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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 있는 언어(言語)들 (창 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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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언어(言語)들 (창 3:1~24)

우리나라 말은 주어가 나오면 바로 뒤에 서술어가 나오는 영어와 불어에 비해서 어순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은 주어 뒤에 이어서 바로 서술어가 나오지 않고 서술어는 문장의 맨 끝에 자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장이 끝나봐야 그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어(S),목적어(O),서술어(V), 이른바 S, O, V의 구조라고 합니다. 서구의 언어들은 주어(S), 서술어(V), 목적어(O)의 S,V,O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는 이러한 언어 구조와 무관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의 사람들과 다르게 대화의 주된 목적을 미리 말하지 아니하고 화두는 전혀 다른 것으로 엮어 갑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우회적으로 자신이 하고자하는 대화의 주된 목적을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 대화로는 상대방의 목적을 알아내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연의 소리와 짐승의 소리를 포함한 수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언어(言語)는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그 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탄의 말과 인간들의 각각 다른 사상의 언어들입니다.
사탄의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 구조인 S,O,V구조를 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말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에게 미혹되어 끝까지 들어주면 이미 당한 뒤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구적 언어 구조를 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은 처음에는 잘 알 수없는 우회적 방법을 동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었습니다. 그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나무와 각종 실과는 임의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해서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엄격한 규범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지으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내어서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이제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21세기 생명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영역에 도전해 오는 이 시대는 무슨 동산인가? 과학 동산인가? 아니면 우주 동산인가?
제 2아담 예수를 만나지 못하여 아직 중생 받지 못한 인간들의 삶의 무대는 여전히 에덴동산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은 여전히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에덴동산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Ⅰ. 사탄(뱀)의 언어(言語)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사탄의 이용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이 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1) 하나님의 절대권위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본문 3장 1절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권위에 도전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사탄은 아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이 사탄의 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판적인 도전을 중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 의심의 말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무시하는 거짓말을 합니다.
본문 3장 4-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당돌하고 파렴치한 사탄의 말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해 버립니다. 이 세상의 각양 다양한 부류와 직종의 사람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의심의 말과 거짓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인간을 자기에게 매여 살게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16절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5절에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인하고 속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먹이를 찾듯이 쫓아다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Ⅱ. 인간의 언어(言語)가 있습니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였습니다. 결국 하와는 그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와는 사탄의 이용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타락한 인간의 소리입니다.
1) 하나님의 법을 파괴시키는 말입니다.
본문 3장 6절에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타락한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탄에 의해 점령당한 심령은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쾌락을 동기와 목적으로 삼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쾌락주의는 도덕의 기초와 목적을 도덕율로 삼고 있습니다. 쾌락주의자는 심리적 사실보다 실천이성을 앞세우고 도덕은 이러한 실천이성의 공정(公正)한 원리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2) 죄벌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리입니다.
본문 3장 10절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말입니다. 지구촌에 사는 백성들은 한결같이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쾌락을 지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육체주의의 마지막 후회입니다.
쾌락을 목적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추구하다보면 인간은 곤고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체의 쾌락을 포기하게 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즐거움마저 포기하게 되는 엽기적인 염세주의자들이 됩니다.

3)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인한 책임을 피하는 말입니다.
본문 3장 11-12절에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여자는 또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현주소입니다. 자기 자신의 못된 행동에 대하여 그것을 남에게 전가시키려 하는, 책임지기를 싫어하면서 도피적인 자세가 오늘의 인간들의 한계상황입니다.
이기주의에 존재하는 것은 자아뿐입니다. 자아 이외에는 인식 불가능한 것이 이기주의입니다. 타인의 자아의 행복에 공헌하려는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자아 자신이 모든 인간행위의 목적이 되고 자아를 떠난 것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Ⅲ.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 사람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3장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본문 3장 9절에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소리에 침노를 당하여 불안과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아담을 찾아 오셨습니다. 벌거벗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숨어서 떨고 있는 인간을 찾아 오셨습니다. 과학문명의 눈부신 치마를 엮어 입지만 여전히 불안한 인간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음식물로 미각의 윤기 있는 치마를 엮어 입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인간을 찾아 오셨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히 11:8).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 24:16).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삼상 3:10).
하나님은 우리를 태에서 부르셨습니다(사 49:1).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막 2:17).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막 6:7).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오셨습니다(눅 19:1-10).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2).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 5:13). 우리는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 3:15).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십니다(눅 15:4-6).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 너를 부르신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찬 256).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찬 324)
첨단 과학문명이 하나님의 영역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고 우주공학, 생명공학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는 의지와 자신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인간들은 공포탈강과 안정안전의 본능적 욕구에 불만을 가지고 이것을 해결해 줄 정치적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 여러 색깔의 치마를 엮어 입고 불안에 떨면서 숨어 있는 오늘의 에덴동산의 인간을 찾아 오셨습니다.

2) 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3장 11절에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했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수고와 고통이 따르고 결국 사망이 온다고 하였습니다(창 3:16-19).

3) 구원 곧 은총의 말씀입니다.
본문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가리움을 받는다는 묵시적인 교훈입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4-5절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4장 4절에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7장 14절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6장 15절에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은 오늘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운동에 도전합니다. 과학지상주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설교에 대해서 부정과 불만의 씨를 뿌립니다. 설교를 아예 무시해 버리도록 하는가 하면 설교를 취미로, 듣게도 하고. 설교를 그냥 즐기도록 합니다. 사탄은 이런 자들을 교회 중직에 앉게 하고 결국 교회를 넘어지게 만듭니다.
설교는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파괴시키고 본능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극에 달한 쾌락주의, 살인적인 이기주의가 마침내 공유의 비극으로 이 사회에 악이 되게 합니다.

인간은 이기주의에 익숙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죄 중에 태어나고 모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는 자아만이 사색의 철저한 대상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의무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권리는 다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타락한 에덴동산에 사는 우리에게 원시 에덴동산 밖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자기 백성을 나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인간이 죄악의 동산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책임을 물어 예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의 음성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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