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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솔 시내와 같은 교회 (삼상 3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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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솔 시내와 같은 교회 (삼상 30:21~25)

능력에 따라

요즈음 연봉제를 실시하는 기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연봉이라 함은 단순히 1년에 급여를 얼마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업무능력에 따라, 결과에 따라 차등을 두겠다는 뜻입니다. 프로야구선수나 프로축구선수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프로선수들은 누가 먼저 팀에 들어왔느냐, 몇 년이나 팀에 있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그저 잘 하는 선수는 연봉을 많이 받고, 못 하는 선수는 덜 받는 것입니다. 즉, 요즈음 기업도 이 프로선수들같이 같은 학력을 가지고 같은 시기에 입사한 동기라고 해도 능력에 따라 어떤 사람은 연봉을 천만 원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1억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봉제를 실시하면 효과가 아주 크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연봉을 많이 받으려고 앞 다투어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 안 해도 월급은 제 때 나온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만 연봉제를 도입해서 서로 경쟁을 시키면 죽을힘을 다해 일하게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로만가톨릭의 교황청도 내년부터 성과급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는 추기경부터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4천 명 이상이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직원이 일하다보니 전체 재정에서 급여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 열심히 안 해도 월급 나온다는 생각 때문에 게으른 직원들이 많이 생겨서 궁여지책으로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바티칸은 내년부터 "헌신성과 프로정신, 생산성, 품행" 등을 기준으로 평점이 높은 직원들에게는 성과급을 지급하기로 했답니다. 내년부터 교황청의 직원들은 아마 더 열심히 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가 연봉제나 성과급제를 도입한다면 어떨까? 물론 성도들은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관없지만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나 직원들을 대상으로 능력에 따라 연봉을 주겠다고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리라 보십니까? 담임목사나 부목사도 성도의 수가 불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면 사례를 많이 주고, 줄어들면 깎고요, 직원들도 일 하는 것 평가해서 월급을 높이거나 깎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제가 아는 서울의 한 교회는 부목사들에게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부목사라 해도 그해에 그 목사님이 맡은 교구에 숫자가 늘어나면 사례를 많이 주고 줄면 깎습니다. 아주 파격적인 시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연봉제로 해서 부목사님들이 열심히 일하게 되었을까요? 아니요. 시험 들었습니다. 부목사님들도 시험 들고 그 교구 성도님들도 시험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못 가 이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세상과 다른 성경의 원리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도 연봉제를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회자들 사례비를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은 이런 원리들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첫째가 '효율성'의 원리입니다. 즉 얼마나 적은 것을 투자해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건을 만들어도 가급적 적은 돈을 투자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면 성공한 것입니다. 둘째가 '다수결'의 원리, 즉 많은 사람이 손 든 쪽을 택하게 마련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찬성하면 나머지 소수는 싫더라도 따라야 합니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도 두 사람의 후보가 나와서 한 사람이 51%의 지지를 얻고, 또 한 사람이 49%의 지지를 얻으면 51%를 얻은 쪽이 대통령이 되고 나머지 49%는 그 사람이 싫어도 따라야 합니다. 아니, 단 한 표라도 차이가 나면 많은 쪽을 따라야 합니다. 얼핏 보면 이런 민주주의가 대단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많이만 얻으면 이긴다는 생각이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며 소수는 얼마든지 무시하거나 우습게 볼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지만 교회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효율성의 원리가 지배하기에 투자한 것을 반드시 뽑아내야 합니다. 아니, 투자한 것보다 훨씬 많이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투자를 많이 했는데 결과가 없다, 그러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닙니다. 실제로 있던 일입니다만 어떤 선교사가 그를 파송한 총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가서 선교를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많은 액수를 투자하고 있는 힘을 다해 전도했습니다만 얻은 것이라고는 겨우 세례교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정말 최선을 다하고 순교의 각오를 하고 선교했지만 얻은 결과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세상 같으면 분명히 실패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그 정도밖에 결과가 안 나왔으니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그 선교사에게 기립박수로 수고를 치하해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교 초기 우리나라에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 중에는 배를 타고 선교지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선교지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선교지에 도착했는데 본격적으로 선교도 해보기 전에 풍토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면 실패입니까? 그들은 정말 헛일을 한 것입니까? 성경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노력이 세상적인 기준에 의하면, '효율성'의 원리에 따르면 분명히 실패지만 성경은 그들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교회는 세상의 방법과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세상은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만약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고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생각해서 한 마리를 포기해야 합니다(눅 15:3~7). "아직 나한테 아흔 아홉 마리나 남아있는데 그깟 한 마리가 뭐 대수냐?"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도 이런 원리를 따른다면 성도가 한 마리 잃은 양이 되어 방황하더라도, 교회에 잘 안 나오더라도 "아직 우리 교회에 수백 명 천 명 넘는 성도가 있는데 그깟 성도 하나쯤 뭐 그리 대수냐?"며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까? 오히려 성경은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한 사람의 작고 보잘것없는 자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합니다(막 9:42). 성경은 교회가 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희생할 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효율성의 원리, 경제 원리에 따라 얼마를 투자했으니 몇 명은 건져야 한다는 이런 식의 원리는 교회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온 성도가 자기 시간과 물질과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새신자가 오면 온 성도가 와서 인사도 하고, 아는 척도 하고, 그 한 분 정착시키기 위해 그 많은 시간과 물질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성경적인 원리가 아닌 세상적인 원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닐까요? 혹시 우리 교회도 연봉제 도입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웃음) 아파트 전도에 투자한 시간과 물질이 얼마인데 몇 명 등록했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올해 우리가 새신자들에게 투자한 게 얼마인데 결과가 어떠냐고 하지 있지 않습니까? 선교지에 보낸 헌금이 얼마인데 선교사님은 몇 명이나 전도하고 교회는 몇 채나 짓고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얼마나 얻었는지 보고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너무 바쁜데 왜 목사님은 자꾸 새신자 오면 잘 해주라고, 와서 인사도 하고 아는 척도 하고, 한 사람 위해 7백 명, 천 명이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비효율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브솔 시내에서 생긴 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이 문제에 대한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이 사울 임금에게 쫓겨 다닐 때 일입니다. 다윗 일행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망명을 하고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얻어 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과 부하들이 전쟁을 하려고 북쪽 지방으로 떠나간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여인들만 남아있는 시글락에 쳐들어와서 성을 불사르고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비롯해 모든 여인들을 다 포로로 끌고 갑니다. 가축과 재산도 다 약탈해 갔습니다. 큰일 났지요. 이 소식을 들은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은 아말렉 사람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가족들을 구하고 빼앗긴 재산을 되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계속된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숫자를 세어보니 200명이나 됩니다. 전체 병력의 1/3이나 되는 숫자지만 너무 지쳐서 도저히 이들을 데리고는 아말렉 사람들을 빨리 추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윗은 이 200명을 브솔 시내라는 곳에 남겨두고 나머지 400명만 데리고 추적하기 시작해서 결국 아말렉을 따라잡고 그들을 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끌려갔던 가족들을 다 구하고 빼앗긴 재산도 다 되찾아 금의환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전쟁에 승리한 다윗과 400명의 부하들이 브솔 시내로 돌아오니 거기에는 지쳐서 함께 따라가지 못한 200명의 부하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동료들을 보고 끌려간 가족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만 한편으로는 또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자신들이 너무 지쳐서 함께 싸우지 못했으니 얼마나 몸 둘 바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22절에 보니 다윗과 함께 싸우러 갔던 400명 중에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 녀석들은 우리와 함께 가서 싸우지 않고 여기 남아서 편안하게 쉬고 있었으니 끌려갔던 가족만 데리고 가게 하고 우리가 되찾아온 재산은 주지 맙시다!"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얼마나 얄밉습니까? 우리는 힘든데도 죽어라고 쫓아가서 목숨 걸고 싸웠는데 힘들다고 브솔 시내에 남아서 쉬고 있던 자들과 똑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도 당연하고, 세상적인 원리에 따라 볼 때도 당연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면 많이 일한 사람이 많이 보상 받아야 하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아야 합니다. 효율성의 원리로 볼 때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이 상황에서 만약 다윗이 민주적인 방법에 따라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함께 가서 싸운 400명은 그렇게 하자고, 성과급제로 하자고 찬성에 손을 들었을 테지요. 그러면 400대 200으로 성과급제로 하게 되었을까요? 아니요. 남아있던 200명도 너무 미안한 마음에 반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뻔뻔한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우리도 재산 나누어달라"고 주장하는 아주 '뻔뻔한 사람'도 한 열 명쯤 된다고 치고 결과는 거의 600표 중에 590대 10으로 브솔 시내에 남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안 나눠주는 쪽으로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200명은 속으로는 불평불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고요. 이게 민주주의고 이게 다수결의 원리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3절과 24절을 보세요.

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무슨 말입니까? 첫째, 우리가 전쟁에 이긴 것이 우리 때문인 줄 아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고 가족과 재산을 되찾아온 것은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 해서 이긴 것이라면 너희 말처럼 누가 더 받고 덜 받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누가 더 잘 했고 못 했고도 있을 수 없고 누가 더 받고 덜 받고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따라서 전쟁에 참여했던 400명이나 브솔 시내에 남아있던 200명이나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경제 원리에도 벗어나고 효율성이나 다수결에도 벗어나는 엉뚱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다윗의 결정이 옳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이런 원칙이 전례가 되어 그 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다윗의 결정에 따라 누구나 똑같이 재산을 나누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이고 교회에서 따라야 하는 방법입니다. 분명히 세상과는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꼭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너무 지쳐서 브솔 시내에 남은 200명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뒤쳐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건축헌금을 하는데 너무 가정 사정이 어려워 못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아파트 전도를 하는데 말 못할 사정으로 못 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게으르거나 무관심해서 안 하는 분은 예외입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 분들 말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 가슴 아픈 사연으로 인해 교회 못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 하고 나오고 싶어도 못 하는 분들입니다. 몸과 영혼이 지쳐 아무 것도 못 하는 분들입니다.

둘째,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시비 거는 사람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라고까지 말합니다. 진짜 깡패나 불량배라기보다 원어에 보면 '악하고 무익한 남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남한테 일생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는 하는데 너는 왜 못 하냐?" "저런 사람들은 우리하고 똑같이 대접받으면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힘들어도 어려워도 했으니까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를 특별히 알아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런 사람들은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원리에는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원칙은, 아니 성경의 원칙은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전도도, 헌금도, 봉사도, 교회 출석도 그 무엇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내세워서도, 자신을 과시해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는데 너는 왜 못 하냐?"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사실 브솔 시내에 남았던 200명처럼 함께 따라가지 못하는 그 분들은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너는 왜 못해"라고 한다면 너무 마음이 아프지요. 이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지요. 교회는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똑같이 복 받아야 합니다. 품어줘야 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브솔 시내 같은 교회입니다. 따지고, 나누고, 구분하고, 나를 내세우는 교회 말고, 품어주고, 이해하고, 함께 나누고, 배려하고, 나 자신은 감추고 남을 세워주는 교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문제와 불편한 일들이 다 해결됩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아닙니까? 이런 곳이 바로 브솔 시내요 이런 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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