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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주어질 주님의 평가는 무엇일까요?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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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질 주님의 평가는 무엇일까요? (마 25:14-30)
 
일단 평가라는 말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음에 부담스러워합니다. 평가는 시험을 의미하고 시험이라는 것은 결코 우리를 마음 편케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험 준비가 잘 된 사람은 기회를 기다려 정말 이번 기회에 평가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 평가이고, 이 평가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을 달리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었다라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가면서 우리도 역시 평가를 받았고 그 가운데 호평을 받았기에 그것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건 싫건 마주해야 하는 평가라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고 또한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여겨 극복하는 것이 바른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이 음식을 식구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과 '이 음식을 식구들이 맛없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는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필연적인 평가의 과정이 있겠으나 평가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이 평가를 통해서 내가 어떠한 은혜의 자리에 나갈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또한 평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2007년 회기의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을 맞이하면서 1년을 돌아보며 우리 삶에 임하시는 주님의 평가를 생각하며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아마 오늘의 말씀,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목사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미 다 예측도 하시고 제목을 봐도 다 예측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회기를 마치면서 지내오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실 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으시겠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여쭤볼께요.)

“칭찬을 받으시겠지요?”
“아멘”
(예, 감사합니다. 앞쪽에 앉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수 있다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기회를 주시고, 또 은혜를 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제 회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면서 이 달란트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난 1년 동안 믿음이 많이 자라셨습니까?
더 많은 헌신의 열매를 맺으셨습니까?
인격이 주님의 모습을 닮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의 깊이가 더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마음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그래도 내가 작년보다 요만큼은 나아졌는데...’ 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있어 우리는 마음에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학교 때부터 들어와서 잘 아는 내용이지만 이 중에는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들도 꽤 되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재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먼 타국으로 오랫동안 갔다 오려고 하는데 그 재물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청지기를 세 명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종을 세 명 불러서 그 자기의 재산을 일부씩 맡겼습니다. 너는 다섯 달란트, 너는 두 달란트, 너는 한 달란트, 금으로 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하니까 잘 실감이 안돼서 마음에 이 내용이 와 닿지 않습니다.
한국 돈으로 계산해 드릴게요. 15억 원, 6억 원, 3억 원입니다. 이제 마음에 와 닿지요.

대부분 한 달란트, 두 달란트 하면 내용이 파악이 안돼서 마음에 감동이 없어요. 그러니 주인이 그 종들을 얼마나 신임했겠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에 15억 원, 6억 원, 3억 원-금 한 달란트가 3억 원 정도 된다고 평가가 되는데요-이렇게 맡기고 갔단 말입니다.
문제는 그 종들이 각각 자기의 사정에 따라서 그것을 잘 불려서 이것은 주인의 것이고 나는 일하는 사람이니까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 드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이 타국에 갔다가 일정한 기간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갑자기 돌아온 겁니다.
그랬더니 다섯 달란트 맡은 자가 주인이 돌아온 것을 알고 자기가 한 모든 것을 계산해서 그 돈을 주인 앞에 갖고 왔습니다.
“주인님 내가 다섯 달란트-15억 원을 받았는데 두 배로 열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이 너무 기뻐하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네게 더 큰 것을 맡기리라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리로다“
15억 원이나 되는 돈으로 30억 원을 만들어 왔더니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얼마나 큰 사람입니까?

이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와서 얘기했습니다. 똑같이 제가 잘 해서 두 배로 만들어서 두 달란트 더해서 네 달란트 가지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달란트 가지고 열 달란트 만든 사람이나 두 달란트 가지고 두 달란트 더해서 네 달란트 만들어 온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더 큰 일을 맡기기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리로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기대가 되는데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이 오더니 뭐라고 얘기 하냐면 대뜸 말하기를 “주인이여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알았나이다 나는 주인이 두려워서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도로 다 받으셨나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말과 좀 다르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은 주인에게 기쁜 마음으로 왔는데 이 사람은 다짜고짜 오늘 문맥대로 그대로 얘기하면 주인을 비난하는 거란 말입니다.
자신이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자신의 과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당신은 심지 않고 거두고 당신은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이라 나는 당신이 두려워서 잘 못해서 이 돈 가지고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땅에 파묻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당신 것 고대로 손해 안보고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잘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얘기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뭐라고 얘기했냐하면 “그러면 네가 마땅히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주었다가 돌아왔을 때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라” 그리고 그에게 한 달란트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풍부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있으리라” 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주인으로서는 상당히 마음이 안 좋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가 제대로 일을 못한 것만 해도 정말 좋지 않은데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주인을 공격하고 또 주인에 대해서 이렇게 악하게 평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잘못을 감추려고했던 겁니다. 주인은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서 열 달란트 있는 자에게 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여기서 이 말씀을 듣고 ‘아, 기쁘다. 나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자야.’ 그래서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겠습니까? 가슴이 서늘해지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제가 보니까 후자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생각할 때 늘 부족한 마음을 가지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오히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주인을 비난하므로 잘못을 전가하는 핑계하는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이다." 얘기하면 한 달란트 맡은 사람보다는 더 낳은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에 해당 될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도대체 주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위협이나 협박의 요소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째 원인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이런 평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도록 각각의 종들은 생각하고 행동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칭찬과 책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칭찬을 받는 종들, 주인이 맡겨주심을 신뢰와 감사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인이 귀찮아서 혹은 다른데 맡길 데가 없어서 맡긴 것이 아니라 '나에게 기대해서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주인이 나를 인정해 주신거야.' 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회를 주심은 우리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 기대는 과정에 대한 기대이며 결과에 대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기대한다는 것은 과정에 충실할 것도 기대하고 결과도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기회를 맡겨주실 때 과정에도 충실하고 결과로도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리라'
열매도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가 있으려면 그 과정도 충실해야 되거든요. 또 때로는 과정에 충실하면 또 특별히 어떤 비바람 불고 폭풍우 쳐서 그 열매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곧 다시 기회가 되면 그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낙과 됐다면 내년에 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여러분, 좋은 나무는 열매를 한 해 못 맺었더라도 다음해에는 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도 충실해집니다. 한 번에 충실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또 다시 기회 가지면 충실해요. 그런데 그것을 주인은 압니다. 나무 열매가 떨어져도 나무가 튼실하면 ‘아. 올해는 이런 사정이 있겠구나!’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과정도 충실하고 결과도 충실해야 됩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주인이 돌아와 책임을 물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주인의 모든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돌아왔을 때 내가 시간에 내어드려야 되지 않겠는가?

삶의 기회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한 번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그 기회를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고 혹은 중간에 어려워지거나 잘 안 된다 싶으면 미리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중간에 수많은 고비를 넘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없어서 그 일이 잘된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잘되는 겁니다. 세상에 어려움 없이 잘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찌 우리가 삶을 지내는데 낮과 밤이 교차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우리가 살아가는데 추움과 더위가 없겠습니까?
어찌 우리가 살아가는데 비와 눈이 없겠습니까?
모든 것 당연히 있는 건데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칭찬받은 사람들은 주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몰라도 주님께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 칭찬받고 싶어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는데 그 푯대는 부르심의 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열광의 면류관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책망 받는 종은 왜 책망을 받게 되었을까? 주인의 맡겨주심을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섭섭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다섯 달란트, 나는 한 달란트 맡겼나? 라는 마음이 섭섭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원래 게을렀을지도 모르구요.
삶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 연민에 빠진다는 것은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 번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참 어려운 생각이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맡겼는데 나는 한 달란트 밖에 못 받았어. 내 능력이 그렇게 밖에 안 되니까 그렇게 맡은 거야. 나에 대한 신뢰가 그것밖에 안 되니까 그렇게 맡은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번 기회에 정말 더 수고하고 애써서 내 능력과 나의 모든 성실성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지. 그 다음에 나도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모습은 달라졌을 겁니다.

더 나아가 볼까요?
'주인이 저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겼지만 내게는 한 달란트 가지고 일하라고 했는데 내가 한 달란트 가지고도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이상의 일을 할 것이라고 믿어서 나에게 그것 가지고 일해보라고 했을 수도 있으니 내가 정말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최대한을 이뤄보자. 주인에게 정말 기쁨을 드리자.' 라고 생각했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려운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이 결국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주인이 반드시 돌아와 책임을 물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의 변명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하는 사람이 있죠? 아주 정확히 말하면 잘못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하는 겁니다. '절대 잘못하면 안 돼.'라고 생각하면 잘못하지 않습니다. '잘못해도 돼.' 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내부적으로 뭔가 나름대로 대책이 있는 겁니다. 자기가 거기까지 생각할 줄 몰라도 그 심리적인 기저에는 그런 대책이 있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이 사람은 주인이 오자마자 그냥 즉각적으로 나온 게 뭐죠? 주인이여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고 거두고 헤치지 않고 모으는 자인 줄 압니다. 그리고 주인은 두려운 사람이라 나는 주인이 두려워서 잃어버릴까봐 파묻어두었습니다. 나름대로 즉각적으로 나오는 이와 같은 것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또 더욱이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주인의 책임이라고 돌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잘못하는 사람은 잘못하는 대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주인에게 책망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책망 받고 싶지 않았고 최소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식을 주는 자들에게 맡겨 이식이라도 남겼을 텐데 너는 어찌 그것도 못했느냐고 말합니다.
현상유지는 현상의 유지가 아니라 퇴보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어떻게 말씀 하실거예요.
“주님, 저는 작년이나 올해나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참 훌륭한 겁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우리 인사한 번 합시다.
“참 변함이 없으십니다.” 큰 욕이라고 했습니다.
변함없다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큰 욕입니다.
“성가대원들 작년하고 올해하고 참 변함이 없어요.” 그러면 욕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변화돼야 됩니다. 진보해야 됩니다.
진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올해 1년 우리의 믿음이 자랐는가?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이 이루어졌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의 차이는 뭡니까?
주인에 대한 파악을 잘한 것과 잘못한 겁니다.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언젠가 나에게 결과를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된다. 그리고 주인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제한되었다는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었습니다. 성실과 열정으로 인해서 열매를 맺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평가로 인해서 이루어진 결과는 뭘까요?

칭찬과 책망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결과는 뭐죠?
더 큰 기회의 부여와 기회의 박탈이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까 더 큰 일을 맡기리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는 "네 한 달란트 있는 것 열 달란트 있는 자에게 주어라" 라고 하면서 그를 쫓아내고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모든 일은 쌓여진 것의 결과입니다.
선을 쌓으면 선을 이루게 되고 진실과 충심을 쌓으면 시간이 지나면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의와 논리만으로 주님의 뜻을 무시하면 시간 지나면 결국 평가를 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평가의 때가 되면 우리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세 번째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오늘 제가 세 번째 말씀을 드릴 때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늘 생각해 봤잖습니까.
오늘은 특별히 세 번째, 이러한 삶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왜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왜 충실하게 됐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부실하여 책망을 받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속에 실제적으로 이와 같은 일들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애 보는데 나는 참 노력했는데 여러 가지 내 주변의 여건들이 피치 못할 사정이 일어나서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잘못한 것이라면 내가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잘못입니다. 그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니까 우린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너무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가슴 아프지만 잘하는 때도 있고 잘못하는 때도 있는 것이 우리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뭐 두말할 것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라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함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내 마음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내 마음 속에 일어나고 내가 뭔가 자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씩씩하게 했더니 어떤 결과가 탁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성령 충만이지요.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주여, 꼭 붙게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갑자기 성령이 충만해서 마음도 뜨겁고 너무나 충만해졌습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구나! 옳다. 그리고 이제 잤어요. 실컷 자다가 시험장에 갔더니 연필이 은혜를 받아서 답을 씁니까? 그럼 도대체 이 학생에게 성령 충만은 어떻게 올까요? 성령의 인도하심은 어떻게 올까요?

이 학생의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생전 책상에 앉지를 않아요. 책상에 앉으면 마음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학생이 갑자기 책상에 앉아요. 책을 보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고 책을 보기 싫어하는 학생인데 책이 좀 보고 싶어졌어요. 한 시간을 못 앉아 있던 학생이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하루 종일도 앉아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도저히 공부하는 게 너무너무 싫었던 학생이 좀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더니 점점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시험을 봐서 붙게 되면 이와 같은 정상적인 결과를 거쳐서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를 뭐라고 얘기하지요?
“야, 정말 쟤 너무나 바뀌어졌어. 너무나 달라졌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어. 성령 충만해졌어.”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기적적으로 어떤 특별한 경우에 우리들에게 나타나서 역사하는 일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있어요. 부인하면 안 됩니다.

또 한 가지 많은 경우는 우리 생활 속에 용해되어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받는다는 것을 두 가지 면에서 항상 생각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내 삶속에 역사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순절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이, 무서워서 기도만 하고 밖에도 못나갔던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담대해졌어요. 특별한 역사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뭔지 압니까? 그 사람이 잠시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랬다고요. 순교할 때까지 그랬단 말입니다.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의 살아있는 평생 동안 그랬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 충만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령 충만,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용해되어 그것이 꾸준히 우리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처럼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루어야 될까 하는 요소들을 오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다섯 가지만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요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인도하심은 생각 속에서 아이디어와 마음의 의지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그 생각을 이끌어가는 심적 의지에 의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 일단 우리 마음에 아이디어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다가도 생각이 들고, 걸어가다가도 생각이 들고, 대화하다가도 생각이 들고, 어느 날 문득 번뜩이는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어떤 일을 하다가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한 줄기를 붙잡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추진하고자 하는 마음의 의지가 생긴단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은 없어도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감격과 감사의 감동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주심을 우리는 마음속에 간구하며 그 아이디어를 받도록 애써야 합니다.
누구나 삶이 그렇겠지만 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도하다가도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도 아무데나 적어놔야 종이 같은 데에 주보에다가도 적어놓고 그래서 제가 여기 기도하는 책상에 종이를 흰 것 갖다 놓고 거기에 생각나면 얼른 적고 기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안 적어두면 나중에 그런 생각이 있었던가 하고 까맣게 잊어버리더라고요.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차타고 가다가도 생각나면 어디든지 메모라도 해놔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차에는 언제든지 메모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 되면 전화기에다가 녹음이라도 해놔야 됩니다. 그렇게 안 해놓으면 까맣게 잊어버리더라고요. 그런 생각 있었나?

제가 보니까 아이디어도 성실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냥 한 줄기 스치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쉽게 놓치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서 무엇인가 그것을 가지고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와 같은 아이디어가 우리에게 떠올랐을 때 그것을 어떻게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의지더라고요.
우리들이 어떤 일을 이루는데 그냥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려움이 반드시 있습니다.
문제는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여 결국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가느냐 하는 겁니다.
마음의 의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는, 이와 같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는 종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이디어를 주시고 내 마음에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항상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시간과 시각이 이루는 삶의 현황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이끌어 가는가, 시간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가, 심각히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오늘 아침에 일어나셨는데 자다가 보니까 일어나시는 시간에 일어나셨습니까? 아니면 몇 시에 일어나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일어나십니까?
우리는 자다가 실컷 자고 ‘아, 깨볼까?’ 하고 깨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 오늘 몇 시에 출근해야 돼. 그럼 나는 몇 시에 일어나야 돼. 누구 만나야 돼. 어디 가야 돼.’ 그래서 우리는 거기 시간에 따라서 움직이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내가 시간을 관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시간이 나를 관리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닙니까? 시간과 그 시간이 가리키는 시각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20대에 해야 될 일을 20대에 못하고 30대로 넘어가면 10배의 수고를 해도 그 결과를 이루기가 어려워집니다. 30대에 해야 될 일을 못하고 40대로 넘어가면 40대에 10배로 수고해도 30대 때 이뤘어야 될 일을 이루기가 힘들어요.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그때 그것 하고 넘어가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못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어려움을 겪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되냐 하면 하기 싫은 일, 힘든 일, 어려운 일, 뒤로 미루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하셔야 됩니다.
‘이것 정말 하기 싫다. 힘들다. 어렵다. 뒤로 미루고 싶다.’ 이런 일은 절대 미루면 안 되고 그 자리에서 끝내고 넘어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의지에서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시간이 됐는데 내가 피곤해요. 나 더 자고 싶다. 그래서 더 잘 수 있습니까? 출근해야 되면 일어나야 됩니다. 시간되면. 그리고 내 마음의 의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대해서 움직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디 갈 때 마음 조급하게 늦게 출발하면 사고 날 확률이 많잖아요. 신호도 위반해야 되고, 다른 차 빨리 추월해서 가려하고, 사고 날 확률이 많잖아요.
조금 빨리 나가면 우리 그렇게 생각하죠?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신호도 잘 지키고 다른 차가 빨리 가려고 하면 비켜주기도 하고 나 시간이 좀 넉넉해.
우리가 시간을 넉넉히 확보하고 그 시간에 해야 될 일을 하고 이와 같은 일들이 있을 때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접근하기에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을 봅니다.

세 번째, 우리 육신의 건강과 주어진, 혹은 훈련된 강건의 상태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그 시각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육신적인 상태에 따라서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께 정말 감사해요. 어제 우리 이 많은 교역자들과 저녁을 먹는데 그 중에 교역자 한 분이 그래요. “목사님, 작년에 목사님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는데 올해는 교역자들이 모여서 목사님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번도 안 했습니다. 목사님 올해 한 번도 안 아프셨어요?” 그러기에 제가 굉장히 기쁘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기뻤습니다. 교역자들이 제가 건강해서 건강 때문에 모여서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올해는.
굉장히 기뻤습니다.

제가 17년 동안 그렇게 어디 출타할 일이 있어서 출타한 것 외에는 제가 몸이 특별히 어려워서 제가 17년 동안 설교를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성도님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역시 건강의 상태에 따라서 주어진 일을 이루는 결과가 다르더라고요. 원고를 아무리 잘 썼어도 (잘 쓰지도 않았지만)몸 상태가 안 좋으면 절대 설교를 잘 못하겠더라고요. 아니 글씨가 왔다갔다하고 어지러운데 어떻게 잘 하겠습니까? 성도들이 빙빙 돌아 보이는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르셨죠? 그런 때 있었습니다. 17년 동안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은혜 받았으면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주어진 시간이 딱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몸은 상태가 아주 안 좋고 준비는 안 됐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날까? 저는 생각하는데요, 그때는 준비 안하고 쉬어서 몸 상태를 낫게 하는 것이 더 낫더라고요. 제 경험으로는. 그렇던데요.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으면 기본적인 준비된 사실조차도 발휘를 못하겠더라고요.

여러분, 건강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아주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결국 우리가 건강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그 일을 해야 될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그 일에 참석도 못합니다. 그럼 준비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더라고요. 우리 건강이 좋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일을 해도 의욕도 없어지고 자신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육신의 강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힘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어진 건강도 있고 건강이 주어지지 못했다면 훈련된 건강이라도 우리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이제까지 쌓아 온 삶의 실력과 인간관계, 그리고 삶을 이끌어가는 습관과 원칙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룰 때 그 순간에 잘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마 피아노 반주하시는 집사님이 계실 텐데 오늘 연주를 잘 해서 아주 반주 잘 했다고 합시다. 오늘 잘 한 겁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여태까지 수십 년 동안 훈련받고 준비한 결과 그 기능이 습득되었기 때문에, 또 며칠 동안 연습했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 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실력은 그 순간의 실력이 아닙니다. 쌓여져 온 모든 것이 결집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두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해도, 아니 똑같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얘기를 해도, 똑같은 말을 읽었어요. 이 사람이 한 말과 이 사람이 한 말이 똑같을까요? 전혀 다릅니다.
이 사람이 그 말을 읽으면 뭐라고 얘기 하냐면 ‘아, 정말 그래!’ 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말을 읽으면 전혀 코웃음 쳐요. 왜 그러죠? 이 사람의 삶의 경력과 삶의 모든 살아온 이력들이 그 말을 받침해주는 것과 전혀 받침하지 못하는 것과 그 사람의 음성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니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마음속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정말 정직하게 사십시오.”라고 얘기하면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우리보고 “정직하게 사십시오.”하면 ‘너나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이제까지 쌓아 온 삶의 실력과 인간관계,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말 신뢰를 얻고, 약속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믿음을 쌓아갔다면 우리는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한 번도 안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그래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 중에 한 번도 안 넘어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넘어지고, 어려움 겪고,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삶 가운데 믿음과 신뢰를 쌓았던 사람은 기회를 다시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약속을 지켜야 되는지 압니까? 약속을 지킬 때 많은 어려움과 피해가 우리에게 올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피해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약속을 지켰을 때 다음에 어려웠을 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킴이라는 것은 투자입니다. 내 삶에 대한 투자입니다. 하나님께 살아감에 있어서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그 약속을 지키고,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내가 그 일을 하고, 사람에게 신뢰와 믿음을 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투자는 없거든요.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모든 이력을 통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쌓아가는 이와 같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내 삶이 과거에 그러지 못했나? 그럼 이제 끝났잖아. 내 인생을 어떻게 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내가 쌓아왔다고 지금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전에 내가 쌓은 것이 없다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터라도 쌓아 가면 됩니다. 내가 아무리 쌓아 놨어도 지금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끊임없이 받아야 됩니다. 과거에 성령 충만했다고 지금도 성령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끊임없이 또 가고 또 가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마음에 일어나는 섭섭함이나 분노의 극복입니다.
때로는 삶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좋은 부모, 좋은 여건 만나서 그는 모든 것을 누렸고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어.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해. 불공평해.’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소년과 선진국에서 태어난 소년이 똑같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가 있겠느냐? 다를 수 있겠지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다 더 큰 틀에서 바라봅시다.
우리가 자연계의 구조를 보면 먹이사슬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맹수가 있고, 맹수보다 약한 짐승이 있고, 그 다음에 육식동물, 초식동물, 다음에 나무, 풀 이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먹이 사슬의 제일 하위구조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죠?
번식력도 강하고, 종족보존의 능력도 강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먹이사슬구조의 상위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맨 하위권에 있는 겁니다.
풀들을 볼까요? 제일 힘이 없습니다. 그저 실컷 열심히 자랐는데 남들이 와서 뜯어먹으면 그냥 뜯어 먹히는 겁니다. 아무것도 방어능력이 없어요. 그렇지만 풀은 뜯어 먹히면 또 자랍니다. 그 풀을 뜯어먹던 동물들은 그것보다 강한 동물에게 먹히고, 여러분 맹수가 오래 사는 것 봤습니까? 맹수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장 하위에 있는 부분들이 더 강한 겁니다. 이런 것 보면 참 공평합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 돌멩이, 흙 이런 것들이 더 튼튼하지 않습니까? 더 유구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참 공평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화려한 꽃은 오래가지 못하잖아요. 화려한 꽃은 오래 갈수 없습니다. 색깔이 짙은 것은 오래 못갑니다. 우리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 공평한 겁니다. 오히려 못하다고 생각하는, 요즘 사회도 풍선효과, 풍선효과,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도 부족한 면이 있다면 반드시 다른 면에 훌륭한 면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떤 것을 받았을까 생각하면 우리는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 섭섭함, 그 섭섭함에서 오는 분노, 이와 같은 것들을 극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실한 자의 삶의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회를 못 부여받아서 참 나쁘다.’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 인생은 너무 서글퍼지는 겁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 추락하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불공평이나 섭섭함의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달려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겁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이번에 한 달란트 받았지만 다음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는 자가 되도록 인정받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거나, ‘내가 한 달란트 받았지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보다 더 많이 주인을 기쁘게 해 드려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아무리 결과가 안 좋아도 그가 최소한의 과정의 노력을 했다면 주인은 그것을 잘 파악합니다. 주인이 얼마나 큰 사람입니까?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요.
30층 꼭대기에 올라가서 한 번 보세요. 아래 있는 사람의 키 차이가 나는가?
여러분,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10원과 20원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있지요.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보니까.
여러분, 땅바닥에 10원 떨어져 봐요. 안줍죠?
20원 떨어져 봐요. 똑같이 안 주워요. 왜죠? 요새같이 화폐가치가 없는 때에 그거 주워봐야 손에 흙 묻히고 비누로 씻고 더 수고만 더 많다.
이 개념은 뭐죠? 적다, 많다의 개념입니다.
주인이 보기에 우리는 별 큰 차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도 큰 차이가 없고 우리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이제 내년에 표어를 생각한 것 중에 세 가지 표어를 정하잖아요.
<열정과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서자.>
이런 제목 하나 정해 놓았습니다.
정말 열정과 노력으로 우리의 재능을 넘어서자.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우리가 부여받은 여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열정을 가지고 넘어설 수 있다고 믿고 달려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내 삶은 내가 받은 재능으로 고정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서글퍼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우리 성도님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를 바라보고 기대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심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한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받았건,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내 재능 여하에 내가 좌우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가 받은 달란트를 생각할 때 그 숫자의 규모로 파악하지 마시고 주인의 마음으로 파악하셔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귀한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주의 영광을 이뤄 주님 앞에 칭찬을 받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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