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문화 (사 43:1~7)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하나님의 문화 (사 43:1~7)

어제 어느 신문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영국의 어부 로버트 데이비스 라는 사람이 바다에서 철갑상어를 잡았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그 까닭이 재미있습니다. 그걸 잡자 경찰들이 달려와서 이것 저것 묻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렀는데 이유인즉 영국 바다에서 잡힌 고래나 상어는 법으로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이 아니 되는 소리입니다. 머리는 왕의 것이고 꼬리는 여왕의 것이라고 하는데 마치 농담인 것 같지만 이것은 현재에도 유효한 영국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영국에는 현대 법이라는 도무지 믿기 힘든 법들이 제법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표에 사람 얼굴을 넣는 경우가 있는데 영국의 왕이나 여왕의 얼굴을 넣은 우표를 거꾸로 붙이면 반역행위라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성탄절에는 민스파이라고 불리는 다진 고기를 넣은 파이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고 아주 재미있는 것은 임산부는 어디든지 소변을 볼 수 있는데 심지어 경찰관 헬멧에도 소변을 볼 수 있다고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황당한 법이 제법 있습니다. 소개된 것들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는 물고기에 술을 줘서 술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 엄연한 법으로 정해져 있고, 프랑스에서는 돼지 이름을 나폴레옹이라고 짓는 것이 불법이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장례식과 병원에 문병갈 때 이외에는 항상 웃어야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있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법이 있는데 스위스 법에는 10시 이후에 남자들은 서서 소변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법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마치 하나의 코미디처럼 우습게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잘 알 것은 그런 법들이 그곳에서는 한때 법으로 정해질 만큼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다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부류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문화였기 때문에 법으로 정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911 사태로 말미암아 아프간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문화의 문제였습니다. 미국은 911사태의 범인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그를 범인으로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빨리 그를 내줘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거절하였습니다. 참으로 겁이 없는 행동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은 봉변을 당할 까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권이 바뀌었고 나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들이 뻔히 알고 있음에도 거절한 이유 중 하나가 문화문제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이해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탈레반이었습니다. 이 탈레반은 주로 파슈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파슈튼 족은 외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한다는 것을 아주 중시합니다. 파슈튼 족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행동규범 중 하나가 도망자에게는 무조건적으로 피난처를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네들 구역으로 피신해온 사람이라면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보호한다는 것이 그들의 행동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한다는 규범이 있습니다. 1980년대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일인데 살인을 한 사람이 파슈튼족 마을로 도망갔습니다. 추격한 경찰이 마을 족장에게 그 범인을 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족장은 거절한 뿐만 아니라 대항하였습니다. 경찰에게 대항하다 사살된 일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다릅니다. 어떤 문화는 우리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와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때로는 연령에 따라 나이 많은 사람들의 문화가 있고 젊은 사람들의 문화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의 문화가 있듯 하나님의 나라에도 하나님의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지역에 따라 사람의 문화가 다르듯이 하나님의 문화도 세상 사람의 문화와 다릅니다. 우리가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사람사이에도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듯이 하나님의 문화와 우리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지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에 사람이 필요해서 주인이 일꾼들을 찾으러 노동시장에 나가 사람을 찾아 계약을 했습니다. 이들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계약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일손이 모자라 점심때쯤 다시 나가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러다 또 일손이 모자라 오후 세 시에 나가 다시 사람을 구해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후 세시에 일한 사람이나 아침 아홉시에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아침 9시에 온 사람이 억울하여 항변했지만 주인은 이것이 이곳의 법이고 자기 농장에서 임금을 주는 문화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생각과 관념으로 세상에서 계산하는 품값 계산 방식과 다를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산하시는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요구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문화는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늘나라의 규범이고 하늘나라 문화양식입니다. 세상의 문화양식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런 문화를 가져야 하고 이런 삶의 길, 방식을 가져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몇 가지 예를 듭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씨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현대는 영적인 이스라엘 또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씨름해서는 성공할 수 없고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우습지만 하나님과 씨름해야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학문이든지, 기업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문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험악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온갖 재주를 부리고 온갖 방법을 다 쓰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옛날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겼는가? 모세가 손을 들어서 이기지 않았는가?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른 방식이 아니라 기도해야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해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침을 뱉지 못하게 정했듯이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방법, 성취하는 방법으로 그것으로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크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없어도 있는 척하고 잘난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고, 자기 몸값을 부풀리려고 하는데 바보처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크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으뜸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을 다치거나 이를 다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눈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 이기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뺨 한 대 맞으면 정말로 힘듭니다. 아주 속상합니다. 나이가 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쪽 뺨 마저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대 맞았다고 세대 때린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처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입니다. 속옷을 가져가려면 겉옷까지 내주어라 억지로 오리로 가고자 하면 십리를 태워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문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알 때도 있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단지 이해하려고 애쓸 뿐입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문화를 그렇게 정해놓으셨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다른 까닭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도를 닦고 싶은 사람이 길을 떠났습니다. 가던 중 천사를 만나 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정색을 하면서 수도자에게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줄 텐데 당신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수도자는 자기는 수도를 떠났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둘이 함께 길을 가다 아주 가난한 어촌에 도착합니다. 어촌 전 마을에 배가 몇 척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까닭없이 배를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수도자는 너무 너무 화가 나서 천사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항의하자 “내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줄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를 물었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또 다시 길을 갑니다. 가다가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까닭없이 청년을 죽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너무 화가 나서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이러실 분이 아니라고 대들었습니다. 천사는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당신에게 보여줄 뿐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또 길을 갑니다. 이교도 마을이 있습니다. 이교도 마을의 성벽이 다 허물어져 가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이교도가 보기 싫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했는데 천사가 나서서 성벽을 아주 멋지게 다시 쌓아주는 것입니다. 화가 난 수도자는 당신은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천사는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어촌에 있는 배 몇 척을 바다에 빠뜨린 것은 저 멀리에서 잔인무도한 해적들이 이 어촌에 있는 고깃배를 빼앗으려고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고깃배를 바다에 빠뜨리지 않았다면 해적들은 이 마을에 와서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여자들은 다 농락하고 배까지 빼앗아갈 것입니다. 당신 말대로 내가 배를 바다에 빠뜨리지 않고 해적들이 와서 이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고 농락한 후 배까지 빼앗아가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배는 바다에 빠뜨려졌지만 사람들이 살고 평화를 유지하고 또 다시 삶의 길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까?

내가 그 젊은 청년을 죽인 까닭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청년이 착하고 순진하게 보이지만 얼마 있으면 저 청년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 말대로 저 청년을 살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한 사람 청년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교도의 성벽 안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어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은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교도들은 서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연후에 이교도들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또 서로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교도들도 많이 죽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없이 죽을 것입니다. 당신 말대로 그렇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살상을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성벽이 쌓아져서 평안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내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당신에게 보여주었는데 당신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도를 더 가르쳐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가? 아닌가? 이것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문화인가 아니면 인간의 문화인가 이것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인간의 문화는 바뀝니다. 인간의 법은 바뀝니다. 인간의 행동양태, 생활양태는 자꾸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문화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수천 년 앞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또 다른 아주 중요한 특별한 문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문화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3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밖에서 구명줄을 던져 주시면서 구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겁을 내지 아니하시고 불길에 뛰어 들어와서 우리를 챙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다시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난로도 변변치 않던 터라 추위에 떨면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저녁을 준비하시느라 분주하셨고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는 추위에 떨고 있는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저를 안아주신 아버지의 몸이 불덩이 같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몸이 워낙 찼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세월이 지나 제가 그 나이가 넘고 나니 어쩌면 그때 우리 아버님은 아들의 추운 몸을 녹이시기 때문에 하나도 차게 느끼시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불길에서 하나님이 대신 타면서도 뜨거운 줄 모르고 당신이 물속에 잠겨서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몸을 덮는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처럼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문화입니다. 우리를 챙기시는 당신의 문화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러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절절하게 느껴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지 길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어서 내 아들, 딸을 내어줄 경우라면 다른 사람을 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통곡할 일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화입니다.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문화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너는 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런 각별한 사랑으로 챙겨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대신 내어줄 다른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당신을 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보면서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몸을 벗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아십니까? 인도, 캄보디아나 이디오피아 같은 나라에 가서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말립니다. 냄새도 심하고 머리에 이가 많아 이가 올라오면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끼리도 냄새가 조금 난다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늘의 몸을 벗고 이 땅에 오신 일은 대단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아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욕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수치 당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입니다. 내가 받기에도 우리가 받기에도 분에 넘치기 때문에 받을 수 없는 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 아들, 딸들을 향한 나의 사랑, 나의 문화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렇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 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주셨다면 어떤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모든 일을 다 챙겨주실 것입니다. 개인 일이나 가정 일, 사회 일이나 국가적인 재앙이 있을 때도 우주적인 재앙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챙기실 것입니다. 끝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연세 드신 분들은 자녀들에 대하여 이런 안타까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두 30년 40년 먼저 가게 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 인간의 한계로 다 챙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함께 챙겨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챙겨주신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때로는 훈련이나 징계 때문에 잠시 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 모든 것을 회복하고 아주 멋진 모습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신 그 말씀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아들과 딸들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께서 내가 지명하여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자신 있게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잘 해야 하고 선해야합니다. 좋은 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 문제이고 먼저 필요한 것은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이것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좋아하십니다. 잘하든 못하든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물속에서도 불속에서도 지켜주십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함께 하면서 지켜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문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