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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화를 냄이 옳으냐? (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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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화를 냄이 옳으냐? (욘 4:1-4)

2장의 요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기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였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3장의 요나는 그러한 기도가 응답되어서 육지에 토해졌고 하나님의 은혜와 오래 참으심 속에서 재임용 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상황들 속에서 무엇보다도 요나 자신이 가장 많은 용서를 받은 용서의 표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다시 맡기신 사명의 은혜를 따라서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 수십만의 사람들이 재를 쓰고 회개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결과를 보면서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요나의 할렐루야일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화내는 선지자 ‘요나’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크게 나타났는데 감사하고 찬송하기는커녕 심히 화를 내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왜 화가 날까요? 요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내 뜻과 맞지 않다고 화를 내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어떤지 생각해보기원합니다.

1. 선지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먼저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지요.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은 자들로서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을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때로는 죄를 자복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며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말할 수없는 보람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선지자로서 그 기쁨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맡기신 사명은 니느웨라는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선지자의 마음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2. 악함을 드러낸 요나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달랐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습니다.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이 말을 쉬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히 여겨 화를 냈습니다.”

‘화를 냈다’는 말은 ‘라아’(악함)이라는 뜻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성냄--하라아(=악함)
(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하는데,

여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의 (그 괴로움)은 그 악함(메 라아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에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을 말씀하셨습니다. 악독이 하나님 앞에 까지 상달하였다고 하시면서 그 악독을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함을 책망하는 사명을 갖고 온 요나가 4장에서는 오히려 자기의 악함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악한 사람임을 드러내게 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니느웨에 대한 고정관념이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살았던 때에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앗수르의 엄청난 세력은 이스라엘의 평화와 안녕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마음에는 앗수르의 멸망을 간절히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앗수르 사람들의 악함이 하늘에까지 상달될 정도로 소문난 잔인한 사람들이었고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상하기 싫었던 일이 현실에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굉장히 못마땅해 하고 화를 냈던 것이지요.

요나는 자기 생각에 갇혀 있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데 죄 지은 사람이 너무나 쉽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너무나 쉽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어떤 대가를 치른 뒤 구원을 해 주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안 그런가요? 악한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하고, 선한 사람은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의가 아닐까요? 그런데 악한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을 한다면 이처럼 불공평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하는데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것까지도 불의라고 규정짓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용서하시고, 심판하시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는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고 용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웃이나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아 신앙생활 하는 것은 반가워합니다. 그러나 나와 원수를 맺었던 사람, 나에게 악을 행하였던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자기 백성들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절대로 용서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를 냈습니다. 왜 저사람들이 회개를 하는거야? 왜 금식해? 그러지 말고 40일 채워야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신다는 것이 그렇게 싫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악한 면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 다시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고, 요서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용서받고 은혜 받고 구원받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청년들하고 영적 분별력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았겠습니까? 구약 성경을 달달 외웠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예배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뜻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로 여겼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교제를 하십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자기 생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사명을 받은 선지자임에도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3.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주께서 자비롭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기보다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까지 항변을 합니다. 이것이 싫어서 재빠르게 다시스로 도망했는데 왜 나를 또다시 부르셔가지고 이런 모습을 보게 하시냐는 것이지요. 니느웨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는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를 죽여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2장에서의 기도와 본문에서 요나의 기도는 너무나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장에서 기도는 주어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고백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주어가 아닙니다. 주어는 ‘나’입니다. 다시 한 번 잘 읽어보겠습니다.

(욘 4:2,3)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한글 성경에는 5번만 나오지만 원어에는 9번이나 나옵니다. 철저하게 나를 주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내 생각대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불만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일까요? 자기 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신의 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는데 자기처럼 열심히 봉사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나, 아니면 나의 봉사로 인한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그리고 잠깐 쉬는데 이때까지 실컷 놀다가 잠깐 일하는 것을 본 목사님이 그 사람을 칭찬합니다. 이것을 보면 속에서 불이 나지 않습니까?

요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고 열심히 믿음으로 살았는데 우리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이 전한 말 한마디로 인해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켰다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는 그 모습을 보니 속에서 불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신앙인의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봉사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가 부각되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회 봉사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나만의 기쁨이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감사함일 뿐입니다. 나의 섬김으로 누군가가 가만히 앉아서 그 섬김의 혜택을 받는다면 오히려 나는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주어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했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해, 나는 우리 교회를 위해, 나는 누구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냐고 항변하면서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요나가 자신의 악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처럼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어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볼까요?
(고전 15: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행한 것을 통하여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행한 일로 인하여 교회에 덕이 세워지고 다른 사람이 세움을 입고 혜택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시험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 안에 텃새가 생기지 않습니다. 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 중 하나가 기존 교인들의 텃새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것 같으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나의 기분에 조금이라도 상한 일이 생기면 목사님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과를 보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까지 하면서 심히 싫어하고 화를 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욘 4:4) 『여호와께서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옳으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요나는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했습니다. 그런 요나가 4장에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화를 내면서 죽여 달라고 까지 합니다. 이 모습은 변화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맡겨드리고 자신은 그 은혜에 감사하겠다고 고백하지만 아직도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어서 혈기를 부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이 이루어짐에 대하여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더 화를 내는 그런 연약함이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없는지요. 우리 생각에는 내가 이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정도는 주시겠지! 이렇게 한계를 정했는데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그리고 나보다 훨씬 헌신도 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주의자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잘 되어질 때에, 저 사람이 나보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인정을 더 많이 받는 것을 볼 때에 나의 혈기가 튀어나와 미워하며 질투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변화되지 못한 옛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용서받는 것에 대하여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듯이 감정을 품지 말고 온전한 용서를 실천하십시오.

또 하나님의 뜻과 자기 욕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나와 같지 않아서 악독이 가득한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시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뜻을 인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음 주면 추수 감사절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용서와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음을 바라보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범사에 잘되는 것이 보인다 할 지라도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깨어서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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