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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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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 (눅 19:1-10)

오늘 읽어드린 ‘예수님과 삭개오’의 이 사건은 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4복음서에서 누가복음만이 이 감동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과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한 누가복음에만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회심 사건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것을 가지고, 여러 신학자들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당시에 가난하고, 억눌려 사는 약한 자들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린지(S. H. Ringe)는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를 위한 희년의 모티브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희년의 모티브”라고 하면 모든 종을 해방시키고, 가난하여 팔았던 땅을 원 주인에게도 돌려주는 은혜의 해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라고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하여, 소유가 없는 못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삭개오의 입장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삭개오를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문을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통합적으로 삭개오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을 함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이 이 사건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에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지 않고, 요르단 지방을 돌아오는 길을 선택하신 것은 열렬한 구도자 삭개오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여야 한다.”고 자신이 하시려고 하는 의지, 반드시 하시겠다고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신 말씀을 보아도,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리고에 오셨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말씀을 잘 관찰하는 것이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돌아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리고 성에 들어가 성내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이 여리고 성에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던 차에,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길에 나가보았으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삭개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이번에 꼭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로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뽕나무라고 불렀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보니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발걸음을 멈추시고는 나무 위를 우러러 쳐다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여리고의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님을 보시면서 “예수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모두 수군거리며 비난하였습니다.  그 때에 삭개오는 결심하고 일어나서 주님에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셔서 지나가시고 있었습니다.  성내를 통과하여 지나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고,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있기에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 찾아오셨고,  지나가시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원하셔서 이곳을 지나가시고 있으며, 한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 옛날 삭개오를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성에 들어오셔서 삭개오라는 세리장을 만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실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앞에 서더니 삭개오를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 하루를 묵어가시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당시에 가장 악명 높은 세리장의 집에서 하루를 묵어가시는지, 왜 악랄한 죄인의 집에서 유하시는지,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고, 주님은 바로 나를 찾아오신 분이라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존경받는 서기관의 집이나 제사장의 집에 유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요,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서 묵고 가셨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요, 우리에게는 무한한 소망인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참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히브리어‘잨카이오스’는 ‘의롭다’, ‘순결하다’, ‘깨끗하다’는‘자카이’에서 유래한 단어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삭개오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으며, 부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체적인 특성으로 키가 보통 사람들보다 작았다고 합니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키가 작은 것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결함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달려가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가까이에서 마주대하고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키가 큰 사람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의 고민을 잘 모릅니다.  누구는 키가 작고 싶어 작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장신의 사람들은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아니, 남 클 때에 무엇하고, 왜 크지 못하였느냐?”고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보아주어야 하고, 작다 크다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키 작은 사람은 자신의 키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되는데, 삭개오도 어려서부터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워하였고, 미움이 증오로 변하고, 복수심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를 미워하고 따돌린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오직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재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세리직을 택하였고, 열심히 일하여 세리장까지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콤플렉스 중에는 ‘나폴레옹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키가 작은데서 붙여진 말입니다.  나폴레옹의 키는 155cm로 당시로 보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외모, 가문, 학력 등에 보잘 것 없었던 나폴레옹은 바로 그런 자신의 콤플렉스를 보상하려는 심리 때문에 진짜 나폴레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을 보상하고 해소하려는 끝없는 욕구가 어떤 분발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도 키가 작은 고로 세리직을 선택하였고, 세리장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장 힘이 있는 자리가 세리였고, 인정사정보지 않고 충실하다보니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삭개오에 대하여 좀 더 말씀을 드려봅니다.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던 당시 우대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세리직이란 직업은 그렇게 좋은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항상 죄인 취급을 받았고, 외로웠습니다.  어떤 사람도 세리와 함께 길을 가지 않았고, 한 자리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세리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세리를 매국노로 보고, 사나운 독사로 여겼습니다.  당시에 속담처럼 유행하는 말이 있었는데, “산에서는 사자가 있고, 광야에는 독사가 있고, 성내에는 세리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세리를 나쁜 사람으로 보았고, 무서운 독사와 같은 존재로 알았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세금을 거둬 가는데 도시의 세리장에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대신에 정부에서는 징수할 액수를 제시하여, 세리장에게 선불로 받아갔습니다.  당시의 여리고라는 도시는 인구 5만 명이 살고 있는 유대나라의 제2의 도시로 대단히 큰 도시였습니다. 당시의 로마시의 인구가 12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여리고에 인구 5만 명이 산다고 하면 대도시였습니다.  유대나라의 여러 행정기관 중에서 가장 악랄한 기관을 말하면 세무서였습니다.  세리들이 포악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봐주다보면 세금을 거둬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리들은 인색하고, 악랄하고,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세관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부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많아지다 보니, 백성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온 시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세리 출신 마태라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칭찬하는 말이 아니요,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사람을 무시하고 함께 멸시하는 말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권력을 행사하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도 받아주고, 죄인을 사람으로 알아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깊은 영적 공허감에 시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일생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다면 놓치지 말고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나갔습니다.  그가 키가 작은 고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누구의 시선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는데 체면이 무슨 체면입니까?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인자하신 주님, 그의 따뜻하신 얼굴, 성숙하신 인품, 주님이 걸어가시는 걸음걸이, 주님이 움직이시는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왕으로 영접해야 하고, 주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계시다고 했는데, 사람들에 가려서 볼 수 없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려고 왔는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쉽게 포기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제자들만 보시고 갈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만 보시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노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가리고 있는 기성 신자들만 보시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환영한다고 행사하는 예배당 건물만 보시고 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고 싶어 나오신 성도들은 제자들을 보시지 말고, 기성신자들을 보시지 말고, 예배당이나 어떤 프로그램을 만나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만나보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보시고 돌아가겠다고 하는 단단한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환경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가셔야 합니다.  삭개오와 같은 결심을 가지고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셔야 합니다.  앞으로 달려가셔야 합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것도 원망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체면 불구하고 달려가는 것이나,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인데, 나무 위에 올라가는 모습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은혜를 받고,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면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도전하고 반드시 이루어내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10m 정도 뛰어가고, 한 2-3m 정도의 나무의 올라갔는데, 우리 주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여리고까지 머나먼 길을 걸어 찾아오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예수님을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설 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더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고, 함께 앉아서, 음식을 드시면서 당신을 다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은총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간 것뿐인데, 우리 주님은 우리 집에까지 들어오시고, 우리의 가진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에게 자기의 결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람도 행하기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을 칭찬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로 이름값을 제대로 하면서 살게 되었다고 봅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의로운 사람, 순결한 사람이란 뜻인데, 이제부터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세리장으로 있으면서 더러운 삶을 살았고, 추하게 살았지만 이제부터 제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삭개오를 만나고 가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눈여겨볼 것은 여리고로 가시는 주님, 가시던 길을 멈추시면서  삭개오를 우러러보시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주님,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시고 가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시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이 한 영혼을 사랑하셔서 찾아오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시는 것으로 그에게는 모든 숙제가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친구 목사님이 간증하는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오신 성도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교회를 몰랐는데, 미국에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를 나가려고 하니 아버지가 부릅니다.  “네가 교회에 나가면 내 재산 하나도 너에게 줄 수 없다.  교회 나가는 것 그만 둘래?  아니면 내 재산 포기할래?”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목사님, 우리 아버지는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지 모르시기에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돈 하나도 받지 않을 터이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면서 교회로 가는 것을 보시고 이제는 아버지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돈 앞에 머리를 숙이고 돈이면 최고의 가치를 두는데, 자기 아들이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의 손에 이끌려 주님 앞에 나오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선언하신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난 것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굶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다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른 관계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리고의 경건한 사람을 위하여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오셨습니다.  한 사람을 새롭게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이제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다 가져가도 되고,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 때문에 새롭게 살아가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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