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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높은 뜻을 이루어 가는 길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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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뜻을 이루어 가는 길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눅 4:16-21)

I. 서론 : ‘높은 뜻’과 희년운동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이 땅에 세우고자 하는, 참으로 ‘높은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높은 뜻인 이유는 단지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높은뜻을 희년운동으로 실현하고자 헌신을 작정하고, 그 일로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전과 함께 그 비전을 실현할 사명을 발견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적 비전입니다. 그러나 비전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 비전을 오늘 여기서 나의 소명으로 내면화시키고 있는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토인비는 그 예로 1세기 초기기독교인을 들면서, 그들을 이른바 ‘열정적 소수’라고 불렀습니다. 보 중요한 것은 그들은 기독교적 비전을 추진할 구체적인 ‘사명’과 ‘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II. 본론 : 높은 뜻을 이루어 나가는 길

1. 예수님의 사명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막 1:15)는 것이었습니다. 비전(vision)은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므로 인간과 역사가 회복 될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역사 속에서 이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인 ‘미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설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세상에 실현하시기 위한 사명과 길을 선포하시는 설교였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에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취임선서를 할 때, 그냥 형식적으로 인사말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국정전반의 과제와 그 과제를 해결할 정책방향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취임선서야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사 61:1-2 낭독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의 생애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행하게 될 사역의 의미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대통령 취임선서와 설교가 다른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설교자가 가장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할 성경본문을 잡는 것입니다. 본문이 잡히면, 설교는 절반이상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본문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메시아직을 시작하시는 이 첫 설교에서 당신의 의지를 천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천명하므로, 그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읽으신 이 성경 이사야 61:1-2은, 패망했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절정에 나오는 본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장차 온 세상 민족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나라가 될 것이라는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비전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임하고 있다”고 더 포괄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즉, 대회복의 때에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죄인이 되어버린 가난한 자들이 함께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하여 “이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선언하시며,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들은 원래 이사야 61장의 본문에서 사회경제적이고 계층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인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 앞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로 시작되는 전체의 내용은 바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보는 비전이지, 어떤 특정한 계층에게만 수여된 비전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Ahni)”라고 씌어있는 히브리어의 단어는 단지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의미하는 이를테면, ‘낮은 자’ 혹은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 본문을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은총으로 해석했지, 결코 사회 경제적 약자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2.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길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비전을 사회경제적 약자인 가난한 자의 회복으로 구체화하셨을까요?

그것은 첫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비전을 단지 민족의 회복으로 생각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이방인을 포함하는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다시 말하자면 ‘민족의 회복’이 아닌, ‘인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집에서 이탈된 ‘죄인과 세리들’을 당신의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사역은 결과적으로는 민족적 성격보다는 사회계층적 성격에 훨씬 더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가난한 자들을 ‘우선시’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들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이스라엘에서 구체화 될 때는, 언제나 가난한 자, 박탈당한 자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법은 약자를 위한 법이라는 전제를 가진 것이었고, 예언자들은 빈부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빈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저버렸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탄식은 수렁에 빠진 가난한 자와 약자들의 기도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세기를 풍미했던 교의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위협당하는 무죄한 자, 억압당하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의 편을, 아니 그들의 편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신다. 그리고 교만한 자를 반대하시며 낮은 자의 편에 서시고, 이미 권리와 특권을 향유하는 자를 반대하시며 그것을 빼앗긴 자를 선호하신다.”(교의학 2, The Doctrine of God)

이렇게 기독교의 하나님은 가난한자, 약자, 박해받는 자를 편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하나님을 저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게 된 아들에 대한 애절한 사랑으로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돌아오고 있는 아들을 먼저 보고 측은히 여겨 그를 포옹하고 있는 것이데요,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어서 “아버지 제가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미리 문자를 보낸 것도 아니고, 컴퓨터가 있어 메일을 보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을까요? 아버지는 늘 동구 밖에서 잃은 아들을 한없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언제가 텔레비전 PD수첩인가요? 그런 사회비리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에서 청소년 자녀들이 납치당하거나 가출한 부모들을 심층취재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밤에 잠을 자면서 문을 다 잠그지 못하고 조금씩 열고 자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집나간 자식이 어렵게 마음을 돌이켜 돌아왔는데, 문이 잠겨있으면 다시 죄책감이 들어 그냥 돌아갈까 봐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난하여 사회로부터 죄인이 된 팔레스타인 사회의 ‘잃은 자들’ ‘작은 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온통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마음을 불사르시는 그런 아버지로 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편애하신다면, 부유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편애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둘 중에 하나를 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둘 다 사랑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화 ‘말아톤’을 보셨지요? 장애가 있는 자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러나 배형진, 그러니까 윤초원의 어머니는 그 동생이 빗나갈 정도로 초원이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어머니는 다른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장애를 가진 초원이를 ‘더 사랑’하는 것일 뿐이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사랑에서 부유한 자를 제외하는 것도 아니지만, 가난한 자를 더 사랑하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수여하셨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어떤 차별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부요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께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 나라 수혜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으셨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3. 예수의 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방식을 선택하셨을까요? 저는 그것이 매우 현실적이고 또한 ‘전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실적이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회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는 영원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현실이기 가난한 자를 문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또 왜 전략적이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샘내고 시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샘내는 방식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식라고 생각합니다.

샘낸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시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을 보면, 시샘하는 맏아들이 나옵니다. “나는 죽도록 아버지를 위해 일만했는데, 이게 뭐냐? 실천 놀다가 망해먹고 온 자식에게 이렇게 소를 잡어 주고, 언제 내게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었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샘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방식입니다. 가난한 자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하고, 부유한 자는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것이 각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초대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초대방식은 누구에게 더 복된 소식이 되겠습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누구에게 더 걸림돌이 되기 쉽겠습니까? 부유한 자에게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이스라엘은 가난해진 죄인들을 향한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시샘하다가 넘어져 버렸습니다. 또 그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아들여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저 부요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 나라의 초대는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모두에게 다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부유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을 향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그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샘하는 마음대신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진정으로 나누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가난”입니다(마 5:3).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가난해 지는 길은 경제적으로 부요한 자가 그 부를 포기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길입니다. 여기에 우리 눈이 확 뜨이실 텐데요,^^ 그 길은 가난한 자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오직 우리의 사랑과 소유를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계신 낮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향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그 축복을 물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부요한 자는 낮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두레박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살길이 없는데, 그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저 부요한 세계, 오늘날 뉴욕과 같은 부요한 도시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고전 3:21-23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III. 맺는 말

1. 사랑으로 이룬 정의의 길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어떻게 온전히 치우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가는 참으로 쉽지 않은, 그래서 우리 평생 체험하고 더 깨달아야 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정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높은 뜻이라는 것 역시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 사랑과 정의를 정확히 하나님의 통치방식으로 구현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길을 순종으로 실현해야 할 공동체 말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의 교회는 이 순종의 길에서 다시금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위기를 지금 우리사회와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삼성뇌물’ 사건, 그리고 ‘북한의 가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 ‘항시적 가난’

저는 가난이란 한편으로는 ‘항시적 가난’으로 늘 우리 곁에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계시적 가난’으로 지금 우리 곁에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서 가난은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항시적 가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신명기서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땅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항상 손을 펼쳐야 합니다.’(막 14:7=신 15:11)

이 가난은 분명 구조화된 가난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역사상 가난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조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가난은 정확히 테크노크라트를 중심으로 한 상층 지식관료층들이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부의 편중’말고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전문가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정보의 유통과, 그것을 생산하는 검은돈의 흐름이야 말로, 그 세계에서 소외된 자들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사슬인 셈입니다.

이른바 ‘비자금’이라는 삼성의 뇌물은 정확히 그런 우리 사회의 그런 사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의 ‘뇌관’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돈의 권력’은 무서운 변장을 한 악마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교묘한 술책으로 다가옵니다. 친구 변호사에게 들으니, 서민들에게는 2달 생활비인 500만원의 돈은 정말 그 세계에서는 정말 ‘애매한’ 돈이라고 합니다. 뇌물이라고 보기에는 작고, 선물이라고 보기에는 큰, 그런 액수 말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20년 전 바로 이 명동성당에서 한 시대의 ‘뇌관’을 터트려 온 국민을 민주화로 이끌었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제단이 지금 또 다른 형태의 뇌관을 터트려 한 시대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의 뇌관은 ‘군사 권력’의 핵이었고, 오늘의 뇌관은 ‘돈의 권력’의 핵인 것입니다.

사제단은 정확히 이 시대의 구조화된 악의 본질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개신교 신학자로서 가톨릭의 신학에 비교하여 ‘개신교 신학과 신앙이 열등하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목사로서,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저는 오늘 참으로 깊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을 본질을 보기는커녕, 정의를 체감하는 신경이 마비되어 악이 살을 깨물어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저의 고백이기에 저는 이것을 고통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축복의 신학, 성공의 신앙이 가져다 준 쓰디쓴 열매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겠습니까?

구지 통계로 이 자화상을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난 20년간 가톨릭은 176%를 성장했고 개신교는 32%가 증가했으나, 최근 10년은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증가율이 아닌, 수의 감소로 돌아서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저는 20년 전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해 왔던 사제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가톨릭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제들은 지금, 부유한 경제대국의 꿈에 도취되어 가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다시 10년 앞 우리사회를 비취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를 이루는 길이 이 땅에서 높은뜻을 이루는 예수의 길이요, 교회의 먼 길임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3. 계시적 가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 가난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한 개인이나 민족에게 ‘일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재난으로, 때로는 심판으로, 때로는 연단으로. 어떤 이유로든 가난은 우리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개인이나, 국가에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저는 계시적 가난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북한의 가난은 참으로 ‘계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그들은 수백만이 굶주릴 만큼의 이 ‘처참한 가난’에 직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등학생 어린이들이 학교와 집을 버리고, 산과 들을 헤매며 먹을 것을 찾아야 하고, 더 이상 그 땅에 머무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하는 이 상황은 거의 재난에 가까운 ‘계시적 가난’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북한의 동포들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이고, 권력에 의해 포로가 되어 눌린 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부스러기 먹을 것을 찾아 시장의 땅바닥을 찾아 헤매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시며 그 땅을 신원(伸寃)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시는 것은 바로 왕 밑에서 신음하는 히브리 민족을 끌어내어 구원하신 야웨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등장으로 일어난 저 계시적 가난에서 저들을 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한반도에서 일으키신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작업’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우리가 딱 걸려든 셈입니다. 그것은 북한의 가난한 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한반도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통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샘을 내다가 도리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길을 배워 순종의 자녀가 된다면, 진정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고 우리를 인정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4. 맺음말

문제는 우리가 그 예수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가인 것입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만드시는 영적이고도 물질적인 ‘소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행 2:1-12; 42-47).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바로 막힌 담을 헐고 소통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고려시대에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 미국이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 역사에 드리워지고 있는 이 항시적 가난과, 계시적 가난으로 인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소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두 가지 길을 희년운동을 통해서 이미 찾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두 성심으로 그 길을 가는 것만 남았습니다. 헌신을 작정하였으니, 이제 함께 우리의 전문분야에서 그 길로 통하는 샛길을 열고, 거기서 성도들을 만나고, 거기서 이웃을 만나 함께 이 길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희년운동위원회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성도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기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가 겪고 있는 이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언제나 복된 소식의 일차적인 수혜자가 되어야 했던 ‘가난한 자들’을 향한 예수의 ‘미션’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제 새로운 길로 만들어 내야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개신교인들은 지금 통일선교사역에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헌신하고 있고, 앞서서 주님을 순종하며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마저 놓치면 우리의 개신교의 앞날은 매우 어두울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그 현실적이고도 전략적인 길을 우리 역사 속에서도 실현함으로써, 이 땅에 살아할 이유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하고 축복된 생애를 살 사람이요, 참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오시는 성탄을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박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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