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시 126편)

  • 잡초 잡초
  • 1854
  • 0

첨부 1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시 126편)
 
시편 126편은 ‘올라가는 노래’라는 명칭이 문장 첫머리에 붙어 있습니다. 산꼭대기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순례자들의 노래라는 의미이거나, 앞 구절의 단어를 이어 받아서 다음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계단식 노래라는 의미 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와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내용을 볼 때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 같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역전의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되돌아가다’(슈브)는 의미가 여러 번 반복됩니다. 단어 자체의 반복뿐만 아니라, ‘포로’(쉬바, 셰부트)라는 단어가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첫 구절이 여호와의 “돌리실 때”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절이 농부의 돌아오는 모습으로 마감되는 것 역시 여호와의 돌리심이 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시의 구조를 좀 더 살펴보면, 1-3절은 이미 돌아오는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을 회고하며 노래합니다. 4-6절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완성을 소망하며 노래합니다. 포로귀환한 후 성전은 재건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시가 지어졌겠지요. 그래서 이 시편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그 구원이 ‘아직 아니’ 완성된 시점을 살아가면서 그 완성의 날을 소망하는 이 땅의 성도들에게 깊은 공감을 줍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1) 이스라엘 왕국은 BC 1050년경에 사울이 초대 왕으로 등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대에 태평성대를 누리며 최고로 번장했지만,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의 때에 남북으로 두 조각이 났습니다. 여로보함의 길을 쫓았던 북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되었고, 남쪽의 유다 역시 그들의 죄로 인한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좀 쓸 만하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끝이 난 것 같아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70년 후에 회복케 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완전히 망해버린 나라의 회복, 무너져버린 성전의 재건 이 모든 일들은 참으로 꿈같은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꼭 70년이 지난 BC 516년에 끌려갔던 포로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지요. 공동번역 성경은 1절을 좀 더 시적인 표현으로 실감나게 번역했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날, 꿈이든가 생시든가!”

아담이 첫 범죄로 낙원을 상실 한 후에 모든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낙원의 회복을 꿈꿉니다. 낙원,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성취, 성공, 기쁨, 만족, 영생복락 등 말은 달라도 궁극적인 꿈은 같습니다. 풍요, 즐거움, 행복을 향한 다양한 인생 목표와 전략과 수단이 있지만, 그 모든 추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낙원 회복입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은 건강의 회복을 꿈꾸고, 가정이 붕괴된 사람은 가정의 재건을 꿈꿉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 살았던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을 꿈꾸지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복락원에 대한 갈망을 잘 포착한 사업가들은 ‘인생 역전’이라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도박장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의 ‘회복’이 우연으로 말미암았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비록 포로 귀환이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인은 그들의 회복이 어떤 훌륭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시인은 눈은 사건 이면에 있는 어떤 존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 돌리실 때에”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2a)고 노래합니다.

성도 역시 복락원의 꿈을 꿉니다. 성도가 고난의 때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은, 고난을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고난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 역시 가족과 성도들이 좀 더 건강하면 좋겠고, 이왕이면 재정적으로도 좀 더 넉넉하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참 성도들은 그 방법에 있어서 ‘우연’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재수 좋게 일이 잘 풀렸다거나, 사람 잘 만나서 횡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참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잃어버린 건강을 누가 회복시킵니까? 망가진 삶을 누가 회복시킵니까?  무너진 가정을 누가 다시 세우실 수 있습니까? 낙심과 절망의 마음을 기대와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물론 때로 돈이 그 일을 합니다. 때로는 사람의 칭찬과 격려와 노력이 회복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되지 않는 일이 있고, 아무리 사람이 노력하고 격려하고 칭찬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돈의 필요를 인정하고 사람의 격려와 칭찬과 노력이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정하신 뜻에 맞을 때만 유효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은 포로 생활에서 돌리신 여호와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신 여호와 말씀으로 인해서 그들은 함박 같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들의 입술에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렀습니다. 성도가 참으로 기뻐할 수 있을 때는 어떤 때입니까? 많은 소득이 생겼을 때일까요? 아닙니다. 많은 소득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점도 있지만 근심 걱정을 아울러 가져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참으로 평안할 때는 성공하고 성취했을 때일까요? 아닙니다. 성공과 성취가 주는 유익이 많은 반면에 잃어버리게 하는 것 또한 적지 않으며, 더욱 바쁘게 하고 밤새 잠 못 이루게 하는 일 또한 많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염려하기도 있지만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염려하기도 합니다. 이를 보면 소유나 성공 그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성도의 입에서 참으로 함박웃음이 터지고 노랫가락이 흘러나올 때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해 모든 길을 인도하셨다는 사실, 참으로 여호와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 여호와께서 내 모든 눈물과 슬픔을 지켜보시며 내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때와 기한을 조절하셨다는 사실, 여호와께서 내 모든 필요에 간섭하시며 참으로 적절하게 채워주셨다는 사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조차 “주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일을 하셨다”(표준새번역, 2b)고 말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놀라면서 내가 믿는 주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내 모든 수치와 괴로움을 잊고 참으로 즐거워하게 됩니다.

시인은 포로에서 해방되었으나 아직 예전 모습이 온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닌 역사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기쁨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눈앞에는 펼쳐져 있는 것은 무르익은 오곡백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앞에는 그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황무지로 변한 들판입니다. 그들은 장거리 경주의 결승점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이제 뛰기를 시작한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박토가 된 농토들을 다시 옥토로 가꾸는 고된 일을 해야 합니다. 돌아온 고향에는 반겨주며 친절하게 도와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낯선 이방인들이 터를 잡고 그들의 재건을 방해하며 위협했습니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이 아직은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안정합니다.

눈물 나는 현실 앞에 서 있는 시인은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시인은 동시에 “주께서” “내 운명을 회복시키셨을 때”(표준새번역, 1)를 생각합니다. “주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표준새번역, 3)를 마음에 되새깁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복을 위해 주님께 간구합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사로잡힌 우리가 다시 한 번 번영하게 해주십시오”(표준새번역, 4). 중동지방은 건기와 우기가 있어서, 바짝 마른 땅에도 우기가 되면 순식간에 시내 물로 넘쳤습니다. 시인은 이미 그들을 위해 큰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번영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메마름의 시절은 지나가고 은혜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은혜의 비가 풍성히 내려지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이제 눈물 나는 현실에 직면해서 눈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 지금은 한줌의 씨주머니를 가지고 뿌리러 나갑니다. 당장 먹을 양식이 부족하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써 씨를 뿌립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하나님을 아는 까닭입니다. 건기가 우기로 바뀌듯, 마른 땅이 풍성한 물로 넘쳐나듯 여호와께서는 우리네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전시키시되 풍성히 역전시키심으로 함박웃음이 터지고 절로 노랫가락이 입에 흥얼거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예배 때마다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 제목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것은 감사제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사의 제목들을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물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제목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리는 사람도 많음을 압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울어본 사람은 더 큰 기쁨을 거둘 것입니다. 눈물 나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말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행동하는 씨앗들을 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박웃음으로 웃게 하실 것을 소망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