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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변증 (행 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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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증 (행 24:01~27)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나 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또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마치 안달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야 합니까? 오히려 먼저 땅을 산 사람을 축하해 주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땅을 살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앞서 나가는 사람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나도 발전하고 사회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앞서 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단순히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그런 마음이 아닌 나도 저런 믿음으로 살아가리라 하며 그 사람을 통해서 배우고자 할 때 나도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웃이 서로 사랑하며 정겹게 살아가게 되면 오히려 먼 친척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함께 하는 세상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고 내가 하는 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 몇 사람과 더둘로라고 하는 법률가를 데리고 가이사랴에 옵니다. 그들이 온 것은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안으로 불려 들어가자, 더둘로가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더둘로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저가 뭐라고 말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벨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 덕분에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 왔으며 각하의 지혜로운 일 처리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일들이 많이 고쳐졌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 모든 일이 각하의 공로 때문인 것을 인정하며 각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례적인 인사말이라고 해도 이는 너무 지나칩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을 하고 넘어가더라도 그 다음 바울을 고소하는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는 바울이 온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한데 바울이 온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일으켰지 바울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아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면 그게 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온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했다니 과장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만큼 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도 되니 그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 다음 말이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 못 마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나사렛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될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가 이단인지 진지하고 토론을 해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바울이 입만 열려고 하면 그들은 그 소리를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소리를 질러댔지 않습니까?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작정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심지어는 바울이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하여 자기들이 붙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전을 더럽히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요?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둘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주장만 하면서 거짓말로 고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간 사람들도 합세해서 더둘로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마치 오늘날 반기독교 시민연합운동이라고 하는 단체가 기독교를 이 땅에서 다 몰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떠들어 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기독교가 독선적이라고 하며 종교 지도자들이 너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독선적이니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말은 왜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경우입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린 것이 그 하나요, 반대로 내가 틀리고 너는 옳은 것이 두 번째 경우라면 나도 옳고 너도 옳을 수도 있고 나도 너도 모두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몇 사람만 있어도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을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모두가 다 맞는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말하는 것이 틀릴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바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 말대로 하면 기독교는 독선적인 것이 맞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양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했는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말을 할 때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는 있겠죠. 그런데 좀 과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전체가 그렇다고 말을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회봉사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지 그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들은 애써 못 본 척합니다. 그리고 한두 가지 그들 눈에 어긋나게 보이는 것만 가지고 물고 늘어집니다. 아니 없는 것까지 지어내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동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없었던 것조차도 진짜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게 됩니다. 아니 말이 퍼져나가면서 덧붙여져서 전혀 아닌 것이 사실로 되어져 버리고 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죽여 놓고 나서 아니면 말고 하던가 또는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게 아니었더라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고 더군다나 없는 사실을 지어내면서까지 비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사회법에 고소까지 하면서 자기주장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이 비단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와 네가 똑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곧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면서 서로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무거운 짐이라고 해도 둘이 셋이 함께 힘을 합치면 옮길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여러 악기가 모여서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붙잡아 주고 세워나가는 귀한 믿음의 협력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발에 대해 바울은 뭐라고 말을 합니까?

바울은 저들이 지금 자기를 고소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증거물은 하나도 내놓지를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올라간 것은 십이 일밖에 되지 않았으며 성전 안에서 누구와 논쟁한 적도 회당에서나 도시 안에서 사람들을 선동한 적도 없다 그리고 나는 유대인들이 소위 이단이라고 할하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책에 적힌 것도 다 믿는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든 불의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다시 부활하리라는 소망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안에서 나의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려고 힘쓰고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다가 우리 민족에게 구제금을 전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려고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왔다. 그들이 나를 본 것은 내가 성전 뜰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을 때요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주위에 군중들이 모여 있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고소할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직접 각하 앞에 와서 나를 고소했을 것이다. 오직 내가 한 말을 유대인의 공의회 앞에 섰을 때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재판 받는 것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것 때문이다’라고 외친 것뿐이다.
이렇게 바울은 차분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만 전달합니다. 바울은 결코 자기를 고소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고소할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운데 어떤 다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합니까? 우선은 상대방을 끝까지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변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실만 그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저 사람이 생트집을 잡고 있다고 흥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때 대화법이 이렇습니다. 첫째는 어 사실은 다음으로 생각 그리고 기분 마지막으로 바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너는 공부는 안하고 컴퓨터만 하고 있니 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고 합시다. 그러면 보통은 어떻게 합니까? 밤낮 엄마는 그저 공부 공부 공부하라는 말만 한다고 하면서 신경질을 내기 보다는 어 사실은 저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요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 생각이 나서 게임 조금만 하고 공부해야지 한 것이 좀 오래 했어요 하고 어 사실은 하고 먼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 생각을 다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제가 생각해도 너무 게임만 하고 있었네요 하지만 게임이 정말 재미있어서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어요 라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난 다음 자기 기분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런데 비록 제가 잘못했기는 하지만 엄마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저도 기분이 나빠져요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는 오히려 더 공부가 안 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바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엄마 저도 부탁이 있는데요 그럴 때는 야단만 치지 말고 사랑하는 아들 그렇게도 게임이 재미있니? 하지만 이제 적당히 마치고 공부도 좀 하면 어떨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시면 기분 좋게 게임을 마무리하고 공부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머니도 다음부터는 아들 기분 상하지 않게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들도 기분 좋게 공부를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바울은 아주 교과서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소한 사람도 그리고 심판자로 있는 총독도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있는 사실만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당시에 벨릭스는, 이미 예수의 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여러분들이 제기한 고소 문제를 처리하겠소’ 라고 말하고서 재판을 연기합니다.
당장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 같아도 큰 다툼이 없이 천부장이 온 다음에 다시 재판을 계속하기로 하고 일단 재판을 마무리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흑백을 가려야 할 경우에라도 이렇게 서로가 마음 상하지 않고 모두가 다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 지혜가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결코 흥분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와 은혜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심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자가 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불쌍한 벨릭스 총독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벨릭스 총독이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일단은 천부장이 온 다음에 그 문제를 처리하겠노라고 하며 재판을 연기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벨릭스 총독은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잘 지키되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친지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유대인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정의와 절제하는 일과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며 “지금은 그만하고 가시오. 시간이 나면 다시 그대를 부르겠소”라고 말하며 바울을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도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결국 2년 동안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그저 돈만 바랐지 진짜 중요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불쌍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는데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에도 벨릭스는 끝까지 믿음 안에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그 동안 성령께서 얼마나 그 마음을 두드렸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생명을 얻지 못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에는 그저 돈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이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돈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돈 없이는 살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많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도 아닙니다. 진짜 행복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오래 교회를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그저 복을 받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란 그저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이런 것들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무가 뿌리가 없고서야 어찌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내 삶에 주님으로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고서야 어찌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고 생명이 없는데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아니 열매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요 한번으로 그치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요한 삼서 2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이는 곧 영혼이 잘 될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은 내 삶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함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범사가 잘 되고 건강도 누리게 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한 내가 누리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더욱 풍성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받아 누리는 것을 나 혼자서만 갖고 있으려고 하다가 내가 가진 것마저도 잃게 되는 어리석은 자로 남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자그마치 2년 동안 계속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돈만 받기를 바랐지 더 소중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가 그 동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후임 총독이 부임할 때까지 바울을 그대로 감옥에 가두어 뒀겠습니까?

기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문이 언제든지 열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요 그 은혜를 받는 날은 바로 오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회를 따라 저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따라 말씀대로 나누며 섬기는 자가 되심으로 심은 그대로 거두되 100배 60배 30배로 가두어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여 주심에 대해 우리는 먼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영광은 다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아볼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심에 대해서도 감사하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직 주어진 말씀대로 그리고 내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동하심대로 섬기시고 나누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흩어 구제하고도 더욱 부하게 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바라며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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