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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구원의 의미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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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의미 (엡 2:1-10)

오늘 교회를 찾아주신 모든 새가족여러분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을 주안에서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갖지만 올해는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벌써 이렇게 한지다 7년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적으로도 체질화되어가면서 이웃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자연스럽게 인식이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행사들을 갖으면 초청되어져오는 입장에 있는 분들로서는 왜 피도 섞이지 않고 아무 이권도 없는 자신들을 초대하기 위해 그렇게 마음을 쓰고 시간과 물질까지 쓰면서 애쓰는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제 토요일 오후 2시에 농협앞 사거리에서 찬양을 하면서 떡과 요고르트와 전도지를 나뉘어주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한 노년의 아저씨 한분이 건널목을 건너 우리쪽으로 오시면서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머리에 대고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보고 혹시 돈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추운날 나와서 찬양하면서 고생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나오신 분들중에서도 교회나가시는 분들이 좀 정신이 돌았다 아니면 무언가 모자라는 분들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생명을 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일까요?
자기 스스로는 자기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저도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군가 우리에게 받은 그 복음을 전하여 주어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에 죄인인 인간 스스로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결국 구원선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전쟁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죽어가는 사람은 오직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오는 특공대에 생명을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작전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파견된 하나님의 대사요 구원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위해 베푼 작전은 바로 십자가의 작전입니다. 세상은 자기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적군을 죽여야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작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시는 작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구원의 의미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의 바른 의미를 깨달아 아시기를 축복합니다.

1. 구원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구원이란 죽었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해지거나 나아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단순히 사람이 좀 개선되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창조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좀더 나은 인간이 아니라 새인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 밖의 사람들 즉 세상의 자연인의 상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잇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대표기도할 때에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여기 이미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즉 영적인 시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죽었다는 의미는 ‘단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허물과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죽음입니다. 아무리 배우고 돈이 있어도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죽음입니다.
여기 구원받기 이전 사람들의 허물이란 무엇일까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허물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허물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라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것이 허물입니다.‘미워하지 마시오’라고 하면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미워하면 그것이 바로 허물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원어에 보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죄란 하나님의 목표에서 빗나간 삶이 죄입니다. 즉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원하시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고 경배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허물과 죄로 하나님 앞에 단절되었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시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의인이 없습니다. 영적인 시체를 살리는 데는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에수님은 새생명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새생명을 얻습니다. 구원은 바로 새생명 새창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얻기 이전에 이 세상에서 일방적인 지배를 받고 살았습니다.
2-3절을 읽어보십시오.
첫째 이 세상의 흐름 즉 이 세상의 철학 잘못된 유행 허무한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둘째 마귀의 지배를 받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란 마귀를 말합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삶들은 모두 이 마귀의 지배를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마귀의 가장 큰 작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앞장서는 작전입니다.

셋째 육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육체는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부패성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않고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는 이렇게 세상의 지배 마귀의 지배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을때에 우리는 이런 지배를 받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2.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입니다.

10절, 구원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새생명의 새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죄의 옛사람이 본능적으로 죄에 대해서 반응하면서 살아가듯이 구원받은 새생명의 사람들도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사람들의 삶과는 180도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마귀를 기쁘게 하고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생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앞에 나오신 새가족여러분들 보시기에 얼마나 그리스도인들 중에 생활에 본이 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 것입니다. 솔직히 말은 그리스도인들인데 새로운 생활이 따르지 않는 분들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분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진짜이신 예수님의 매력을 바라보시기바랍니다. 진짜이신 예수님을 따라 변화된 분들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온지 올해로서 7년째 되는 해입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는 이제 교회에 나오신지 몇년안에 계신 분들의 수가 상당수 있습니다.과거에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절대로 교회는 나오지 않을 것같은 분들이 구원의 복을 받고 나서 얼마나 새로운 생활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 너무나도 감사할 일들이 우리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그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처음 나온 분들중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새로운 사람들을 예비하고 계심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이렇게 초청받아 오신 분들 중에 이제 변화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 중에는 대충 대충 믿는 오래된 성도들 보다 더 확실한 변화의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는 먼저 된 사람이 나중될 수 있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는 것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시지만 아마도 어떤 분들은 그런문제제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다니는데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때마다 정말 저희도 속상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이유와 변명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사람은 그리도 안에 잇으면 새롭게 변화되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란 사람이 구원받기 이전에는 에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던 사람이엇습니다. 핍박자 바울이 은헤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새삶을 살아갑니다. 그 새로운 삶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사람을 새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가히 새롭게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울뿐만 아니라 저도 오늘 여기에 있는 많은 성도들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변화되어 새삶을 살게 됩니다.

3. 구원은 그리스도안에서 은혜의 선물입니다.

8절,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특징은 값을 받지 않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선물이 싸구려가 아닙니다. 보통 우리는 값없이 받는 것들은 싸구려일 것으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사실은 이 구원의 선물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몸버려 피흘려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죽음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아들이 다닌 대학에 거액의 돈을 희생하면서 장학금을 바치는 장한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들의 희생의 댓가로 때로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의 혜택을 보듯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예수의 희생의 댓가로 값없이 그 피의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8, 9절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누구나 열심히 일하거나 대가를 지불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서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갈 겁니다. 멋진 사람들의 그룹,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아주 겨우 들어온 사람들,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값없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얻는 것입니다. 나의 선함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화 중 하나는, 잃어버린 아들 또는 탕자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독립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제 몫의 유산을 전부 주십시오. 떠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유산의 반을 떼어 주고, 아들을 먼 외국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아들은 술과 여자, 그리고 노래로 재산을 다 써버리고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나 돈을 탕진한 아들은 운도 없어서 결국은 돼지 밥을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현금자동인출기도 없었구요. 그는 파산했고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가난뱅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래, 내가 다 망쳐놓았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우리 아버지 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지금 내 신세보다 나아.” 그리고는 또 혼잣말로 “집으로 가야겠어. 그리고 ‘아빠, 저 제가 다 망쳐 버린 거 알고 있어요. 저는 가족의 유산을 반이나 탕진했습니다. 저는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종이나 하인으로라도 저를 고용해 주셔서, 내 남은 인생을 그렇게 일하면서 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사는 게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버지는 저 멀리에서 아들이 집으로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아들에게로 뛰어가는 사랑 많고, 인자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꼭 안아주고 입맞추고 미소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가서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입히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네 행동을 반성하고, 목욕하고 오너라. 돈부터 갚아야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잔소리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그때 너와 말하겠다.”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행동은 단지, 조건 없이 꼭 안아주고,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우리 집의 가락지를 가져 오라. 내 아들의 손가락에 끼워주겠다. (요즘으로 말하면 마치 신용카드를 주는 것처럼 가산(家産)의 상징을 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신용을 의미합니다.)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는 이제 바비큐 파티를 할 것이다. 내 잃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 지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믿지 않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천국에 돌아오면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 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구원받을때 예비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모든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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