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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 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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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편 105:1-4)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에 임금님이 한 여인을 대단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왕비로 맞이한 임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 터이니 가장 가지고 싶은 것 한 가지를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 왕비는 사랑스런 눈으로 임금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나의 소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오직 당신 한 분입니다.  나는 당신 한 사람을 사랑하며 평생 함께 있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값진 보석을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희귀한 노리개나 그 무엇을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것보다 이 나라 임금의 사랑을 소유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음을 알았던 지혜로운 왕비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하는 자세로 살고 있는지요.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하는 찬송이 있지요?  이 가사처럼 세상에 귀하고 좋은 것 많지만 그 어느 것보다 주님 한 분을 소유한 것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며 삽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에는 하나님 한 분 그 자체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을 기대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신앙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쪽은 하나님이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지만 다른 한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물이 목표와 목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자원으로 삼아 그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 가운데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굴을 구하는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 신앙이라면(시24:6, 27:8, 62:1 하나님만 바라라), 손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성공이나 평안과 행복과 풍요를 바라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내 성공과 번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나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언제라도 그 수단과 도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신앙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신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의 목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성공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 여기고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립니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손을 구하는 것 어느 쪽입니까?

민수기 6장24절에서 2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저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첫 번째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장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에게 찾아와 그 얼굴을 비취시며 복 주시고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서로 얼굴을 대하는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이런 친근한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던 거짓 신앙의 모습들을 너무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기보다는 그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고, 어떤 때는 아예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아신 하나님은 만일 그들이 나를 떠나 다른 신을 좇아 모든 악을 행하면 내가 그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명기 31:18) 경고하셨습니다.  ‘얼굴을 가리운다’ 또는 ‘숨기신다’는 말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어진 관계 단절은 곧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평강이 떠나감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에게 ‘내게로 돌아와 나의 얼굴을 구하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역대하7:14)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은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 그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나의 의로움을 신뢰하고 나의 육체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무슨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였더니 나에게 구원이 왔고 은혜와 복이 왔다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수도 없이 슬프게 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가버린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패했던 중요한 또 하나의 원인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말씀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변질되어 하나님을 실망하게 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적부터 내려온 하나님 신앙을 대대손손 잘 보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신들을 섬길 때에도 잊지 않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의식에 열심을 내었던 사람입니다.  성전에서는 날마다 제사 짐승을 태우는 연기가 올라갔고 온 성전에 향 내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인간적인 종교행위에 신물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의식에만 열심을 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는 드리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가리켜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하셨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엘리 제사장이 대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을 지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엘리는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고 눈도 흐렸을 뿐 아니라 영안마저 흐렸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불량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제사용 고기를 자기 마음대로 가져다 먹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장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런 일로 인해 사람들이 아버지 엘리 제사장에게 보고하여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끝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던 불량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사장들이 과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어떻게 집행했을까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웠을 때 마침 블레셋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사무엘상 4장).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라 믿고 자신 있게 나갔지만 사천 명의 군사를 잃고 패전하였습니다.  전쟁에서 크게 패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쟁에서 지게 하셨는가?  그 원인을 살피다가 생각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하고는 성막에 보관하고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습니다.  이 언약궤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시리라 믿었는데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언약궤 곁에 있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주셨던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두 돌비,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담아놓은 나무 상자였습니다.  언약궤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 증거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성막에 보관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 서 강물에 발을 들이자 요단 물이 멈추었고,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 서 행진을 하여 승리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엘리와 홉니아스를 비롯하여 언약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은 성경의 역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언약궤를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 중심으로부터 예배하며 순종하는 자세는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궤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자기 중심의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그 얼굴을 숨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복과 은혜와 평강이 떠나갔습니다.

또 한 가지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한 후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까?  그 성전에 머무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이방 신상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방 신을 제사하는 장소로 더럽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 성전에서 떠나가셨고 그들은 껍데기 신앙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형식적인 예배 의식과 동물의 피 냄새와 오물 냄새 그리고 향불을 태우는 냄새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의식을 행한다는 것으로 안심하였고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앙은 하나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명령한대로 제사행위를 계속 행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보상이 신앙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7:1-11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후에도 변질된 모습으로 계속되었으니 그 슬픈 역사는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성전을 지키며 성전에서 제사를 집행하던 제사장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 선 일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였지만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자신들의 의로움과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겸손함이 사라졌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권력자로 행사하며 백성들을 억압하였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성공적인 삶의 수단과 도구로만 여겼던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얼굴을 가리우셨고 그의 아들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드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자기의 의로움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으로 구원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의지한다는 고백입니다.  내 의와 선함을 의지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자녀로 거듭남이 하나님 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위험한 신앙의 모습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행하는 어떤 종교의식과 종교적인 삶이 나를 구원하고 나의 구원을 보장하고 나에게 행복과 안위를 가져다 준다고 믿으며 삽니다.  이스라엘에 언약궤 신앙, 성전 신앙이 있었던 것처럼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교회 신앙으로 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와 봉사 등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나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얻을 수 없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 씻음의 예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얻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례교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세례 이전과 다름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세례라는 의식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뿐 아니라 율법이 명하는 할례도 받아야 완전한 구원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할례 받은 육체를 자랑했던 것처럼 세례를 무슨 구원의 증서처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세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주일성수는 어떻습니까?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 안에서 교제하며 피차 섬기고 나누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좋은 신앙전통은 우리가 계속하여 지켜나가야 할 성도의 기본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일날 교회 안에서 예배 드리며 섬기는 일을 전부로 알고 교회 밖을 나가서는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이런 이중적 신앙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주일성수라는 제도와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며 기도를 드렸으니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열심히 봉사를 했으니 나는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라 여기거나 내가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나에 대하여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행위가 곧 교회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전통과 의식을 행위로 전락시켜 그것으로 내가 구원을 얻고 평안을 얻는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베푸신 능력과 은혜를 열거하며 감사로 찬양드리는 내용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즐겁다고 노래합니다.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선한 행위를 자랑함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 그의 이름입니다.  이런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다는 고백 속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으며 그 이름을 찬송하는 성도들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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