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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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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예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잔 두령의 집에서 식사하신 후에 고창병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하라고 가르치시고 예수를 초청했던 사람에게는 잔치를 배설할 때는 부한 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초청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시자 예수와 함께 식사하던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큰 잔치 혹은 혼인 잔치에 비유한 예가 많습니다(사61:10;사62:5;마9:15;요3:29). 당시 그 지역의 풍습에서는 잔치를 계획하고서 바로 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종을 통해서 1차 통보를 하고 잔치 준비가 끝난 후 2차 통보를 하여 잔치에 초대합니다.

첫번째 초청에 응하였던 사람들은 잔치 준비가 끝난 후 2차 초청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듯 거절하였습니다. 초청을 받았던 자들의 거부는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인격 모독이었기에 주인은 진노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잔치 자리가 비자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으로 가서 강권하여 사람을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새가족 초청 간증집회를 준비하며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이 주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내 집을 채우라 하심은 초청에 응하였던 사람들은 잔치 준비가 끝난 후 초청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듯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람이 '밭을 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농부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어부는 고기가 있는 바다를 필요로 하듯 농부는 농토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밭을 사고 늘리는 것은 농부들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땅을 샀다'는 것은 농토를 늘리고 재산을 늘렸다는 것인데, 영적 의미로 설명하면 육적인 재산, 즉 욕심을 늘렸다는 것이요, 탐심을 배가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밭을 산 이 사람은 육적인 재산을 늘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을 줄이는 것보다 늘리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거의 모든 세상 사람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재산을 모으고 늘리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적이며, 육적인 재산을 늘리고 확장하는 행위는 그것에 의지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며 쉼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눅 12:15-21) 자연 영적인 일에 둔감하여져서 그 영원한 기쁨과 쉼과 의지를 외면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이러한 육적인 가치들은 반짝하고 없어지는 아침 이슬 같은 것들로 실망과 좌절로 그 기대에 보응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이 가르치는바 진리를 자기편에서 따라 해석하고 그 편리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영혼의 자리의 밭을 없애는 사람이요 농부가 밭을 늘리듯이 자신의 고집과 이기심과 욕심을 늘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이 영혼의 밭은 잡초가 무성한 황폐한 토양으로 순종과 겸손의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무용지물의 밭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이기심과 고집, 또한 지나친 재산의 증식에만 매달린다면 영원한 천국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고 포기하는 우매함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두 번째 사람은 '소를 샀다'고 하였는데, '소'는 좋은 의미로 근면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세상적인 '힘'을 나타내고 함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며, 좀더 비약하자면 '권력'을 상징한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를 샀다는 것은 곧 '힘과 권력'을 더 얻었다는 것이요 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요 힘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세상적인 능력을 더 얻었다는 것으로 그는 더욱 사악한 능력을 증가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에게는 천국 잔치는 무용한 것이며, 전혀 참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쁘지 않는 잔치로 여겨져서 이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고 묵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산 소, 즉 새로 얻은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더 크고 아름다운 잔치에 초대될 것을 믿고 있는 자로서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선한 의미에서 권력은 질서의 수단이 되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권력은 곧 파괴와 무질서, 그리고 자기 과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권력이 쥐어지게 되면 하늘을 찌를 듯이 기고만장하며 사욕과 정욕을 만족케 하는 도구로 이를 악용하고 남용하기를 조금도 주저치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듯 영원히 지속되는 권력은 없으며, 악용된 권력의 종말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응으로 끝맺어집니다. 그러므로 소를 산 것을 핑계로 천국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은 그 소의 권력과 힘에 의해 언젠가는 밟히고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또 한사람은 장가들었다고 합니다  새로 장가 든 사람에게 율법이 일 년 간 병역 등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는 뜻입니다.

(신 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그러나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하늘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이 율법의 정신을 잘못 악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잔치는 부부가 공히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잔치요 보다 더 아내의 기쁨을 충족케 해 줄 수 있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현실적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보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육체적 쾌락의 탐닉은 인간을 백치 상태로 타락시킵니다.

  내 집을 채우라 하심은  주인의 재촉으로 종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자리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눅 14:21,22)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길목이나 성문 앞, 아니면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골목 등에서 살며 행인들에게 구걸하거나 적선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감히 초청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였으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러움이나 수치, 또는 처지를 생각지 않고 순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자들에게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전파된 원인은 가난한 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데려 오라'(에이사가게)는 '몰고 오라, 인도해 오라, 안내 하라'라는 뜻으로 목자들이 양을 모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도의 독특한 목자적인 사역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와 같이 힘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양과 같은 자들일지라도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긴박함이 종의 대답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 종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최선을 다했으나 아직도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의 분부대로 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남은 자리가 있다는 종의 보고에서 그 잔치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사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명령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땅 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 아직도 비어 있는 이 잔치석을 채워야만 할 것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 하심은 아직도 길가와 산을 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올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길'(호도스)은 성밖의 공용도로를 가리키고 '산 울'(프라그모스)은 '둘러 막다'(프라쏘)의 뜻을 가진 말로 '울타리'를 가리킵니다.
'거리와 골목'이 성내의 영역을 뜻한다면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 잔치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대됨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경우 앞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자들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되고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의 '길과 산울 가'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온 민족에게 증거되는 때, 어떤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전해질 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자의 수는 차게 될 것입니다.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 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강권하여(아낭카손)는 '필요하다'(아낭케)의 뜻을 가진 말로  폭력적이거나 물리적인 강제력(compulsion)을 이용하여 데려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끝까기 설득하여 데려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이 엉겁결에 사양한다 하더라도 친철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양적 예법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달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설득하고 또 설득하면서 거기에 동의하여 구원에 참여토록 하는 사랑의 강권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서 80여 년간의 생애를 바쳤던 전설적인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에게 젊은 선교사들이 조언을 듣고자 방문했습니다. 그는 먼저 젊은이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선교를 감당하려고 하십니까?' 젊은이들이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저는 이 황무지 같은 중국 땅에 교회들이 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 중국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미개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테일러가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중국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고, 이곳 생활이 즐거워서도 아닙니다. 모래 바람이 일고 미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문명의 불모지가 무엇이 그리 좋습니까? 이처럼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즐거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히면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됩니다. 조금도 즐겁지 않은 것을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또한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허드슨 테일러의 일생)

  '내 집을 채우라'(23절).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구속 사역이 완성되는 시기까지 '큰 잔칫집'의 '빈자리'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현선영 전도사는 한때 중학교 과학교사였다가 심장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한 요구르트 아주머니의 끈질긴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당시 그 아주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못 이겨 주안장로교회에 동행했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후 치유의 은사까지 받고 이후 그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맹세했고 그 일 중에서 최선이 전도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1989년 당시 초보 땐 전도지 한장을 못 돌리고 주안역 지하상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땀만 흘렸으나 이후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해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전도꾼’이 됐고 당장 그 해 1000여명의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했다합니다. 90년 3000여명, 91년 5000여명을 교회로 인도했고 그녀의 전도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해서 92년 교회에서 ‘1만명 전도왕’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이후 그의 이름 앞에는 이 타이틀이 늘 따라붙었다합니다.

  주님이 초청한 사람들이 오기를 거절하자 사람들을 불러 왔으나 빈자리가 있으므로 사람들을 강권하여 채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자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절대적인 사항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이냐를 판별하는 능력조차도 엄밀한 의미에서 주어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만 땅 끝까지만 복음을 전파할 뿐입니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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