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 (마 25:14-30, 눅 19:11-27)

  • 잡초 잡초
  • 1676
  • 0

첨부 1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 (마 25:14-30, 눅 19:11-27)

(마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눅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결산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에는 인생을 부담 없는 소풍처럼 여기며 죽음을 담담히 맞는 시인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 말씀에서 노래하는 인생은 소풍보다는 좀 심각합니다. 한 해 농사를 짓고 그 수확에 대한 심판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긴장감이 있습니다. 수능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기다리고 있는 수험생처럼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좋은 점수가 나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재수를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두 비유는 같은 의미의 비유들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멀리 가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 마25:19절에 보니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는 저희와 회계(결산)를 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있는 반면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으며 슬피 울며 어두운 데 떨어지는 형벌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어떤 귀인이 왕위의 자리를 받으러 가며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 주며 장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주인은 왕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제대로 장사를 했는지 평가를 합니다. 여기서도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라 칭찬을 받고 주인의 권세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고, ‘악한 종’이라 책망을 받고 재산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한가로운 소풍날의 잔치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에 따른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길어야 백년을 사는 짧은 일생이지만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됩니다. 우리 인생은 모래알처럼 작지만 그 무게는 천만금보다 무겁습니다. 영원에 비하면 한 점보다도 더 작은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천국과 지옥, 상급과 형벌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영원의 세계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 생의 삶이 더 중요합니까? 저는 이 생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짧은 생이 영원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천국과 지옥이 있는 이유도 이 땅의 삶을 낭비하지 말고, 헛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충실하게, 열매있는 삶을 살라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중년기에 맞는 위기의 시기를 우리는 흔히 ‘사추기(思秋期)’라고 합니다. 사춘기는 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정립해갑니다. 독립과 자유의식이 싹트는 때입니다. 이때를 제2의 탄생이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인생의 중년기에 싹트는 제3의 탄생과 같습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사추기는 자기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나, 자기 삶은 의미가 있는 삶이었나 하며 중간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자기 손 안에 든 인생의 열매는 무엇인가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마치 축구에서 하프타임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프타임은 중요합니다. 전반전를 평가하고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후반전에서는 바꾸어야 합니다. 하프타임을 잘 보내면 우리는 후반전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후반전의 삶입니다. 이때 승리하면 전 인생이 승리의 인생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추기에 느끼는 늦가을 같은 허무와 고민은 꼭 필요한 허무와 고민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우리는 떳떳이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열매가 있습니까? 항상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인이 떠나며 달란트와 므나를 맡긴 종들과 같습니다.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주인은 돌아와서 결산하자고 할 것입니다. 그때 부끄러운 인생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맡김

주인이 먼 곳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그 재능대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라 할 때 한 달란트도 적지 않은 양이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는 열 므나를 열 명의 종에게 주었으니 모든 종이 한 므나씩 가진 셈이 됩니다. 한 므나는 1백 데나리온입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큰 액수가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능력대로 받았으며, 므나 비유에서는 균등하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사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각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보통 재능을 탤런트라고 하는데 이 탤런트가 바로 이 달란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각자의 재능을 보면 다 다릅니다. 언어에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리 과학에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술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인관계에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받은 재능으로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특별한 재능 없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자기에게는 적은 능력을 주셨다는 원망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불평등한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달란트를 크기로 보지 말고 구분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종류가 다르지 크기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라는 종류, 두 달란트라는 종류, 한 달란트라는 종류라고 생각하십시오. 다섯, 둘, 하나 라고 하며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세상이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다 같은 것으로 봅니다. 큰 그릇이 있고 작은 그릇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큰 그릇이기 때문에 좋고 작은 그릇이기 때문에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큰 그릇은 큰 그릇의 쓰임이 있고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의 쓰임이 있습니다. 이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두 달란트로 다른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에게 동일한 칭찬을 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21절과 23절의 칭찬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우리는 이것을 열 므나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각 사람에게 한 므나씩 균등하게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것을 받았습니다. 바울이나 루터가 받은 것은 우리보다 더 위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게이츠나 여러분이 받은 것은 하나님 눈에는 다 동일하게 보입니다. 자기 받은 것을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동물들을 만들 때 각기 종류대로 만들었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25) 저는 사람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각기 개성대로, 각각의 은사대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자기답게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의 방식이 있고 두 달란트는 두 달란트의 방식이 있습니다.

미국의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 졸업식장에서 한 연설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이 대학은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흑인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명문대학입니다.

“오늘 졸업식에서, 또 앞으로 살면서 상을 받는 학생은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상입니다. 자신에게 존경받는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본래의 자신을 팔아넘겨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내가 처음 볼티모어 TV에서 일하던 시절, 상사들은 내 스타일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흑인 취향’이라며 좀 더 알아듣기 쉬운 말투와 내용으로 바꾸라고 요구했지만 거부했습니다. 억만장자가 된 지금도 그런 원칙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원칙을 버리고 타협하면 10배는 더 부유해질 기회가 있지만 결코 그러지 않지요. 여러분도 자신과 원칙을 지키며 살 길 바랍니다. 할머니는 늘 내게 ‘잘 커서 일자리를 줄 맘씨 좋은 백인을 만나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만, 내가 (백인에게 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백인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는지 할머니가 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자기답게 살 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던 이유에는 아마 비교의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만 작게 주었다는 주인에 대한 불평 때문에 그는 자기의 달란트를 사장시켜 버리고 말았을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실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주인과 나누는 대화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이처럼 각자의 달란트대로 키우지 못하고 성적으로 획일화한다는 점입니다. 수능 시험과 명문대학 진학이 그 인생의 성적을 좌우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육학 교수인 가드너(H. Gardner)는 인간 지능을 연구하여 인간지능은 IQ로만 측정할 수 없는 다중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지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논리-수리 지능, 2) 언어 지능, 3) 음악 지능, 4) 공간 지능, 5) 운동감각 지능, 6) 대인관계 지능, 7) 자기이해 지능, 8) 자연관찰 지능, 9) 실존지능 등입니다. 이 지능은 각각 독립적으로 작용하여 한 쪽이 높다고 다른 쪽이 자동적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주로 평가되는 분야는 이중 ‘논리-수리 지능’과 ‘언어지능’입니다. 국어, 영어, 수학 점수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과목이고, 이에 따라서 자녀들의 재능이 평가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이 두 요소보다 오히려 ‘대인관계 지능’일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가나 리더는 대부분 인간관계를 잘하고, 사람들과 협력하여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잘 이끄는 사람입니다. 석유왕 록펠러(J. D. Rockefeller)는 “나는 어떤 능력보다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에 가장 높은 연봉을 지불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시절 축구부 주장을 하거나 팀 리더 경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다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존 맥스웰이『열매 맺는 지도자』란 책에서 최근에 해고당한 사람들을 분석한 결과 그중 다수가 그들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효율적인 대인관계 능력이 부족해서 실직한다는 분석은 한 번 되새겨 봄직합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논리-수리 지능’과  ‘자연관찰 지능’에서는 천재적인 능력을 보였지만, ‘언어 지능’과 ‘대인관계 지능’에서는 유달리 뒤떨어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내내 그리스 어 과목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그리스 어 교사가 아인슈타인을 향하여 “장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방해만 되잖아. 당장 학교를 그만 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취리히 공과대학 입시에 떨어졌던 이유도 프랑스 어, 화학, 생물학 점수가 과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만 집중했지, 다른 분야는 흥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대인관계도 좋지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곳은 유명 대학 연구실이 아니라 특허사무소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그의 대인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똑똑한 친구야. 그런데 자네한테 단점이 하나 있어. 도무지 남의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단 말이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차별 없이 모두에게 훌륭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달란트와 므나 비유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그 재능들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라를 사실입니다. 내가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재능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합니다. 

상급

주인이 맡긴 재산으로 어떤 열매를 남겼느냐에 따라 종들은 상급을 받기도 하고 형벌을 받기도 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소유로 각각 배의 이익을 남긴 자들에게 주인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 하며 상급을 줍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인은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 하며 상급을 줍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는 상급을 줍니다(19).

그런데 이 상급들은 상급이라기보다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그들에게는 더 많은 일이 맡겨집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그들에게는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일에 대한 대가는 상급이 아닙니다. 더 큰 일입니다. 종이 받는 최상의 대가는 주인의 인정과 칭찬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내 인생에서 열매를 맺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얻고,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족은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신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은 주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24) 주님은 십자가도 즐거운 마음으로 지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보상은 주님께서 영광중에 우리를 맞고 주님과 함께 말하고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살전5;16-18)이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만족은 일의 성공과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25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샘물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샘에서 물을 계속적으로 퍼낼 때 그 샘은 오히려 물이 맑아지고 더 많은 물이 솟구쳐 나오지만, 물을 퍼내지 않고 그대로 두면 솟는 물은 완전히 멎어버린다. 영적인 선물과 교훈의 말씀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에 따라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과 더 큰 풍성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한 달란트와 한 므나 받은 자

그런데 문제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받은 달란트로 장사를 하지 않고 그 달란트를 그대로 땅에다 묻어 버립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서 25장 24절과 2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므나 비유에서 한 종은 땅에다 묻지 않고 수건에 싸두었다고 말합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눅19:20) 차라리 땅에 묻는 것은 안전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수건에 쌓아두는 것은 이자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이 악한 종은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19:21)고 변명합니다.

이 종들은 첫째 자기에게 일을 맡기신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평가합니다. 굳다는 것은 잔인하고 무정하고 냉혹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 태도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기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은 원인을 하나님 탓이라고 합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한 현실을 열거하며 하나님은 굳은 분이라고 정당화합니다. 이 사람은 불평만 하지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항상 남의 탓, 환경 탓, 하나님 탓만 합니다.

둘째, 주인이 일하는 방식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주인을 심지 않고 거두는 사람, 흩어 뿌리지도 않고 모으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소위 악덕 사채업자처럼 취급합니다.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은 무언가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면 당신을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투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실상 주인은 이 종에게 한 달란트와 한 므나를 이미 주었습니다. 아마 이 종은 자기가 받은 몫이 다른 사람들보다 작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셋째, 이 종들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이들이 장사나 이익이 나는 일을 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 손해나서 주인에게 혼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땅에 묻어두자, 손수건에 싸매어 두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종이 주인을 두려워했는가? 아닙니다. 두려워했다면 그는 주인의 말처럼 그 돈을 은행에 맡겼어야 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손해 보지 않고 원금과 함께 이자를 돌려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돈을 땅에 묻어 두거나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적당히 눈치를 보고 있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또 한편에서는 주인에게 혼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취한 태도가 그 돈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 사람은 현실과 종교에 양 다리를 걸치고, 양쪽에서 만족을 취하려는 자의 태도와 같다 할 것입니다. 이 악한 종은 하나님을 보자기에 싸두고 있습니다. 내가 헌신은 하지 않겠지만 종교는 필요하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싸두었던 보자기를 풀고, 땅에 묻어 두었던 하나님을 끄집어내려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마25:26)이라 책망합니다. 그가 악한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게으른 것은 자기 생각과 자기 이익에만 빨랐지 하나님의 일에는 핑계대고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길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나 므나를 감추어두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책망을 받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활용해서 열매를 내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