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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알면 감사를 안다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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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알면 감사를 안다 (눅 17:11-19)

어느 날 친한 두 친구가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말합니다.“3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내게 2억 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네.”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야, 너 참 수지 맞았다. 2억 원이면 어디냐.”친구가 다시 말합니다.“2주 전에는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내게 3억 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어.” 다른 친구가 부러워서 말합니다.“아이고, 5억 원을 벌었구나. 얼마나 좋으냐.”그런데 친구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지난주에는 고모님이 돌아가셔서 10억 원을 남겨주셨다네.” “그럼 15억 원이 됐네. 부럽다.”그런데 이 친구는 15억 원을 받고도 기뻐하거나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고 오히려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친구가 물었습니다.“많은 유산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는데 너는 왜 불만이 가득하냐?”그러자 15억 원 유산을 받은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야, 이번 주에는 아무도 안 돌아가셨잖아.”하더랍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아무 것도 없었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뭔가가 나에게 있었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감사란 없습니다.

탈무드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감사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벌써 불행이라고 하는 심판을 받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감사 할 줄 모르는 것만큼 더 큰 불행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말을 개역개정판에서 나병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나병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 병은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가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병입니다.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되고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자연히 동굴 같은데 함께 모여 살게 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사는 그런 집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열 명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 저주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병 환자들을 만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4절에"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 나병이 나았는지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나았다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병이 나을 만한 무슨 행위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곧바로 제사장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손을 잡았다던가, 다른 사람을 고칠 때처럼"네 병이 나았다."라던가 한마디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확인하러"제사장에게 보여라."하는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사실은 참으로 난감하고 황당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나병 환자들의 믿음입니다. 누구하나 따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뭘 만져주기라도 하고 보내세요."항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습니다.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감사의 예의를 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물론 너무 기뻐서 정신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감사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감사란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행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감사는 강한의무에서 시작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드리는 감사가 강한 의무감에 시달려서 마지못해 하는 감사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고 그래서 마음에는 원치 않지만 감사헌금도 드려야 되고, 감사예물도 드려야 된다는 중압감에서 감사 한다면 하나님은 아마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를 해 보십시오. 물론 돌아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오라고 말씀한 적은 없습니다. 돌아와서 꼭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7절을 보시면"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섭섭해 하시는 겁니다. 강요는 하지 않으시지만 섭섭해 하시는 마음은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감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감사가 조건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원 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기뻐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그 이후를 생각해 보면 그 나머지 아홉 사람들이 감사를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니지요. 그러나"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섭섭한 질문 속에는'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슬픈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지 그것을 은혜로 알았더라면 단 몇 사람이라도 더 감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 나머지 아홉에 대해서는 모두가 궁금해 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은 정밀검사를 하러 갔답니다.'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혹시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하는고 신중론자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내 병은 본래 나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는데 괜히 호들갑을 떨었나 보다.'생각하는 회의론자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하는 자연현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제 먹고 살아야 되니까 두고 떠나 온 밭과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습니다.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바람이 나버렸는지 그게 궁금해서 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유명한 랍비들도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다고 생가하며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그런 마음을 먹고 그 자리를 떠난 사람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 그런데 유독 이 사마리아 사람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모습 이대로가 중요한 겁니다. 나병환자의 옷, 그 더러워진 옷,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한사람은 자기가 나았다는 사실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은혜를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습니다. 무슨 의무감이 아닌 자발적으로 자원 적으로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감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고 있단 말입니다. 감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형편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여길 때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그 모습 그대로 자발적이고 자원 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무적인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명심보감>을 보면"몸에 한 가닥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 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 밥을 먹거든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 받은 은혜를 배반하고 사는 사람,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도 때로는 크나 큰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고 감사할 때 그 삶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는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감사는 생의 동기입니다. 절대로 행복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에는 행복도 없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또 다른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알면 감사를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이것의 연속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를 알 때 하나님의 준비 된 은혜는 무궁무진합니다. 이 믿음을 가져서 오늘 본문 말씀에"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이 축복의 선언이 여러분의 삶에 늘 따라다니는 은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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