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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망대 세우는 비용의 비유 (눅 14: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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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대 세우는 비용의 비유 (눅 14:26-33)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자와 제자를 나눕니다. 신앙의 정도에 따라 구원만 받을 사람, 좀 더 적극적으로 헌신할 사람 이렇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의 발달 정도에 따라서 인간 편에서 편리하게 나눈 구분일 뿐입니다. 주님은 신자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제자만 알 뿐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향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신 최후의 명령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믿는 무리들의 모임을 “제자들”(행6:7)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축복을 받는 자가 아니라 축복을 베푸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경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인과 구경꾼의 차이를 아십니까? 구경꾼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얼마나 희생할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손님입니까?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면 여전히 손님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희생할까 생각하면 주인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나라가 내게 무엇을 해줄까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할까 염려하고 책임지려는 자가 그 나라의 주인입니다. 주님이 오늘 말씀에 나온 것 같은 자기부인과 희생을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제자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빵이나 먹으러 오는 무리가 아니요, 너희는 빵을 먹이는 주체, 곧 예수님의 동역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오늘 말씀은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정반대로 우리 부모와 처자와 자기 목숨마저도 미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타인을 향하여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할 것을 요구하시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자기부인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을 못합니다. 자기 잘못은 실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들 편에서 배려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앉아서 비용을 계산하라

오늘 주님께서는 앉아서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를 세우려면 돈이 듭니다. 기초 공사를 하고 그 이후에 망대를 높이 쌓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돈이 충분한지, 돈이 충분하지 않다면 돈을 빌려오거나 물자를 댈 다른 방도가 있는지 엄밀히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산이 서면 건축을 추진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다가는 기초 공사만 하고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기 전에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31절입니다. “먼저 앉아 ...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가진 군사가 1만입니다. 상대방은 2만입니다. 수가 이렇게 차이 나면 다른 것 예컨대 군사의 훈련과 정신력, 무기나 지형지물의 유리함, 이웃 국가의 도움 등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으면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산 없이 싸우다가는 패배하여 포로가 되는 비참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산하는 것을 마치 믿음이 없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강력한 도구입니다. 생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각이나 계산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생각이 자기 욕심이나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능성들이 있는데 그 중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택해 이기적인 판단을 합니다. 또 어느 때는 불리한 것만 들어 자기 비겁함에 대해서 변명합니다. 이는 생각 자체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 잘못된 생각을 하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옳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저는 대표적으로 다윗의 경우를 들고 싶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매우 크고 힘이 센 장수였습니다. 사무엘서에서는 골리앗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에 달한다고 보도합니다. 오늘날 도량으로 환산하면 283cm에 해당하는 산과 같은 존재입니다. 갑옷의 무게만도 58kg에 달합니다. 창대는 베틀채처럼 굵었고 그 창날의 무게만도 7kg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은 변변히 싸움도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이때 다윗이 나와서 골리앗을 대적하려 합니다. 다윗은 작고 어렸습니다. 사울은 싸우러 나가는 다윗에게 자기 갑옷과 투구를 입히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윗에게 맞지 않고 오히려 불편합니다. 다윗은 목동의 복장 그대로 입고 오직 막대기와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나갑니다.

왜 다윗이 물맷돌만 들고 나갔을까요? 저는 이 장면에서 다윗이 생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칼을 들고 나가서 싸우면 아무리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골리앗을 상대하는 싸움에서 승산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 내용이 사무엘상 17장 34-36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먼저 간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자와 곰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신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때 어떻게 이겼겠습니까? 바로 물맷돌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양치기 경험으로 통해 물맷돌 던지기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장기인 물맷돌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다윗이 먼 거리에서 물맷돌을 던지자 골리앗은 사자나 곰처럼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다윗이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물론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칼로 맞서 싸워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자기 능력을 계산해 본 것이지요. 과거를 돌이켜 보니까 사자와 곰을 쓰러뜨릴 때 어떻게 이겼을까? 삼손처럼 맞서서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물맷돌로 먼 거리에서 던져 쓰러뜨렸습니다. 물맷돌이라면 승부가 가능합니다. 다윗은 정확한 계산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믿음 플러스 생각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할례 없는 자 때문에 이스라엘을 부끄럽지 않게 하시리라. 그가 이런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니까 생각도 그렇게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것도 생각하고 계산한 후 믿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비용하고 그에 대한 축복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계산이 이득이 나면 믿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비용은 무엇이 드나요? 첫째는 시간을 빼앗길 것입니다. 주일에 어디 놀러가고 싶은데 예배에 참석해야합니다. 기도 시간, 봉사 시간 등을 빼앗깁니다. 물질적인 손해도 있습니다. 또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이것저것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니 좀 성가십니다.

그와 반면에 여러분이 얻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먼저 영생의 복을 얻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내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마음에 평화와 든든함을 가져다 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할 수 있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큰 복입니까? 물질적인 손해부분도 엄밀히 한 번 계산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바친 것 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물질적 축복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 번 계산해 보십시오. 제 자신을 볼 때 저는 제가 바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더 높이시고 명예롭게 해주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게 된 것도 큰 복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건강의 복도 주셨습니다. 통계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연령이 7년 이상 더 높다고 합니다. 어느 보약을 먹고, 또 어떤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생명을 7년이나 연장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간을 빼앗긴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만큼 나머지 시간을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시간관리 능력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한 번 받은 복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 믿어도 좋겠구나, 예수 믿어도 손해나지 않는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손해나고 없어진 것만 생각하니 아까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찬송가 489장 가사가 참 좋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으로 손해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로 자신을 믿으라고 그렇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게 복인 줄도 모르고 거부하고 엉뚱한 길로만 가려 합니다.

계산하라 1. 자기 부인

특별히 오늘 비유 말씀은 제자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계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할 대가입니다.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러분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내어놓으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그와 같이 제자에게도 자기가 지고 갈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버리고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다면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가려다가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사람들로부터도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렇게 힘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실까요?

첫째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내와 자녀들처럼 귀중한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목숨보다 더 절대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미워하고 버리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직이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것이 영원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정보다 더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는 가정의 존립근거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실 때만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전 재산을 파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밭을 갈던 농부는 우연히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이 보물의 가치가 너무도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자기 전 소유를 팔아 이 밭을 삽니다. 계산해 보니 이것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선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계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느 정도의 가치입니까?

저는 이 땅의 독립군들을 생각하며 존경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자기 처자와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숭고한 삶을 칭찬을 하고 기립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과 민족 중에 누가 더 높습니까? 누가 더 숭고합니까? 보다 높은 가치 앞에서 낮은 가치는 빛을 잃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런 요구는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예수를 소유하면 모든 것을 얻습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부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양쪽에서 단물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던 이유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더 사랑하는지. 우리 삶에서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고 다음이 가족이고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인간 관계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족의 가치처럼 신성해 진 것은 없습니다. 사회나 교회나 가족의 가치에 대해 말합니다. 분명 이는 진전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가족도 자기 죄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전의 집합체, 자기 욕망의 투사물, 자기 이기주의를 합리화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아무것도 가로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관계의 중보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모든 사이에 서 있는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내 아내와 나 사이에도, 나와 자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서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되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을 향한 눈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었을 때 가족 관계는 다시 회복됩니다. 하나님으로 중심이 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으로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복음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그리스도가 가족의 주인이 될 때 가족은 온전해 집니다. 자기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과 희생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더 많은 이웃을 자기 가족으로 품는 대가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백 배로 받는 가족의 축복입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에게 일사각오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은 가족을 버리면 더 이상 가족을 얻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며 진짜 죽을 것 같아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모든 일은 죽기 살기의 각오로 나아갈 때 일이 되고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 임할 때의 좌우명이기도 했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고, 살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죽는다.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하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가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제자의 길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도 죽기 살기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일이 됩니다. 적당히 편한 길을 가려고 하면 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웃음만 삽니다. 그래서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런 각오가 된 후에야 일을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 각오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초만 닦고 결국 망대를 세우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일사각오의 자세로 가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적이 숫자가 우리보다 두 배나 많다 할지라도 1만의 병사가 죽기 살기의 각오로 임한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런 의지가 없다면 빨리 화친의 길로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계산하라 2. 예수의 능력

우리 계산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절대 상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라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상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만큼 우리 인생의 대차대조표상의 수입란이 커집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은 “0”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수입 란이 압도적으로 많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갔던 것은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능력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구스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 절대적인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다 왕 아사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14:11) 저쪽은 강한 자입니다.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 저쪽은 많은 무리입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산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서 약한 자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합니다. 아사가 이런 믿음으로 나아가니 구스의 백만 군대가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앉아서 헤아려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계산해야 될 것이 내게 재물이 얼마나 있나, 나를 도울 사람이 얼마나 있나, 내 능력이 얼마나 되나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가장 소중한 것도 미워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네가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죽기살기로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네 안에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큰 재산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싸움은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 길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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