소녀가 병원에 왔을 때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간호사는 꽉 쥐고 있는 소녀의 손을 억지로 벌렸습니다.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처절한 고통의 순간에도 주님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한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작가는 자신이 흔히 실수한 내용들을 최근의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호텔방을 열쇠로 열었지만 열리지 않는다고 야단을 하다 호텔 직원을 불렀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의 방이 아닌 한 층 아래의 방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공항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차가 없습니다. 차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다른 주차 구역에서 차를 찾고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새벽에 나와 조깅을 한 후에 아침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묵은 호텔은 아침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호텔이었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아침식사를 한 호텔은 자신이 묵은 호텔 건너편에 있는 다른 호텔이었습니다.

  여러분, 철새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몽골의 어느 말은 베트남에서 몽골까지 자기 집을 찾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진도의 어느 개는 수 천리 되는 곳에서 자신의 집을 잘도 찾아가는데 사람들은 쉽게 길을 잃고 다른 길을 갑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보다, 개보다 더 어리석고, 못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대부’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2편에는 마피아 두목인 마이클 콜레오네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을 가까이 하되 적은 더욱 가까이 하라".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마치 신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사야 55:6에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합니다.

  엔도 슈샤쿠의 대표작 가운데 ‘침묵’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에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 페레이라가 일본에서 선교하다 결국 핍박에 못 이겨 배교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에 왔습니다.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마치 떠나신 것처럼 보일 때도 그분 항상 거기 계십니다.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고 찬송합니다. 이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께로 가까이 가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안전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한 번도 멀리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결론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천지창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 아담을 세상으로 보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손은 단 몇 센티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 같지만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손입니다. 아무리 곁에 있어도 잡을 수 없고, 닿지 않으면 가장 먼 손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다 하나님과 손잡고 사는데 인간만은 잡을 듯하면서 놓치고 삽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 찬양은 들을수록 좋습니다. 부를수록 은혜가 넘칩니다. 내일 일은 정말 모릅니다. 불안하고 초조하십니까? 주님께 가까이 가세요.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시면 만사형통입니다. 주님이 날 붙드시면 평탄합니다.

  우리의 남은 순간순간마다 주님께 가까이하여 주님의 손을 붙잡고 안개 속 같은 앞날에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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