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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을 다하여 드리는 헌신과 그 끝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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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다하여 드리는 헌신과 그 끝(막 14:3-9) 

아무리 견고한 나무라고 할지라도 바람이 불면 잎사귀 흔들리고 가지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비가 오면 비 맞고 눈이 오면 잎사귀와 가지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바다라도 철썩이는 파도를 맞으면 부딪쳐지게 됩니다. 미세한 분량이긴 하지만 닳아져서 없어질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와 같이 때때로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여건에 의해서 이러저러하게 변모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내 주변여건 따라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과 그 뜻을 이루기 원하는 삶의 소망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그저 잘 자라주면 그것이 부모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장성하게 되면 이제 우리에게 기대되어지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일을 안 하면 삶의 존재마저 부인하게 되는 무거운 삶의 짐조차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게 주어진 것만을 내가 기뻐하면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게 주어진 것 가지고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베풀어야 우리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숙의 댓가요, 인생의 받은 빚을 갚아야 되는 때가 도래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은 우리들에게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결단을 요구하는 아픔이 있어도,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하는 참된 가치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우리는 모든 주변사람들로부터 다 축하를 받으며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점점 자라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제는 남을 기쁘게 하고 나로서는 주님을 기쁘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까지 편안했던 마음에 부담이 오고 연약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때가 이 때입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김으로 우리는 훨씬 더 큰 진보의 장면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속의 기쁨을 노래하는 수준에서 이제는 헌신의 기쁨을 노래하는 수준으로 상향되는 것을 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픔 속에 시도함으로 인하여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제 오늘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예수님이 거하십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아주 값진 향유를 옥합에 담아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데 (삼백 데나리온은-한 데나리온이 한 장정의 일일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삼백일분의 임금이니까 연봉정도 됩니다. 수천만 원 되는 겁니다.) 그렇게 비싼 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왜 이렇게 허비하느냐?”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인을 핍박한 겁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 향유를 부어드리려고 했지만, 자기는 한 것도 없이 옆에서 평가하고 비난만 한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괴롭게 말라. 이 여인은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함께 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천하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씀대로 2000년이 지난 시공간을 벗어나서 역사의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오늘도 우리는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도대체 정성과 힘을 다하는 헌신은 무엇이고, 그 헌신의 끝에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헌신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헌신이라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은 아니고 일부러 이룬, 의도적이라는 겁니다.
'내가 은혜 받았더니 저절로 헌신하게 되더라.'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헌신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어떤 때는 마음에 이룰 수 없는 것, 마음에 꺼려지는 것, 마음에 때로는 갈등이 생기는 그 순간에도 내가 의도적으로 믿음 안에서 결심함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실행할 때 그것이 내게 그 다음에 유연히 흘러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 마음이 뜨거워져서 헌신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보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도 우리는 너무 많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이 여인은 오늘 예수님께 나드 향유를 부어드리는데 우연히 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냥 갑자기 하다보니까 순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보니까 이 나드 향유가 굉장히 비싼 거네요. 이 시대에도 1년 연봉에 해당하는 만큼의 그런 기름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했으니 정확히 맞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그냥 우연히 '한 번 부어볼까?' 이게 아니에요. 정말 그 마음에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나드 향유를 담은 그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내가 정말 예수님 외에는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는 단 한번으로 그의 정성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옥합을 깬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자신의 소원이 없었으나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려는 소원은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불림을 받아서 3년 동안 예수님과 시간을 같이하며 배우고 동행하며 철저한 깨우침과 주님의 나라를 열망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불확실했던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부르시고 부활과 승천이후에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 이들이 달라져서 이제는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헌신자들이 됐던 것입니다.

처음 주님 앞에 왔을 때는 이런 헌신의 마음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이들에게 헌신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심어주셨을 때 이들에게 새로운 헌신의 역사와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후반을 보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쫒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헌신은 매우 선별적인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되는 대로 살아서 헌신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에 어떤 특단의 결심을 내려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자주 인용하지만 <요한복음 6장 67절>을 보면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보며 예수님의 놀라운 권세의 역사를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가치의 변화, 상황의 변화, 모든 의미와 분석의 변화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다 시간이 지나면서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비감한 어조로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모든 사람이 내 곁에서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보고 병 고치는 역사를 보고 그들은 기적을 체험하려고 내게 왔지만 그들은 결국 다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느냐?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만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진정한 헌신이라는 것은 마음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깨닫고 이것이 옳다라고 분별하여 의도적으로 결심하여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내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고, 내게 있는 가장 귀한 나드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리는 것입니다.
동양의 습관에도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썼던 잔은 깨뜨려버린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못쓰게요. 아마 옥합을 깨뜨린 것이 이런 의미가 있었는지는 하여간 특별히 예수님께 마음의 사랑과 헌신을 마리아는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를 위해 힘을 다할 수 없습니다.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옥합을 깨는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주님께만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드리겠다.'는 이와 같은 마리아의 모습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자기도 뜻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일을 했습니다. 구속사역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9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헌신도 역시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헌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헌신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시편 37편 25-26절>을 보면 ‘내가 어려서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은혜의 사랑과 헌신과 아름다운 믿음의 결실들이 그 후손까지 이어짐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 돌베개를 세워 기름 붓고 제사 드려 헌신을 서언 합니다. 야곱이 그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는 수많은 식솔과 그리고 수많은 재물을 거느린 축복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헌신에 대한 그릇된 시각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그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서 발끝까지 흘러내리게 됩니다. 다른 성경에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뭐라고 얘기 하냐면 분을 내서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라고 말합니다.
이 행위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정하는지 물론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이거 삼백 데나리온은 얼마. 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따지면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지출이나 소비나 낭비로 보는 것입니다. 허비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수량이 얼만큼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올바르게 사용되느냐 입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그릇되게 사용되느냐라는 뜻이겠지요.
주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남아돌아서 허비하는 것도 아니고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지출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는 축적하고 쌓아두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시각을 가진 자의 행동을 보면 오늘 본문을 보니까 분을 낸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 시대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믿음의 백성이 하는 모든 일들을 보면서 엉뚱하게 거기서 분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교회가 왜 그러느냐? 왜 더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그런데 오늘 성경하고 너무나 똑같은 것이 이렇게 말한 사람은 자기는 하나도 안 도와줬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남을 하나도 안 도와줬어요. 그리고 남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얘기 한단 말입니다. 정 도와주고 싶으면 본인이 자기 것 가지고 도와주면 되는 겁니다. 왜 남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얘기합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성경의 다른 구절, 병행구절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해서 정확히 가롯 유다라고 얘기하고 있고, 저는 돈을 훔치는 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돈궤에 손을 넣어 돈을 훔치는 자라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화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팔아서 그것을 돈궤에 넣으면 자기가 그것을 훔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럼 자기가 남을 도와주지 남에게 비난 하냔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 기뻐하고 감사하며 격려해 줘야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이게 부족해, 이게 부족해 하고 지적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것을 가지고 해야지 왜 남에게 참견 하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할 때 때로는 그들의 마음에 안들 때도 있겠지요. 그럼 안 드는 부분은 내 것을 가지고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괜히 다른 사람에게 분내는 것은 어리석은 성경본문에 나오는 것 같은 똑같은 얘기라는 겁니다.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구속사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지와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무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죄악과 욕심과 정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은 진정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음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결국 이와 같은 탐욕을 가진 사람이 자기 탐욕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릴려고 오히려 다른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마음에 헌신에 대한 그릇된 시각-소비한다, 지출한다, 낭비한다는 것, 허비한다는 것-우리는 시간이 남아서, 물질이 남아서, 마음이 남아서, 힘이 남아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살펴봅니다.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헌신을 보고서 칭찬을 했습니다. 분내고 여인을 책망하는 제자들에게 자제를 하도록 했습니다.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몰라도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제게 헌신이라고 생각해서 별것 아닌데 제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언젠가 명절이었습니다. 명절 때 금요기도회에 나오는 분이 많지 않잖습니까? (안 나와 봐서 잘 모르시긴 하지만) 많이 안 나옵니다. 금요심야기도회 끝나고 저는 제방에 내려가서 정리하고 가야 되잖아요. 나가니까 벌써 12시 되어가잖아요. 11시 반에 끝나니까. 그 때 집사님들이 몇 명이 부시럭 부시럭해서 나와 보니까 청소도구가지고 청소를 하러 가시더라고요. 내일은 명절이고 모래는 또 주일이고 하니까, '내일 모레가 명절인데......'

이 분들 생각이 이런 것 같았습니다. 내일 모레 주일날 예배드리는데 내일 토요일에 와서 청소해야 되는데 교회가 아무래도 넓으니까 다 부분별로 나누어서 청소를 하는데 그러니까 금요기도회에 왔다가 밤에는 집에 특별히 다른 일을 안 해도 되시는지 그 밤에 청소를 하시려고 오셨더라고요. 그런데 제 목사의 마음에 짠함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성도들을 생각해서 하나님의 전을 깨끗하게 하려고 시간이 안 되니까 그 밤중에 와서 청소하는 것을 보니까. (목사는 그런 것 몰랐습니다.) 명절 때마다 그런 분들이 와서 청소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내가 모르는 더 헌신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또 한 번 생각했습니다.

이 교회는 목사조차 모르는 봉사하고 헌신하는 분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서 여러분이 예배드리는데 불편함이 없다면, 불편함이 없도록 누군가가 많은 수고를 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편함이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이크는 찍찍 거릴 것이고, 불은 꺼졌다 켜졌다 할 것이고, 여기는 너무나 덥거나 추울 것이고, 또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을 것이고, 복잡할 것입니다.

여러분 본질 외적인 것이지만 그와 같은 것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본질조차 상해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볼 때 헌신하는 사람들이 늘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헌신하는 헌신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겁니다.

교회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헌신하고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헌신도 안하고 말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헌신도 하는데 말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이 열심히 일하고 말을 안 해요.
어떤 분은 열심히 말만 하고 일을 안 해요.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은 하는 반면에 말도 많이 해요.
여러분은 어떤 편입니까?
주로 몇 번째가 많습니까?
첫 번째가 많죠? (갑자기 그렇게 숙연해 지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아름다운 헌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헌신은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롯 유다는 꽤 의로운 것 같아요.
특별히 유월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맞는 것 같아요. 형식적으로는 맞습니다. 형식논리라고 얘기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맞아요. 그러나 실제는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말로는 그럴듯한데 주장하는 사람치고 실행이 많은 사람은 별로 드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런 얘기합니다. 우리는 선언적 교인 되지 말고 실천적 교인 되자.
저는 뭐 주장하고 성명서내고 하는 것 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것 내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 원칙을 누군가가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더 분명한 깨달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면 날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입니다.” 말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 삶을 통해서 표현하시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고 ‘아,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구나!’하고 느끼면 그것이 가장 진득한 복음의 설파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정한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또 헌신은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헌신도 때가 있단 말입니다. 가장 좋은 헌신의 때는 언제죠?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면 성도들이 꼭 일이 안 된 다음에 오셔서 "그때 내가 그렇게 헌신이라도 할 걸....." 그러면 저도 마음에 '정말 그럴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설사 어떤 일이 안 돼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야, 그때 내가 어려운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은혜를 나누고 그게 정말 남는 거였다.' 이런 생각 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때로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지도 하는 거잖아요.
내려가도 후회 없는 것이 뭐죠? 다 베풀고 나눈 것 아닙니까?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정말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저는 늘 요즘 기도하는데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내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게 하시고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내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확신이 더 들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와 은총을 받으면 우리 마음속에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는데 모든 만물은 그 있어지는 원래 모습대로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모든 것은 그 있는 모습대로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자기 모습대로가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모습이 우리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모습이 우리의 본 모습이지요?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마음, 주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으로 우리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애틋한 마음이지요.

정말 어려운 사람을 볼 때 정말 저 사람은 눈에 보기 싫다라고 생각해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줘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까?
성도는 성도답게 있을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겁니다. 성도는 헌신의 모습으로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보면 내가 원하는 것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꿈꾸었던 꿈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 못해도 주님께서 나에게 원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살고 마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요, 성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일들 다 있습니다.
정말 말하기 싫은 어려운 순간도 있고,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가슴 아픈 일들도 또 우리들에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런 일은 다 있는 겁니다. 다만 서로 얘기를 안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이런 아픔을 품고 가는 삶이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우리는 주님을 품고 주님의 은혜 속에 살기에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헌신의 끝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인정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헌신의 기쁨을 체험하시고 이제 우리의 수준이, 내 한계가 ‘여기까지야’ 라고 금 그었던 것에서 그것을 툭 쳐버리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무한한 헌신과 은혜의 지경에 나아가 우리의 은혜의 영역들이 확장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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