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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한 사람의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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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감사 (눅 17:11-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풍년이라는 말이 반갑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풍년이 들면 남아도는 곡식을 처리할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참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에 자꾸만 감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줄어들수록 우리의 삶은 자꾸만 황폐해져 갑니다. 마음에 감사와 은혜와 감격이 적어질수록 인간의 삶은 더욱 강퍅해지고 무감각해지고 은혜를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것도 감사와 감격을 되찾게 해 주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주소는 두 곳입니다. 하나는 하늘나라이고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에도 계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삭막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 광야와 사막과 같습니다. 오늘은 불평의 시대입니다. 불만족의 시대입니다. 감사가 없는 시대입니다. 옛날 같으면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했을 내용들이 오늘은 너무나 당연시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격이나 감사가 없어진 시대입니다. 딤후 3장1절을 보면 “말세에는 고통 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말세의 징조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말세입니다. 오늘은 감사도 은혜도 감격도 잊어버린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풍년이 들어도 걱정이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30년 전만해도 기초생활인 먹는 문제마저 고민해야 했고 배를 채우는 일을 목적삼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나라는 너무나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너무 넘쳐서 고민입니다. 그런데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에서도 저 북쪽은 해마다 흉년입니다. 그래서 저 북쪽은 해마다 얻어먹는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생각도 없습니다. 감사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만용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은 나병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께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무서운 나병을 고쳤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다. 당시 나병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평생 가족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동구 밖에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격리의 삶이 얼마나 뼈아픈 삶입니까. 그런데 그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고침 받음으로 끝이 아니고 가족공동체로 복귀됨을 의미합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사회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 고침 받은 10명중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돌아와 예수께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치료받은 9명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핵심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한 사람의 감사

나병환자 10명이 똑같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고침 받은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다 나앗는가 진단받아 진짜로 나았다는 것을 알고 모두 집으로 달려가고 그중 한 사람만 찾아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께 감사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감사하는 생활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감사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나병환자가 다시 돌아와 감사한 것은 입으로가 아니고 마음으로 감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은 입으로 감사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인색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하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생활은 이렇게 어렵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말을 통해서도 해야 하지만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호수에 배 한척이 침몰하였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노스웨스트 대학교 학생이 뛰어들어 23명을 구출하였습니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른 후 유명한 토레이 목사가 부흥회 때에 어느 대학생이 물에 빠진 사람 중에서 23명을 구출했다고 실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 속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그때 그 청년이 바로 나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강단으로 불러내 세우고 “그 때를 생각하면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23명중 그 후 한 사람도 내게 찾아와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인상 깊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생각을 바꿔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풍요시대입니다. 그런데도 감사가 없습니다. 모두 큰 것만 바라보고 높은 것만 바라보고 많은 것만 추구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물도 값싼 것을 받으면 마음이 시큰둥해 집니다. 문제는 거기 어디서도 감사의 정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신문사에서 현대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현대인 중에는 아무도 행복한 사람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5만여 건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전화내용으로 뽑은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루해를 잘 끝낸 행복, 예쁜 꽃을 보는 행복, 아침에 새 소리를 듣는 행복,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행복“ 등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양이나 부피나 값으로 따지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는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솟아나옵니다. 어느 처녀가 집에 오다가 강도를 만나 반지를 빼앗겼습니다. 이 처녀가 집에 와서 재수 없게 강도를 만나서 반지를 빼앗겼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불평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손가락 안 다친 것을 감사해라, 손가락은 그냥 있지 않느냐, 반지야 또 사면되지만 만약 손가락이 잘렸더라면 어쩔 뻔 했냐“하고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당한 생각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그 사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자살”, 그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어둡고 침울하고 소름이 끼치지만 생각을 바꾸면 ”살자“가 됩니다. 시인 김지하는 “죽으려면 차라리 그 죽을힘으로 살지“라고 시를 썼습니다.

요즘 일본의 와타나베 준이치라는 분이 쓴 둔감력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오늘 이 시대와 전혀 반대적인 이론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약삭빠르고 머리회전이 잘 되어야 성공한다는 내용과 정반대의 이론을 쓰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둔감한 마음, 둔감한 오감의 장기와 체질을 가진 사람이 병에 덜 걸리고 연애도 성공하고 직장서도 잘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시력이 1.0에서 1.2면 정상입니다. 그런데 시력이 1.5거나 2.0이면 더 잘 보여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더 피곤하고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부분 더 많은 것을 좋아하고 더 완벽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과일도 너무 잘 익으면 덜 익은 것만 못합니다. 수박도 너무 잘 익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콩도 밭에서 너무 잘 익으면 땅바닥에 그냥 쏟아 놓습니다. 행복도 덜 익어야 찾아옵니다. 반드시 빠른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 느린 것도 좋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지루하게 기다립니다. 술 맡은 관원이 나가더니 무소식입니다. 요셉은 지쳤습니다. 누구를 미워할 힘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도 모른 척 하십니다. 이제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니 바로가 꿈을 꾸고 요셉이 불려나가 마침내 총리가 됩니다.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왕에게 요셉을 소개하였더라면 아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절망에 처하게 될 때 요셉을 소개하니 절묘하게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개입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살전 5장18절에서 “너희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9명의 유대인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충격적인 것은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무시하고 경멸하는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냥 돌아간 아홉 명의 사람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무식해서 그렇다고 쳐도 고상한 유대인들은 생활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조차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 책을 통해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받는 기본 교육내용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제사 드리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 제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드려지는 제사가 감사제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유대인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읽는 성경도 시편 136편입니다. 136편은 감사하라는 말로 시작하여 감사하라는 말로 끝나는 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감사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이골 나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병환자들은 병을 고침 받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8절에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은 실망이 섞이고 노기가 서린 그런 음성입니다. “어찌하여 내 백성 유대인은 다 어디가고 안와도 되는 사마리아 사람만 혼자 왔느냐” 그 말입니다. 말로는 선택받은 민족이고 우월감에 빠져 살지만 기본적인 도리를 행하는 일에도 무지함을 보인 유대인들을 아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아홉 명의 유대인들도 이해는 갑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고 해방된 것이 너무 기뻐서 인사할 겨를도 없이 빨리 가족들에게 가서 고침 받은 것을 알리고 가족 품에 안기고 싶은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정은 어린아이들 차원의 심정입니다. 심정은 이해하나 근본적으로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평생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감사제를 드려오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하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노기띤 음성으로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따지십니다.

여기 이 말씀은 그 시대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감사도 모르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누구보다도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고 주께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로 말하자면 우리 중직자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이 높아지면 이렇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 자들은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인데도 감사하고 감격도 하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래 믿은 분들은 때로 감사도 없고 감격도 없고 눈물도 없을 수 있습니다. 새 신자들은 예배도 떨리는 마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감격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 생활한 중직자들은 너무 오래 예배생활을 해서 그런 감격과 감사와 떨림이 약화될 충분한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감사할 줄도 모르는 유대인을 지적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동안 지극히 형식적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는 먼저 믿은 우리 중직자들을 향하신 책망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내용입니다.

감사도 배워야

감사도 배워야 합니다. 인사하는 것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인사하는 것도 모릅니다. 모르면 남이 하는 것을 보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으로부터 완전하다는 판정을 받자마자 예수께로 달려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9명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족에게로 달려가고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가족으로부터 동네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따돌림을 받고 무시당하고 격리 생활했기 때문에 빨리 가서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사마리아 사람이 달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들도 달려가서 마땅히 감사를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모르면 옆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하찮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돌아가도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께 찾아가서 고침 받은 사실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사마리아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께 찾아오더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감사제를 지내고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율법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법을 배운 유대인들은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열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이방인은 저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데 내 백성, 내 형제들인 저 유대인들, 저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고 짐승 대하듯 하던 내 골육 내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을 보시고 진노 섞인 음성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 백성 유대인은 다 어디가고 안와도 되는 사마리아 사람만 혼자 왔느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하는 삶은 모든 삶의 기본이고 기초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1985년 뉴욕 마라톤 때 린다 다운이라는 여성이 참가하여 마라톤에서 완주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신체 장애인이었습니다. 양쪽 겨드랑에 크러치를 받치고 26,2마일 전 코스를 12시간에 완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몸이기에 몸을 앞뒤로 흔들어가며 뛰는데 모든 인파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12시간 만에 완주해서 홈으로 들어설 때 모든 인파가 기립박수를 보내며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환호의 박수를 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서 격려를 할 때 그 린다 다운이라는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강한 의지와 노력할 수 있는 인내와 크러치를 바칠 수 있는 두 겨드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감사 쪽으로 방향이 잡히면 그때부터 사람은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감사도 배워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감사하는 마음에, 감사하는 생활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복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고침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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