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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문제를 물어보자 (대상 14:10~11, 눅 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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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문제를 물어보자  [ 대상 14:10 ~ 11, 눅 21:7 ~ 9 ]

머리가 단순한 사이먼이란 사람이 보안관 조수 시험을 보았습니다. 면접하는 시간에 시험관이 사이먼에게 물었습니다. “1과 1은 얼마이지요?” 사이먼은 “11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시험관이 물어봅니다. “일주일에 T자로 시작되는 두 날은 어느 날이지요?” “Today 와 Tomorrow입니다.” 시험관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누가 죽였나요?” “몰라요.”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집에 가서 답을 생각해 봐요.” 사이먼은 집에 와서 소리쳤습니다. “엄마, 나 시험 잘 봤어. 벌써 채용됐어. 첫날부터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됐다구요.” 물음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하기도 하고,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가장 어려운 시험 중의 하나가 ‘오랄 테스트’입니다. 시험 답안지에 쓰는 것이 아니라 즉석에서 묻고 답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으면 질문에 명답을 할 수 없습니다. 잘 묻는 것도, 잘 대답하는 것도 다 사람에게는 중요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질문도 잘 해야 하고 대답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질문도 대답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가인에게 하신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갈에게 하신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고 하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죄를 지은 인간은 대답에도 실패합니다. 대답에 실패한 인간은 이제 질문에도 실패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여 실패를 거듭하며 삽니다. 대답에 실패하면 질문에도 실패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질문의 삶을 살아라”고 하였습니다. 질문이 많아야 성숙해지고 성장하고 머리도 좋아집니다.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싶으면 질문해야 합니다. 남을 설득하고 싶으면 질문해야 합니다. 청중을 존중하고 싶으면 질문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으면 질문해야 합니다. 좋은 질문일수록 더 놀라운 결과를 만듭니다.

  질문이 많은 아이가 있습니다. 보는 것마다 “이게 뭐야?”라고 합니다. 아이의 이런 질문에 “그만 물어봐”, “아이구, 시끄러워” 이런 부모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어봐도 귀찮다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가르쳐보면 가르치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수업이 끝난 후에 “질문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2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는 강의 내용을 다 알아 들었거나, 둘째는 강의 내용을 다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제 삼의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셋째입니다. 빨리 마치자는 말입니다. 어쨌든 질문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구약 하박국의 질문을 보세요. 그는 마음에 많은 의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왜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보다 잘 됩니까? 왜 믿지 않는 자를 통하여 믿는 자가 고통을 당합니까? 이런 질문에 하나님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위대한 대답을 하십니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현답을 주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우문현답’(愚問賢答)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질문에 하나님은 지혜로운 대답을 주십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이란 말도 있지요. 전혀 질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말합니다. 저팔계가 “오늘 비오겠니?”하고 물었습니다. 사오정은 “응 벌써 봄이 왔네”라고 대답합니다. 요즘 어느 초등학교 시험지가 인터넷에 올랐어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어느 아이가 “로비스트”라고 답했습니다. 기발한 대답이지요? 그런데 틀렸습니다. 또 ‘자문자답’(自問自答)이란 말도 있습니다. 자기가 묻고 대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현답만을 합니다. 동문서답이나 자문자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대화의 하나님이시 때문입니다. 명확한 대답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질문이 많은 지혜자인 다윗을 봅니다. 질문이 많아 사랑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질문을 많이 하여 지혜도 얻고, 사랑도 받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물어보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불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이런 다윗의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알아서 해봐” 하시지 않습니다. 14절에는 다시 말합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은 “왜 또 물어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야지” 하시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2:1에는 또 말합니다. “그 후에 다윗에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왜 다윗이 성군입니까? 질문이 많아서 성군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습니까? 질문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질문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신뢰하지 않고는 질문하지 못합니다. 신뢰하지 않고는 간구하지 못합니다. 주지도 못할 존재에게 어떻게 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부족과, 어리석음과,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예지를 믿고, 하나님을 해결자로, 해답자로 인정하는 이것이 질문입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식과 지혜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아들인 솔로몬의 지혜에는 못 미쳐도, 용기와 군사적 전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시인이었습니다. 시란 오랜 묵상 가운데 나옵니다. 짧은 말로 긴 인생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볼 때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위대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입니다.

  예레미야 12:1에는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를 표현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질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나 불평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옛날의 다윗도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신뢰가 질문을 가능하게 합니다.

  건전한 의사소통을 위한 다섯 가지 ‘A’가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Appreciation)입니다. 둘째는 질문(Ask)입니다. 셋째는 사랑(Affection)입니다. 넷째는 주의(Attention)입니다. 다섯째는 긍정(Affirm)입니다. 질문은 중요한 의사소통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질문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우리가 질문을 많이 해야 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호기심이 많아서 좀 더 알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훌륭한 방송인은 질문을 잘 합니다. 특히 시사토크 프로그램의 사회자는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물음에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정말 질문을 잘 하는 방송인이 있습니다. 이런 유능한 기술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질문을 잘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 특히 교수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많이 배웁니다. 훌륭한 물음은 훌륭한 답을 끌어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란 훌륭한 의문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한 번도 의심하지 못한 사람은 한 번도 믿지 못합니다. 항상 긍정적인 의심을 가지고 좋은 질문을 많이 던지는 사람이 배우는 자이고, 지혜로운 자입니다.

  미국의 대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일 아침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내가 즐거워하는 일은 무엇인가? 둘째, 내가 무엇에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셋째, 내가 감사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보다 내 자신을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소상히 물어보세요. 주저 말고 물어보세요.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우리의 질문에 알뜰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든 물음에 대답하시는 것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10절에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1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2:1에는 “헤브론으로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신실하십니다. 정확하십니다.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모든 물음에 대하여 신실하시게 대답하십니다. 신실하게 대답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본성입니다.

  신문에 보니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가정이 복잡하고 속이 상해 술을 좀 마셨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아이가 질문도 많습니다. 그만 물어보라고 야단치니 웁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시끄럽다고 아이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캐묻는 게 많다고 아이의 목을 조르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물을수록 좋아하는 아버지이십니다.

  묻는 것을 좋아하시고 대답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의 질문에 귀를 세우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귀를 기울이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역대상 10:13에서 14절 상반절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질문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했습니다. 똑똑한 것 같지만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울은 무슨 왕입니까? ‘묻지마 왕’입니다. 묻지마 통치자입니다. 다윗은 ‘물어봐’ 왕이었습니다. ‘물어봐’ 왕과 ‘묻지마’ 왕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삶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물어봐’는 삶입니다. ‘묻지마’는 죽음입니다. 여러분 ‘묻지마’ 관광이 뭔지 아세요? ‘묻지마’ 관광 해보셨어요? 안 해보기를 바랍니다. ‘묻지마’가 죽음이면 ‘묻지마’ 관광은 죽음 관광입니다. 어느 인터넷 광고에 올라온 ‘묻지마’ 관광 광고 한번 보실래요?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남녀회원 10명 이상이면 항상 출발합니다. 자 출발해 보시겠습니까? 다음 여행은 11월 12일 출발입니다. 자세한 시간은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묻지마 살인’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남 보성의 ‘노인과 바다’ 사건이 ‘묻지마’ 살인입니다. 홍익대 앞의 택시 납치 사건이 ‘묻지마’ 살인입니다. 원한이나 치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3자에 대한 무차별적 충동적 폭력적 살인을 말합니다. 최근에도 미국과 핀란드에서 총기사고가 납니다. ‘묻지마’ 살인입니다. ‘묻지마’는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왜 묻지 말라고 합니까? 인간은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는 물어보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해답을 주실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물어보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물어보실수록 좋아하십니다.

  이사야 30:1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과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지자가 책망합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들어보세요.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식들아,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일을 꾸미며 내 뜻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동맹을 맺어 죄 위에 죄를 더하는구나”. 개역한글 성경에는 더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묻지 않는다면 청년입니다. 세상사에 어떤 일도 잘 모르겠고 확신도 없다면 중년입니다.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노년에 접어 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누가복음 21:7에는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8절에는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옳습니다.

결론

  요한복음 16:23에는 “그 날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결정합니다. 이 세상은 똑똑이 세상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물어보면 좋아하십니다. 물어보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십니다. 물어보면 성군이라 칭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무엇이든 물어보고 사업을 시작합시다. 어떤 일이든 물어보고 작은 일까지 결정합시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말하고, 하나님께 물어보고 일합시다.
  우리 시대의 최대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삽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자기가 해결자로 자처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능력이 극대화되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삽니다.

  우리 사회가 어지럽습니다. 우리 국가가 혼란합니다. 우리 세상이 복잡합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내년의 총선과 연계되어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당선과 이익 때문에 국가 지도자의 선택도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인간의 판단에만 의존하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도 암울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하나님,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혼란하고 지구의 온난화로 세계에 이전에 없던 재앙이 연거푸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는 누굴 찍을까요? 이회창씨가 또 뛰어들어 안개속인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그분이 담임목사를 닮았다는데 찍을까요? 내 좁은 판단이 아니라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물어보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는 우리의 영적 전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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