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로 사는 삶 (롬 5:12 - 21)

  • 잡초 잡초
  • 1609
  • 0

첨부 1


은혜로 사는 삶 (롬 5:12-21)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나의 의로 여기시어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선물로 두 가지 복을 주시는데 하나는 죽어서 받는 복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당장 받는 복입니다. 죽어서 받는 복이라고 하면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나라는 꼭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받은 복은 화평과 은혜와 즐거움의 복입니다. 

◈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세 가지 복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복이 당장 주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복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었고, 설사 나간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을 보시면 그냥 두지를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가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이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언제든지,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고 또 누리고 삽니다. 

세 번째 복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평안한 때문에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전에는 삶의 걱정과 근심과 염려 때문에 마음이 항상 불안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세상만사가 생각대로 안 될지라도 마음이 편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움과 기쁨이 더 앞섭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는 방법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받기는 받았는데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신 쪽에서는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받은 쪽에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믿음입니다. 내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은행에 10억원을 예금해 놓았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아무리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도 그 돈은 내 돈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 복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치의 인정입니다. 우리가 이 복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 아이에게는 다이아몬드보다 장난감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또 팔십이 된 노인은 컴퓨터의 가치를 모릅니다. 팔십이 된 노인에게는 컴퓨터보다 맛있는 음식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에 대한 가치를 알아야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귀하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진정 이것이 복이라고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복보다는 물질적이고 외적인 복을 복 같이 여깁니다. 그리고 그런 복을 받아야지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더 귀하다고 생각하시어 주셨는데 정작 받은 쪽에서는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 싫어도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이 로마서 5장 1절부터11절까지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12절부터 21절에서는 죄와 구원의 보편성과 그 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시키면서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죄의 보편성과 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2절)

여기서 한 사람은 누구를 말합니까? 예, 아담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말합니다. 아담이 어떻게 범죄를 하였습니까? 창세기 2장을 보면 자세하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 동산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6-17)

✦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행복하다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위치가 창조주인 하나님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순종해야 할 피조물의 신분을 어기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 안에서만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그는 범위 밖으로 나갔습니다. 즉 룰을 어겼습니다. 반칙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벌로 무서운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창3:19)

죽음의 선고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사망이 임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9백 30세를 살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어집니까?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결코 거짓이거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전설이나 설화와 같이 취급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그렇게 보게 되면 성경 말씀 전체를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만한 것만 뽑아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중에서 어떤 것은 믿어야 하고 어떤 것을 믿지 말아야 하는 혼돈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정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 왜 아담이 지은 죄가 나와 상관이 있는가?

아담의 범죄와 그에 대한 책임이 아담 한 사람으로 끝이 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12절 중간에 보면 ‘이와 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이와 같이 모든 사람도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아담에게 사망이 임한 것 같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도 죄를 지었고 아담이 죽었기 때문에 나도 죽는다는 논리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가 아닙니까? 

아담의 죄가 나에게도 전가되어 나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원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원죄의 교리는 받아드리기가 매우 어려운 교리입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죄가 어떻게 전 인류에게 전가될 수 있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사실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를 아담의 후손인 온 인류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공평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어도 진리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해가 되어져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져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심리학자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죄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매우 우수꽝스러운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원죄는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성은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을 생각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담은 온 인류를 대표한다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는 대표성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가 제일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그를 인류의 대표자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가 사이에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국가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정은 온 국민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어겼을 때는 그에 상당하는 손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도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나올 온 인류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언약을 범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 혼자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도 범죄한 것이 되었습니다. 본문19절에서도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19절), 즉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그의 후손인 온 인류도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원죄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숙명적으로 죄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성경이 우리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하는 문제와 별개의 것입니다. 악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죄인인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불순종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태어난 우리도 죄인이 됩니다. 즉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누리는 환경은 나의 의지나 결정과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사람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서’씨인 것은 ‘서’씨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씨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나 결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이병철씨 같은 집에서 태어나 부자로 살고 싶었지만 ‘서’씨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미국 사람이 되어 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져본 적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상황과 환경은 많은 부분이 나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정을 하던 안하던 진리입니다. 

✦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아담의 죄를 물러받았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싫으나 좋으나 아담으로부터 죄와 죽음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담 때문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 때문에 죽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나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이므로 나도 죽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나도 범죄한 것이 되었고,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그 죄로 인해 죽기 때문에 나도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원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대표성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되면 조상 탓이라고 그러면 죄와 죽음의 모든 책임을 아담에게 다 돌려야 하겠습니까?

“아담이여,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당신 때문에 죄를 짓게 되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 정말로 억울합니다. 억울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죄를 한 번도 짖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한 번 이상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안 지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억지로 짖게 된 것이었습니까? 또는 아담, 그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은 것이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나의 의지가 작동을 해서 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지은 것과 죽게 되는 것을 모두 아담에게 핑계를 대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입니다. 내 심성 속에는 타락한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 그리고 나의 죽음의 문제는 나와 아담, 두 사람이 다 공범자입니다. 아담의 타락 속에서 나의 타락을 발견할 수 있고 나의 죄 속에서 아담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나와 아담은 별개가 아닙니다. 아담이 나이고 내가 아담입니다.

아담과 나 사이에 형성된 이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성경은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한 사람이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이라고 하였고, 16절에서는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또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절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임했고 그래서 우리도 죄를 짓고 있으며 그 결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함께 모든 인류는 공동의 운명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인류의 새로운 대표, 예수 그리스도

자, 지금까지가 바울이 연출하였던 구속의 드라마의 제 1막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구속의 드라마 제 2막을 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이 드라마가 1막에서 끝이 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게 됩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류에게는 죽음과 심판 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첫 번째 아담과 같지 않은 다른 두 번째 아담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입니다. 14절에 보면 ‘오실 자의 표상’이란 말이 나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아담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들의 머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온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함으로 구원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22절은 이 사실에 대해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절은 이 사실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신과 모든 인류를 죄인 되게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되게 합니다. 이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17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또 1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절을 보십시오.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상 4절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은혜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때문에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예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비해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입 앞에 웬 떡이 닦아와 넙죽 받아먹은 것 밖에 없습니다. 찹쌀을 구해 그것을 쪄서 떡을 만들어 가지고는  그것을 내 입 앞에 가져 오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받아먹은 것뿐이었습니다. 받아먹은 행위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받아먹었다는 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나요?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공로로 내 세울 수 있나요? 할 수 없지요. 떡을 받아먹은 것을 자랑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믿은 것을 내 세울 수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것이고 나는 그저 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내 세울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나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또 은혜로 살고 있으며, 그리고 은혜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은혜와 생명의 권세로

이제 바울의 구속의 드라마는 제 3막, 휘날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1막에서 본 것과 같이 아담 안에서 우리는 과거 어떤 상태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다음 14절을 보십시다.
✟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은즉’

또 17절을 보십시오.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그리고 21절을 보십시오.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과거 나에게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나를 좌지우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나의 인생을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마귀입니다. 나는 마귀에게 코가 꿰어 꼼짝없이 끌려 다녔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과거 그런 존재였습니다. 내 의지와 뜻으로 살았던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가 나의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 초조, 걱정, 근심 속에 싸여 살았습니다. 분쟁, 다툼, 시기, 질투, 미움, 원망, 불만투성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 비판적인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환난과 곤경과 어려움과 고통으로 심령이 편안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내 속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보니 어떤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또 21절 하반절을 보세요.
✟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는 왕 노릇하는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나의 왕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은혜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가 나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가 나를 지배합니다. 이제는 나의 주인이 마귀가 아닙니다. 나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이제 은혜와 함께 나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왕 노릇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는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지배를 하지 못합니다. 대신 은혜와 생명이 지배합니다. 왕권이 이미 넘어갔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며 살게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미 지배의 주체가 바뀌었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풀려났는데 아직 그 사슬을 다시 몸에 얽어매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눅이 들어 사는 생활은 이제 그만 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왕과 같이 좀 당당하게 사십시오. 왕관을 머리에 쓰시고 평민처럼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제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벧전2:9). 이 축복과 은혜를 누리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왕권을 행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시험과 환난 중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시험과 환난을 물러갈지어다.”라고 외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가정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질병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병마야! 물러갈지어다.”라고 명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이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분이 계십니다. “사업이여! 불같이 일어날지어다.’라고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을 사모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큰 부흥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왕 같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은혜와 생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생명의 왕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왕권을 행사하십시오. 왕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마귀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형편없는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시고 이 왕권을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항상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생명의 왕권을 사용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