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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 (딤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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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 (딤전 2:1-4)

우리 대한민국의 4800만 온 국민의 관심은 12월 19일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쏠려 있습니다.  대선이 3주 앞으로 다가왔는데, 각 후보 간의 정책대결은 찾아볼 수 없고, 상호 비방과 흑색선전의 네거티브 선거전이 판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정치학자들이 2007년의 대선을 말하면서 ‘3무 선거’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무(無)비전’, ‘무정책’, ‘무정견’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선거에서 정당정치가 실종되었고, 승리만을 목표로 하고, 비방과 흑색선전, 상대방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치권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전근대적인 역술인과, 점쟁이, 명당을 잡아주는 지관, 무당의 굿이 판을 치는 선거전이 되고 있습니다.  당락을 점치는 무당에게 억대의 금품이 오고간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이것이 21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할 일인지 정말 한심하기만 합니다. 

우리 전 국민들은 지금 진실게임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입니까?  여러분은 정답을 아십니까?  누가 실소유주이며, 누가 사기 친 사람이고, 누가 사기 당한 것입니까?  정확하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흑백은 가려질 것입니다.  국가최고경영자인 대통령을 뽑는데 성인군자를 뽑는 것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정도로 상식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5년 간 국가를 경영할 사람을 뽑는데, 참으로 어렵기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명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에게 정치가 필요한 것은 음식과 물과 빛과 공기가 필요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치가 필요하고 국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신장시키고, 문화의 창달과 교육의 증진을 도모하고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의미와 인류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합니다.  기독교회는 죄의 결과에 의한 모든 탐욕과 착취와 집단적인 이기주의와 압제를 비판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정의와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정의, 평화,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와 정부는 상호보완의 관계에 놓일 때도 있지만, 상호 견제로 관계가 악화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현대국가의 통치자들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정의와 자유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지도자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비판을 가하기도 하며, 양심과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신앙양심의 자유와 저항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중보기도 사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란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창세기18:22-33에 보면 중보기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패역한 땅,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애절하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하여 소돔성을 징벌하지 말라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는 실상은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진한 무엇을 느낍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 감동을 받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인신데, 여러 차례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시면서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있습니다.  한낱 피조물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일일이 대답하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사실 이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하여 잘못하시는 것이라고 나무라고 가르치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조목조목 하나님에게 따지는 기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아브라함의 기도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45명으로 정정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하시려는 계획을 변경하시면서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사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다시 어떻게 줄인다는 말입니까?    사실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드릴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감히 아뢰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화를 내시거나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응답하시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다시 아뢰었습니다.  5명을 줄여서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그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숨넘어가게 5명씩 줄여나갈 것입니까?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시는 하나님에게 10명을 줄여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면서 사람의 숫자를 깎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손한 자세인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같은 자리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자꾸만 변경하고, 깎는 것은 정말 오만불손하게 보여 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기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의 심장은 심히 뛰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조카 롯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번 변경하면서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최후로 기도합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에도 하나님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돔성과 고모라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떨어져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소원을 들어주시면서 롯과 그의 부인과 두 딸을 타는 유황불 속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시는 안타까운 마음,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의 여러 번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멸망하시는 소돔성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건져내시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어떤 사람을 위하여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중보기도의 모델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중보기도는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중보기도하면 사람이 성숙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를 통하여 자기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고, 자기가 받는 축복이 더 큰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의 기도가 나옵니다.  첫째로 간구라는 기도입니다.  헬라어로 “데에시스”라는 기도입니다.  원하다, 탄원하다, 간청하다는 말입니다.  데에시스의 기본적인 요구는 결핍에서 오는 간절한 필요를 충족하게 채워달라는 간청입니다.  진정 도와달라는 외침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기도는 “프로슈케”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아뢸 수 있는 기도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 프로슈케라는 말을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세 번째 나오는 기도는 도고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중보의 기도입니다.  “엔튝시스”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도고의 기도입니다.  의논한다, 청원하다, 탄원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서를 내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내가 나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중보기도는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성령의 영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도 능력 있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네 번째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카리스티아”라고 하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기도에 열심을 내었어도 감사가 빠지면 진정한 기도는 아닙니다.  감사야 말로 기도의 마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은 감사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간구과 기도와 도고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2절에 있습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라”(딤전2:2)고 했습니다.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나 황제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회의 공동기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어떤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박해하는 폭도였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작심하고 기독교회를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박멸하려고 애를 쓰는 박해자라고 하여도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광풍이 불어 닥쳐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왕이나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절대적인 의무라고 보았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국가와 지도자를 말씀드리면 비판하실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벧전2:17의 말씀입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했습니다.  롬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를 이은 속사도 시대의 터튤리안이란 교부는 로마의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의 장수와 안정된 통치와 가정과 충실한 신하와 의로운 백성과 그리고 평화스런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의 적도 아닙니다.  우리가 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기도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가 가장 복되고 안정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단정하게 행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기 원하기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 시대가 복되고 잘 살고, 범죄도 없고, 두려움 없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에 “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선하고 받으실만한 제물이라는 말씀입니다. 

4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가장 원하시는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전 세계에 이르고, 세계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압력 단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인 각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것은 국민의 기본권이기에 잘 감당해야 합니다.  절대로 교회 단위로 움직여도 안 되고, 교단별로 성명을 내고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여 기독교 정당을 만들거나 어느 정당 후원회를 만든다고 할 때에 우리 사회에 비쳐지는 이미지는 어떨 것입니까?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만 보일 뿐입니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나치 정부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5년 5월 18일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히틀러와 그 집단의 범죄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 때에 독일의 교회는 얼마나 부끄러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교회는 대회로 모여 “죄책고백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로부터 국가의 어떤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기 전에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교회는 민족의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사사건건 국가와 견해를 달리하고, 정죄하고,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상호보완과 수정의 기회로 삼으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의 글에 의미심장한 글이 있어야 참고해보았습니다.  유엔은 이 지구상에 많은 나라들이 함께 모여서 세계의 중요한 국제적인 분쟁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중요한 기구입니다.  현재 197개국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여러 민족과 여러 종교인들이 모이기에 유엔에서는 특정종교의 색채를 낼 수가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미국에서 연설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 미국을 축복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어도 유엔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유엔에서 가장 알아주고, 중요한 기구가 있다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입니다. 

여기 상임이사국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어떤 결정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기구입니다.  유엔군이 우리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도 이곳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투표할 때마다 사용하는 철제 투표함이 있었는데, 이 철제함이 오래 사용하고 보니 고물이 되어서 바꾸자는 의견이 있어 투표함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철제함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에 어떤 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에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폴 안토니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사람이 그 서명한 폴 안토니오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일생을 대장장이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주 성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그 철제함을 만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도하는 잡지사의 기자는 “이것은 얼마나 축복이고 다행인가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국제적 분쟁을 해결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함에 자기의 기도를 함께 집어넣었던 이 폴 안토니오의 기도는 아마도 지구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에 일조했음이 틀림이 없다.”고 평하였습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 위대한 지도자를 세워주시고, 세계 평화를 위하여,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것입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메리란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가장 어두운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부패했습니다.  윤리와 도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메리여왕이 불륜을 저지르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직언하거나 왕이 하는 일을 반대하면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렇게 가장 어둡고, 암울할 때에 한 사람의 기독교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스코틀랜드를 구원해 주옵소서.    아니면 차라리 저에게 죽음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으니 죤 낙스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개혁운동을 펴다가 메리여왕을 피하여 두 번씩이나 도망쳤습니다.  프랑스로, 스위스로 도망갔습니다.  스위스에 가서 죤 칼빈 밑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는 죽어가는 스코틀랜드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결사적인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 국가를 위한 기도에 메리여왕도 두려워 떨게 되었습니다.  메리여왕은 영국의 전군대보다도 죤 낙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사탄도 기도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부끄럼당하지 않도록 응답해 주십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있기에 우리나라는 복된 나라,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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