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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환난 중의 감사 (시 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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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의 감사 (시 138:1-8)

오늘 2007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환난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과 환난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환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도 환난을 겪었고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환난도 있지만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중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물질의 고통,질병의 고통,인간관계의 고통 물론 힘들고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가장 큰 고통은 신앙으로 인한 고통일 것입니다. 내가 한번 제대로 믿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할때에 우리에게 이상하게 고통이 먼저 찾아옵니다. 그것이 남편으로 인해 올 수 있고 아내로 인해 올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집안 식구들을 통해 찾아올 수 있고 그것이 때로 교회를 통해서 찾아올수도 있습니다. 내가 은혜받고 새출발을 하려고 하는에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시인 다윗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본문의 다윗의 시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고 난 뒤에 쓴 시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 항상 법궤가 중심이었습니다 . 행군할때에 법궤가 항상 앞에 있었습니다. 법궤가 앞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를 갔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도착하면 법궤를 가운데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여 머무르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 하나님은 인도하시고 우리의 중심에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행위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개인적으로 신앙적으로 비웃고 공격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실때에 너무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자 그를 비웃는 자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왕이란 사람이 저렇게 체신없이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엇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 미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때 가나안의 부족신을 믿는 어떤 자들이 내부적으로 그런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윗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개인적인 환난 삶의 환난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시편138편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고백이 바로 감사입니다.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라고 합니다.
2절 “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감사하오며”라고 합니다.
4절 “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6절에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라고 합니다.
다윗의 감사는 환난 중에서 감사요 환난가운데서 감사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도 환난 가운데 고난 가운데 시련의 중앙에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보면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하고 부정할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 다윗은 환난 중에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3가지 비밀을 봅니다.

1. 환난 중에서 감사하려면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환난 속에서도 감사하려면 먼저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지금 시인은 결단하면서 나아갑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시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 다윗은 찬양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있지만 어려움의 상황이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단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공격이 있지만 자신의 신앙을 유치하고 이상하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윗은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겟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이 오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나쁜 행위들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면서 예배드릴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에서 찬양의 자리에서 후퇴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였습니다.
환난이 다가올수록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이런 다윗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면 많은 다윗의 시들이 대부분 고난 중에 환난 중에 쓰여졌습니다. 가령 시편34편 같은 경우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쓴 시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미친사람처럼도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암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환난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의 한가운데 있습니까? 더욱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환난 중에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 어떤 결과를 얻습니까?
분명히 여전히 환난은 옮기거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7절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주께서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환난은 그냥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도했더니 주께서 내 영혼을 격려하시고 내 영혼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강하고 튼튼하면 어떤 환난도 어떤 고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적으로 강하면 세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환난과 고난과 같은 상황을 그냥 두시고 우리의 마음에 응답을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한 내적인 능력을 주시어서 그 환경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기도하면서 예배드리면서도 먼저 우리의 눈 앞에 환경을 바라보면서 절망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기도햇는데 왜 예배드렸는데 그냥 환난이 남아잇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의 환경 고난의 상황을 허용하시면서 우리를 섭리하여 가십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환난이 있습니까? 환난을 이기고 주 앞에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주님 앞에서 이 환난 속에서도 경배와 찬양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 고통이 다가오고 잇다면 더욱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감사가 일어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2.환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주의 말씀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가? 주의 말씀의 승리를 내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4절에 여호와의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의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의 말씀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열왕들이 나를 공격하고 내가 비록 환난 중에 있어도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이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할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세상에서 승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환난을 통과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로 과정 과정 고생이 있고 어려워도 마지막에 승리할 것을 알고 믿는다면 과정의 어려움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날에 이길 승리의 확신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최후는 승리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8장 37-39절을 승리의 약속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장되신 에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승리합니다.우리는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승리를 믿으면 승리의 증거와 실상을 볼 것입니다. 만약에 실패를 믿으면 실패의 증거아 실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새벽마다 긍정의 힘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함께 닉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잇습니다 . 냉동열차 안에 부주의로 닉이라는 사람이 갇혓습니다. 그는 그 열차 안에서 갇혀서 죽어가면서 펜을 꺼내어 기록을 남겼습니다. “ 너무 춥다 몸이 마비된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아마도 이것이 내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그 글은 닉의 마지막 자취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출근한 승무원들은 냉동열차의 문을 열엇을때에 구석에 쪼그린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 동사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조사에 따르면 닉이 갇혀 있던 냉동열차는 기능이 정지된 상태엿습니다 . 냉동 열차 안의 온도는 보통 실내온도보다 약간 낮을 뿐이엇습니다. 닉은 냉동열차가 가동하고 있다고 믿은 나머지 추위를 느끼고 몸이 얼어붙은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패배한 순간 그의 몸도 쉽게 패배한 것입니다. 시련의 순간 고난의 순간 아니 어떤 삶의 순간이라도 우리가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예언이라고 하는 말이 잇습니다. 인생에 우리가 주님의 승리의 예언을 믿고 기다린다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환난의 순간에도 승리의 말씀을 믿을때 감사로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


3.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려면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이 온다고 환난이 주인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다고 고난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난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시작을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8절에서 시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 내가 겪는 환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온전하게 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 모든 환난은 의미없는 것이 없습니다 .
본래 “환난”이란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틀 속에서 집어넣고 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뭔가 만들어져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갖고 환난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장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
때로 우리는 그때의 시각만을 갖고 환난의 한 가운데서 원망도 합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시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스케줄을 갖고 게신 하나님은 주권 가운데서 고난의 섭리 가운데로 우리를 두시고 그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아십니까?
신앙의 고난을 이긴 사람들로 인해서 생긴 절기입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순례의 길"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암스텔담과 랑덴에서 얼마동안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자(1558)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청교도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고국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1620년 9월 29일 영국의 종파주의자(English Sectanians) 60명, 승무원 6명 총 101명(남72명, 여29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호리어스항을 떠났습니다. 2개월이 넘는 모진 고난의 항해 끝에 1620년 11월9일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카드 만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안의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면서 거의 반수가 괴혈병, 폐렴 등을 질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듬해 1621년 2월28일까지 50명이 세상을 떠나고 봄이 오기 전까지 하루에 2,3명씩 죽어갔습니다.
청교도들은 개혁의 의지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일념으로 윌리암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지도 아래 정착을 시작하여 열심히 개척하였습니다.

1621년 3월 이후에는 인디언들과 청교도들 사이에 분쟁도 있었으나, 상호 협력 및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후 인디안들로부터 옥수수와 밀, 경작법 등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청교도들이 양식이 부족해서 일 주일에 3일씩 금식을 하며 어렵게 지낼 때는 인디안들이 짐승들을 잡아다 주기도 해서 연명 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그들이 심은 옥수수와 보리, 밀 등이 풍작을 이루었고 가을추수를 하였습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청교도 지도자 브래드포드는 인디안들과 함께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축하하기로 하고 인디안 추장 마사소이드를 초청했습니다. 마사소이드 추장은 90명의 용사를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날 청교도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가서 많은 칠면조를 잡았고, 인디안들은 사냥을 해서 다섯마리의 사슴을 잡았습니다. 그 이유로 추수감사에는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이렇게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건설된 나라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에 고난을 피해 신대륙으로 신앙의 피난을 떠났던 이들은 왜 이렇게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가 고민하면서 어쩌면 회의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선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주권을 믿으면서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엿습니다.
그럿은 주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의 결단으로 가능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승리의 믿음으로 가능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환난중에서도 감사하는 성숙한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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