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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소서 (딤후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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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소서 (딤후 1:15~18)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말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로소 충신열사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 감옥에 제 2차 투옥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복음 전파의 격전지에서 자신의 가슴 깊숙히 담을 수밖에 없었던 참과 거짓, 선과 악, 백과 흑의 실체의 한 토막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실물 중에 하나가 바로 '오네시보로'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익을 취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늙은 성도였습니다. 이 말은 에베소 교회의 초창기 멤버라는 의미입니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상대성의 원리를 필수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린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특별히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지적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내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미루어 보아 바울을 따르다가 중도에 배반한 자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을 배반하도록 유도하는데 주도적인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옛말에 "세 사람이 짜고 거짓말을 하면 호랑이도 만든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의 술수를 가진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제 2차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자신의 순교 사실을 감지한 듯 옥중 서신에서 나타난 석방의 기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이 마지막 서신으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믿음의 아들이요 복음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함으로 전도자의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공개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 오네시보로를 디모데에게 소개하면서 그를 축복함에 주저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면 살벌한 복음 전파의 격전지에서 바울의 뇌리에 별처럼 반짝이며 생각나는 사람,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빌 수밖에 없었던 오네시보로는 어떤 사람인가? 왜 바울은 본문에 두 번이나 연속해서 그를 축복하고 있는가?

Ⅰ. 그는 전도자를 자주 유쾌케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 16절에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유쾌』(아네포쉿센, )라는 말 은 '상쾌하게 했다' 혹은 '시원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refreshed(원기를 돋우다, 새롭다)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지도자가 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오네시보로는 막힌 곳을 뚫어지게 하는 시원함을 공급한 자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곤고한 전도자를 어떻게 도왔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믿음의 기도와 사랑의 물질 공급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오네시보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면회를 시도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역시 전도자 바울을 유쾌하게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시아 본도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로마에 가서 장막 만드는 업을 하는 중에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축출할 때 고린도에 머물다가 바울이 전도할 때 이 부부는 바울을 도와 동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 내놓기로 한 까닭에 참형까지 당할 뻔 했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버스를 타고 바울이 천막 만드는 업을 했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 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자라온 환경이나 삶의 양식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복음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형제들로서 주의 종 전도자 바울의 사역을 중심하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한결같이 이들은 바울에게 용기를 주었고 답답함에서 그를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부겔로와 허모게네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와 비교한 것을 보면 바울에게 행한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버린 자 중에 하나라고만 언급합니다.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오로지 복음 전파라는 이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것과 로마의 감옥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나를 버렸다는 말에 대해 확증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재판을 받을 때에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변호해주지 아니했던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체포되었을 때 아시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돕지 아니한 일입니다.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전시에는 아군 아니면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보고 같이 피 흘려 싸울 수 없으면 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말입니다.
예레미야 48장 10절에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30절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동일하게 누가복음 11장 23절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Ⅱ. 그는 전도자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 16절에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사슬은 죄인을 취급할 때 사용하는 형구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수치로 여기거나 부끄러워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오네시보로는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법률의 도시 로마로 중범이라 할 수 있는 사상범에게 찾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기독 신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전파의 격전지에서 핍박을 당하고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의 재림 시에 그리스도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주를 위한 고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머리털 하나 타지 않고 나왔습니다(단 3:13-27).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 속에 먹이로 던져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단 6:16-23).
스데반같이 십자가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믿음의 집사도 있습니다(행 7:54-60).

초대교회 300년의 박해 속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수많은 주의 종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고난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박해 속에 참된 주의 종들은 고난과 환난이 두려워서 십자가를 포기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 다 자기 몫에 태인 보은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장차 영광으로 아는 제대로 된 기독 신자들의 태도가 분명합니다. 이러한 오네시보로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장차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신앙 철학이 정립된 자의 행동입니다.

Ⅲ. 그의 희생적인 섬김이 숨길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 17-18절에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설득력이 필요 없이 모두가 가납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바울이 갇힌 감옥에 자주 찾아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과는 단조로운 만남과 단조로운 대화가 고작인데 자주 찾아갔다는 것은 대단한 충성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로마로 오기 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부터 주님의 복음 사역에 봉사하던 자였습니다. 평상시에 전도자를 위해 봉사하던 그는 환난 날에도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일일이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디모데는 오네시보로의 섬김에 대해서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 얼마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안다고 하는 바울의 말은 떳떳하고도 확실한 칭찬입니다. 그에게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너희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 이상 더 확실한 평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희생과 섬김은 숨겨 가면서 은밀히 하려고 해도 노출될 수밖에 없는 봉사였습니다. 많은 것은 은밀히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는 이 한마디는 사도 바울이 서운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소아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에베소를 수도로 하고 있는 로마의 한 행정 구역입니다.
바울은 3차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렀기 때문에(행 20:31) 아시아에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은 진리의 종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도 충성스럽게 봉사하더니 끝까지 주의 종을 따랐습니다. 그는 불신앙의 다수를 따른 자가 아니라 신앙의 소수 편에 선 자입니다. 비 진리와 인본주의 앞에 노예가 된 자가 아니라 한사코 진리와 신본주의의 삶을 고집했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영감 받은 전도자 바울이 복음 때문에 온갖 굴욕과 치욕적인 불명예를 한 몸에 뒤집어 쓸 때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등을 돌렸습니다. 오히려 이때 편승해서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배신자들의 주역으로 나타나서 전도자 바울의 가슴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재판을 받을 때 무죄한 예수님을 손으로 치는 비겁한 안나스의 종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가장 비참한 지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달라고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강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편 강도에게 그 시로 낙원을 허락했습니다(눅 23:42-43).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의 태풍이 몰아칠 때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종들을 고발하고 잡아서 일본 군국주의자들 앞에 세우고 온갖 고난을 당하게 해 놓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땅에서 부요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키며 복음의 순결을 위해 순교한 자들과 온갖 고난을 감수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환난 날은 배신자, 반역자, 도망자, 핍박자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환난 날은 이 환난에 편승하여 세상 쾌락과 영합한 온갖 광란자들이 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환난은 오네시보로 같은 소수의 진리의 동지를 얻게 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을 배신했으나 영적으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오네시보로는 진리의 투사 바울에게 유쾌 그 자체였습니다.
진리운동에 나태하고 게으른 자와 충성된 자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잠언 10장 26절에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진리와 비 진리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습니다.
예수님 화육강세 이후로 지금까지 환난을 담보 삼아서 십자가를 외면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네시보로 같은 고난의 십자가의 동맹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지상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힘을 당하는 괴로움과 답답함이 있어도 주의 종들은 외롭지 만은 아니합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속한 모든 인적인 것과 물적인 것과 계대적 복을 받음이 마땅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①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고전 4:16).
②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살전 1:6).
③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빌 3:17).
④ 너희에게 본을 준다고 했습니다(살후 3:9).
⑤ 너희에게 본을 끼친다고 했습니다(벧전 2:12)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2:2). 우리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궤도입니다. 인간의 논리나 사상체계는 끝까지 정의롭지 못합니다.
옛말에 "당인불양어사(當仁不讓於師)"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짊(仁)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자신의 영적 관리를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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