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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기쁨이 되는 자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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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자 (눅 14:25-35)

[로버트 J. 스타인버그(Robert J. Steinberg)]라고 하는 예일대학의 심리학과 석좌교수가 이런 재미있는 예화를 말했습니다. 똑똑이라는 아이와 똘똘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똑똑이라는 아이는 학교에서 최우등을 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입니다. 똘똘이라는 아이는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이고 사실은 말썽부리는데 일등인 장난꾸러기 아이입니다. 이 두 친구가 어느 날 같이 산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산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똑똑이가 호랑이를 딱 보는 순간부터 똑똑한 머리로 계산을 했습니다."호랑이가 250m밖에서 시속 50km로 달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18초 만에 나에게 다가올 것이고 그러므로 18초 후에는 우리가 죽는다."라고 자포자기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이 말을 듣고 있던 똘똘이가 운동화 끈을 풀어서 다시 꼭 매고 있는 것입니다. 똑똑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야, 이 멍청한 놈아, 18초 후면 죽을 텐데 네가 뛰어 봤댔자 이지 어떻게 호랑이보다 빠르게 뛸 수 있겠느냐?"고 핀잔을 주자 똘똘이가 씩 웃으면서 한마디를 했습니다."그게 아니야 내가 너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거든." 알아들으셨습니까?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과 똘똘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진리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에는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진리 적용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들을 어떻게 생활 속에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특별히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대처해야 하느냐 하는 데는 지식 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숲속 동물들의 왕인 사자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토끼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숲 속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하찮은 토끼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토끼야,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죽는다."그러니까 토끼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굴려서 그 곳에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고 사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죽을 지경에서 토끼의 도움으로 겨우 나와 놓고는 토끼보고 하는 말이"내가 사흘이나 굶었더니 몹시 배가 고픈데 너를 잡아먹어야겠다."합니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세상에 이런 의리 없는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죽을 것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그래도 된다, 안 된다는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마침 그때 여우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여우가 지혜를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현장 검증을 하자고 합니다. 사자보고"사자 왕이여, 이 토끼가 임금님을 구원해주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사자가 자기가 빠져 있던 함정으로 풍덩 들어가더니"이렇게 하고 있었지"그럽니다. 그때 여우가"그럼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라고 한 후에"토끼야 가자"하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래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도대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악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부르심이란 것은 대단한 의미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과거에 네가 어떠했는지를 과거에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이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았다는 것이 부르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리고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나섰다면 이 부르심 속에 삶의 의미가 있고 부르심 속에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음을 믿고 나가야 됩니다. 이미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 속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과거의 청산이 있고 더 중요한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습니다. 자, 이것이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그리스도인이라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현재라는 시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그들 모두가 아니라 진정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는 거룩한 비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의 백미가 26절과 27절입니다."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무슨 말씀입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따름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저 것 다 누리며 즐기며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하나는 불가피하게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그것이 값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고 고통도 없이 마냥 편안하기를 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살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서 맴돌기는 하지만 십자가 곁에 가기는 꺼려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영광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더 이상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열심히 믿겠는데 십자가 지는 것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는 자를 기뻐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또 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빈털터리로 살라는 무소유의 의미로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의 물질이든지 좋습니다. 정당한 대가로 벌어들인 물질이라면 당당히 소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사용하고 합당하게 쓸 줄도 알아서 그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소유가 꼭 물질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취미가 나를 주님께로 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취미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취미에 발목이 잡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불쌍합니까? 또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시간만큼은 철저히 지키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이 진정한 부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일이 많고 복잡한 세상을 산다할지라도 집중해서 오직 한 가지의 의미만큼은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지요.

<고슴도치의 원리>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고슴도치와 여우의 싸움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여우는 약삭빠르고 영리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잔꾀를 많이 부립니다. 이와 반대로 고슴도치는 우직하고 한 가지 밖에 모릅니다. 이 둘이 싸우며 누가 이길까요? 여우가 날쌔고 약삭빠르기 때문에 이길 것 같지만 고슴도치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슴도치는 오직 하나 빳빳한 침을 몸 밖으로 세워 자신을 보호하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아무리 여우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았지만 자신에게 제일 적합하고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한 고슴도치에게는 당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 고슴도치의 원리입니다. [짐 콜린스]라는 사람이<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책에서 이 원리를 기업에도 적용을 했습니다. 무한 경쟁 시대인 21세기에 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문어발식 확장을 꾀하지 말고 가장 강점이 있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업도 이래야하거니와 하물며 신앙의 성공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것,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내 인생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집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는 강성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깨우고 제자들을 깨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에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적으로 불러 주셨는데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과거에 미련이 있습니다.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욕심이 남아 있고, 버리지 못한 소유가 너무 많아서 하루하루 그 소유들을 지키기가 더 바쁘고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는 재물에 미련이 있으면서 주님을 따라 가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고 나도 기쁘지 않으면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 일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마더 테레사]는 말하기를"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얼마나 마음을 쏟고 사랑을 쏟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부한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노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매일 기뻐하시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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