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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며 사십니까? (시 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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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사십니까? (시 30:1-12)

어떤 글에 보니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보통 네 가지 대답이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럭저럭 삽니다." 둘째는 "마지못해 삽니다." 셋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셋째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 그러면 넷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그냥 살아요."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한번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며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옆에 계신 분들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다음 주면 뜻 깊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하며 사십니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신앙 생활은 배움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알려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면서 배우고 연습해 보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나에게도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며 나아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워서 습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감사가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공할 때야 어느 정도 감사할 수 있지만, 실패할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란 웬만큼 배우며 연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힘듭니다. 이익을 많이 남겼을 때는 저절로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평소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우십시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감사의 예술을 터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그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피눈물나는 수고와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의 예술을 터득하려면 남보다 더 많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피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가 나에게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감사를 통해 엄청난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받아야 자동적으로 감사가 넘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함께 본 본문은 '다윗의 감사 생활'에 대해 잘 증거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을 가리켜 훌륭하다고 평가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감사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고난이 참 많았던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서 막내였지만 귀염둥이가 아니라 천덕꾸러기로 양떼를 돌보며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차기 왕에 예비 되었지만 왕이 되는 과정에서 근 20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핍박과 시련으로 겪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때때로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굳세게 지켰고, 특별히 감사하는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신앙이 약화되고 감사치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생 전체를 두고 볼 때, 그는 분명 감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난의 때에나 형통의 때에나 그는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고난의 때에는 낙심하거나 원망하기 쉽고, 형통의 때에는 교만하거나 방자하기 쉽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이게 잘 안됐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앙의 수련을 통해 환경이나 조건을 초월해서 항상 감사하는 신앙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늘 감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는 다른 이들처럼 환경 조건에 따라 휘둘리고, 그의 마음이 흐렸다 갰다 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낙심했습니다. 그리고 형통할 때는 교만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수련하고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늘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편인데 그런 과정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는 형통할 때에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교만했죠. 그러다가 고난을 당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은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신앙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 6절을 보면, 그는 과거 형통할 때에 영원히 그 인생이 요동치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장담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그만큼 축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살았던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한 동안 잘나가니까, 좀 잘되니까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잘되는 줄을 알고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금세 넘어집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그런 사실을 다윗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웠다"는 것은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우심으로 다윗의 인생이 정상까지 오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순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윗은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서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한순간에 지위와 가정을 다 잃고 유랑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자리까지 이르는 절망이 그의 삶을 덮어왔습니다.

어느 평범한 주부의 간증문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소 단조롭고 분주한 일상으로 마음에 불만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깼는데 허리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있고, 화장실도 못 갈 정도가 됐습니다. 결국은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고, 119를 불러 들 것에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각종 검사를 받으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살다 가나?''이러다 그냥 죽는 건 아닌가?' 점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걷게만 해 주세요. 아니, 아이들에게 밥해 줄 수 있게만 해 주세요. 아니, 일상생활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더 바라지 않습니다.' 그분의 병명은 '급성요추부염좌'였습니다. 다행히 한 달만에 퇴원합니다. 그 때 그분은 감격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걷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숨 쉴 수 있게 해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이 문제입니다. 생각이 바뀌니까 그토록 불만스러웠던 일상이 감사 제목이 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뭐, 우리 역시 크게 이 자매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잘 몰랐지만, 우리가 어려움에 빠진 후에야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동안 내가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과시였다는 깨달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죽으면 그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뭐, 다윗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제 죽음이 그를 덮어왔지만, 그 속에 잠자고 있던 신앙이 꿈틀거린 것입니다. 8-10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비로서 깨달았는데, 자신은 죽어가고 있어요. 그러니 더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후회가 엄습해옵니다. 죽음의 그늘이 덮을 때,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올려드릴 수가 있겠냐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그는 겸손하게 주의 은혜를 붙잡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처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지난 날 눈먼 바디매오가 길을 가던 예수를 향해 외쳤던 간절함입니다. 세상은 바디매오의 외침을 막았지만, 그 가슴속에 있는 사모함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다윗도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이 다윗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다윗은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다윗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감사 신앙'을 배웠습니다. 4절에 보세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이제 다윗은 고난의 때에도 형통할 때에도 영원히 감사하리라고 결단합니다. 12절을 보십시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결국 그의 입술에는 감사가 넘치게 됨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약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119:67, 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감사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신앙의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의 고백처럼 "나는 장미를 들고는 수백 번 감사를 했지만 가시를 가지고 감사한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라는 말은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장미를 놓고 감사해야 되지만, 가시를 놓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가시를 가지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무지개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길 원한다면 장미와 가시를 동시에 놓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장미만 들고 인생을 화려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가시 때문에 찔리고 고통 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도 그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는 5-6절에서 말합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가 이 구절을 쉽게 변역 한다면 "진노는 잠간이요, 은총은 영원하니, 저녁에는 눈물을 흘려도, 아침이면 기쁨이 오리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녁에 슬픔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스테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순교하기 전에 말했습니다. "보라 하늘 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바울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크나큰 슬픔, 어려움, 고통이 있습니까? 열려진 하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예비 된 면류관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비록 내가 저녁에는 눈물을 흘릴지라도, 아침이면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시인은 이 기쁨을 홀로 간직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을 같이 찬양하자고 초청을 합니다. 4절에 보면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 지어다."라고 말합니다. 11-12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 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 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감사의 삶으로 바뀌고 그 감격을 오늘 우리와도 함께 누리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감사는 기적의 씨앗이요, 기적을 여는 열쇠입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은 '말의 중요성과 그 엄청난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는 물론 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였는데,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면 물은 가장 아름다운 결정, 즉 완전한 육각수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몸에 무한한 면역력이 생겨 더욱 건강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놓고 짜증을 부리고 욕설을 퍼부으면 물의 결정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인체에 해를 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탄'이라는 말을 각 나라말로 물 컵 위에 붙여 놓았더니 물의 육각수가 다 깨지고 물의 결정에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한다', '감사한다'라는 말을 붙여 놓았더니 물은 완전한 육각수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을 때, 물은 고상한 품위를 더했고,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사와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물의 결정을 더 완전한 육각수로 만드는지 실험을 했는데, 감사의 결정이 사랑의 결정보다 힘과 영향력 면에서 두 배나 강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랑보다도 강한 힘을 보여 준 '감사'의 에너지는 우리 몸과 마음을 아름다운 육각수의 결정체로 만듭니다.

결국 감사의 말은 우리 인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메마른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날마다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여유로운 삶으로 더욱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언어가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감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귀에 들리시는 대로 감사가 넘치는 인생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3개의 명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1년에 3번 추수를 합니다. 이렇게 1년에 3번의 추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맞춰 큰 명절 3가지를 제정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명령하시기를, 3번 절기를 지키면서 감사를 드릴 때 반드시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말씀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 공수로 여호와께 나와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그분은 우리 모든 생각의 한 토막 한 토막까지도 다 알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세세하게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약점까지도 다 아십니다. 즉 우리 마음이 재물과 쉽게 밀착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마음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쌓으면 쌓을수록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돈에게 왕창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부자가 구원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부자가 구원을 얻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이 많다 보니 마음이 자연히 그 쪽으로 가버리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마음으로는 있는 돈을 다 주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까 주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자유하고, 자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내 마음이 자꾸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갑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그래서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위해 빈 손들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보물을 네 손에 들고 나와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손에 들고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 앞에 어떠한 감사를 드렸습니까? 입으로는 많은 감사를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예물을 손에 들고 그 예물에 내 마음을 담아 드리는 감사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우리 교인들은 잘 하고 계십니다. 제가 감사헌금을 가끔 확인해 보는데, 감사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 안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 없이는 한 순간도 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하루, 아침에 나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이 평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안심하고 앞날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부족한 게 무엇입니까? 물질도, 건강도, 지위도, 권세도, 명예도,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감사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모든 것 다 갖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벽에 던진 공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공을 벽에 힘껏 던지면 그 공은 힘차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힘없이 던진 공은 힘없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새로운 감사의 조건이 다시 나에게 찾아옵니다. 감사를 잊고 살면 우리에게 감사할 꺼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더 감사하고 더 행복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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