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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자 (시 37:5~6, 눅 1: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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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자 (시 37:5~6, 눅 1:36~38)

  몽골에서 사역하는 이용규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얼마 전 ‘내려놓음’이라는 저서로 많은 감동을 준 분입니다. 아직 40대의 젊은 학자이며 선교사입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중동 지역학 및 역사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이 분에게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고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온 가족을 데리고 몽골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지금 그는 울란바토르의 이레교회를 평신도 사역자로 섬기고 있으며 몽골국제대학교 내의 ‘칭기스칸 연구소’의 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분을 여러 해 전에 어느 집회에 강사로 함께 가서 만났는데 참 소박하고 소명의식이 투철한 좋은 분으로 그 삶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려놓음’이란 그 분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몽골의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하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일이 되어 예배를 하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몸에 땀이 범벅이 된 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입니다. 이 자매가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서 소를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자매가 예배해야겠다고 한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자 밖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처소로 찾아온 것입니다.

  내려놓음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얻는 삶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것을 얻습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주십니다. 내 욕심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려놓지 못해 얻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얻으며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얻고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버리는 일입니다. 얻기도 가지기도 힘들다고 할지 모르지만 더 어려운 것은 내려놓는 일입니다. 짐은 내가 지면 힘듭니다. 그러나 내려놓으면 쉽습니다. 내려놓는 순간 자유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자기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아브라함이 양식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의지하던 양식을 끊어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시편 105:16에는 “의지하던 양식을 끊으셨도다”라고 합니다. 내려놓았던 것을 다시 집어든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신발을 벗게 하십니다. 그의 지팡이도 던지게 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의 입과 경력을 모두 내려놓게 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에 가나안에 들어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대다수의 보고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겁 없이 들어갈 수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으면 이렇게 담대해집니다. 다윗은 전술가였습니다. 전쟁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술과 지혜를 내려놓고 일일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내려놓은 다윗은 승리자였습니다. 삼손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실수연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잘린 다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힘을 주셨고 그의 양 팔로 다곤 신전이 무너지고 그의 평생 보다 더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신약의 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따른 것입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생명이 걸린 세관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많은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대단한 지식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당시로는 정말 대단한 로마 시민권도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화려한 가문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
  내려놓는 것은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모두를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 사용했습니다. 필요하면 다 썼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려놓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십니다. 더 많이 주시려고,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더 큰 것을 주시려고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절대 놓지 말고 붙들고 있으라고 합니다. 놓으면 잃는다고 합니다. 놓게 되면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것을 움켜쥐고 내려놓지 않는 자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내려놓은 자입니까? 움켜쥐고 있는 자입니까?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살펴보고, 내려놓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이 다 주님께 내려놓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려놓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시편 37:5에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합니다. 내려놓음이란 맡김입니다. 의지입니다. 주님께 내려놓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 ‘맡기라’는 히브리말로 ‘갈랄’이란 말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 뜻은 ‘옮기다’, ‘굴리다’ 그리고 ‘신뢰하다’라는 뜻입니다. 맡기는 것은 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옮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잠언 6:3에는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합니다. 내려놓는 것은 내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영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경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집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회사의 회장이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사장실에 명패에 ‘대표이사 회장 하나님’이라고 써놓은 것을 봤습니다. 하나님께 회사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저를 의지하면’이란 말은 ‘너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이란 뜻입니다. 내려놓음은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 방법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드리는 것이 내려놓음입니다. 하나님의 초점에 맞추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믿음’을 세 단어로 설명합니다. 지식과 동의와 신뢰입니다. 지식은 믿음의 첫 단계이지만 지식은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동의는 믿음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나 동의하는 것만 가지고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신뢰는 생활에서 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고스란히 내려놓는 일입니다. 내 힘을 빼는 것입니다. 내 힘을 빼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얻는 방법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으로 번역한 단어인 ‘피스티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맡긴다’는 뜻의 고어에서 왔습니다.

  기독교의 유명한 순례의 길이 있습니다. 야고보의 순례길이라 불리는 이 순례의 길은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가는 긴 여정입니다. 보통 40일에서 50일 가까이 걸어서 가는 순례의 길입니다. 이 순례의 길에 대해서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나 조이스 럽의 순례기인 ‘느긋하게 걸어라’나 독일의 코미디언인 하페 케르켈링의 순례기인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결 같이 이들이 말하는 순례자에게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짐을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는 일입니다. 짐이 무거워서는 순례자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2:1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합니다. 경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도 자신을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짐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순례자의 길입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일입니다. 순례나 경주나 다 같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이든 귀한 것일수록 움켜쥐지 말고 손을 감사함으로 펴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은 훨씬 순탄해집니다. 모세의 영점을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 힘의 마지막인 지팡이를 땅에 던져 모든 것을 내게 맡기지 않겠니?”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 한 가지까지 내려놓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적으로 모세의 의지가 되게 하십니다.

  옛날 고전적 설교 예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기 한국에 어느 선교사가 시골에 전도하러 가기 위하여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동네 어구에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짐을 머리고 이고 손에 들고 가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드렸습니다. 차에 탄 할머니는 짐 보따리를 그대로 머리에 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시지 왜 이고 계십니까?” 선교사의 질문에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내가 탄 것만도 감사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놓겠습니까?” 이미 구원받고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해 짐 지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내려놓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 5:7에는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를 돌보심이라”라고 합니다. 우리의 길이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계획, 행동, 과정, 결과 모두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맡기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깁니다. 운명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맡길 데를 알지 못하여 맡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맡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아십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잘 맡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잘 맡기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가 움켜쥐고 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뱃돈을 받으면 어떤 아이는 아예 엄마에게 맡깁니다. 그리고는 필요할 때마다 와서 “엄마, 내가 맡겨놓은 돈 중에 5천원만 줘” 그럽니다. 이런 아이들은 이미 자기가 맡겨놓은 돈을 다 써도 계속 맡겨놓은 돈을 달라고 하고, 엄마는 알면서도 계속 줍니다. 그런데 움켜쥐는 아이는 어떤지 아십니까? 세뱃돈을 맡기라고 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돈이 떨어지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너 세뱃돈 가지고 있잖아?”라고 합니다. 이런 아이는 이미 돈이 없지만 엄마는 계속 가지고 있는 돈을 쓰라고 합니다. 누가 이익입니까? 맡기는 쪽이 훨씬 이익입니다. 우리도 다 이런 두 종류의 아이들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늘 타서 씁니다. 풍성합니다. 자신이 움켜쥐고 살면 늘 달라고 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통해 뛰어내립니다. 모두를 내려놓습니다. 모든 것을 맡겨버립니다. 지금까지 편안한 줄로 알았던 안전한 장소를 포기합니다. 죽음이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소유할 재산이나 움켜쥘 물건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자신의 물건이나 소유를 관리하거나 조종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일대 환상입니다. 더 없는 행복의 맛은 진정한 내어맡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주님께 맡기고 내려놓으면 슬픔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누가복음 1:38에는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내려놓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순종은 내려놓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이미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나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사무엘상 3:18에는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의 말을 다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7:25에는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대로 행하사”. 내 뜻과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여 내 주장을 내려놓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을 보세요.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처녀가 임신하였다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입니다. 어쩌면 요셉과의 약혼도 파혼될 수 있습니다. 세인의 지탄과 멸시를 받아야 합니다. 심하면 군중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선하시게 마무리하실 것을 확신하며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습니다”라는 말을 잘 묵상해 보세요. 이 말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씀은 내 소원입니다. 내 육신의 뜻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려놓는 자세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자신의 책 ‘주식회사 예수’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내려놓는 것은 우리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찬송은 잘하지만 찬송 후에는 내 뜻대로 합니다. 주의 뜻대로 되면 불평하기 쉽습니다.

  내려놓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에게도 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고집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보따리를 풀고 나면 별것 아닌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나서 자신이 부리는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나 확신이라고 합니다.

  회의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안건에 대하여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은 의견개진입니다. 두 번 이야기하는 것은 주장입니다. 세 번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고집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한 다음에 반드시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독선이며 아집입니다. 아집을 신념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념이란 문제에 효과적 대응하는 것입니다. 아집이란 고집을 부려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교만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내려놓지 않습니다. 움켜쥐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올려놓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비롯되는 고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기도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도 이 사실은 확실히 드러납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는 아버지의 생각이나 뜻에 관계없이 내 뜻대로 했습니다. 내 맘대로 결정하고 내 맘대로 돈을 요구하고 내 만대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 뜻대로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립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옷도 갈아입고, 가락지도 끼고, 잔치 상도 받고, 불편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내려놓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주님과 뜻이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달콤한 멍에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야말로 자기가 좇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말합니다. “그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 내려놓음은 우리의 평화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결론

  영국의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주후 401 ~ 409년 로마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거나 선을 행하려면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리를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명령하소서”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와 행위의 대결입니까? 사실은 내려놓음과 움켜쥠의 대결입니다. 나를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막의 수도사들과 함께 수도원 경험을 할 때 보니 수도사들은 모두 내려놓고 무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영성에서 ‘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 혹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학력, 경력, 유산, 가문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수도사가 될 때에 ‘청빈, 순결, 순종’을 서약합니다. 그들은 수도사가 될 때의 그 서약을 매일 아침 기도회 때마다 합니다. 이것을 영속적 회심(perpetual 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한번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매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내 자신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주님께 내 자신을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전 삶을 주님께 내려놓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한 번 내려놓는 삶이 아니라 매일 내려놓는 삶을 사세요. 내 자신을 주님께 내려놓을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내려놓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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