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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 받아 역사를 만들자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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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 받아 역사를 만들자 (고전 2:1-5)

지난 주 금요일에 전 집사님의 장남인 현호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들, 수고했지.  뭐 좀 먹을래?"
그런데 현호가 아주 심각하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엄마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 물어볼게 있어요."
"내 아들이 뭐가 궁금할까?"
현호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미술가가 좋아요? 아니면 음악가가 좋아요?"
우리 전 집사님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현호에게 대답을 했답니다.
"엄마는 다 좋은걸∼"
엄마의 말에 현호가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정말이에요?"하더니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서 엄마에게 보여드렸습니다.
보니까 현호의 성적표였습니다.
"미술 : 가", "음악 : 가"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이루고자 하는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기회에 헌신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꿈을 꾸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꿈이 나에게 역사하지 않으면 두려움과 번민과 염려와 걱정과 같은 하찮은 것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회에 헌신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셔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꿈을 꾸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땅에는 흑암의 권세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분 오열시키는 일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모든 언론들과 지성인들이 사분 오열되고 있습니다.  도성이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외쳐야 됩니다.  지금은 보배를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을 가진 사람들은 빛이 납니다.  오늘 우리는 "달리다굼!  일어나라" 하고 외쳐야 됩니다.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날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새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상황에 굴복한 사람과 상황을 극복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에 굴복 당하지 말고 상황을 극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부도 하고, 교양도 갖추고 돈도 벌고, 매일 열심히 애를 쓰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밀 듯 밀려오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내 속에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보배를 담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기쁨이고 감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꿈을 꾸십시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꿈이 없는 곳에는 하찮은 것들이 판을 칩니다.  인간의 조직도 매한가지입니다.  위대한 헌신된 꿈을 붙든 사람이 없으면 하찮은 사람들이 판을 쳐서 아무 일을 못합니다.  이것은 나라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하나님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꿈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꿈을 가진 사람을 헐뜯고 무너뜨리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무서운 헌신의 꿈을 꾸며 앞으로 달려가십시오.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을 바라며 내가 속한 단체나 조직에서 제일 헌신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내 삶에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가를 한 번 체크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목표가 아니고, 믿음의 기초입니다.  모든 믿음의 기본이요, 기초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정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헌신이 없는 곳에는 기적도 없습니다.  참여 없이는 헌신도 없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헌신의 수준을 높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일반적으로 회사든지 어느 단체이든지 잘난 사람을 선택합니다.  제대로 좀 배우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씁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을 씁니다.  훌륭하고 잘생긴 사람을 씁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잘난 사람만 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같이 못나고, 못 생기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 지혜 있고, 영향력 있고,, 높은 신분의 사람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적인 가치로 보았을 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위인과 영웅들이 있었고,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에도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위인들과 성경에 기록된 위인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잘난 사람을 불러서 '야, 그 사람 참 잘났다'라는 감탄의 역사가 아닙니다.  못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하시는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역사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한 번도 제가 잘나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목사라도 시켜 놓아야 새벽기도도 드리고,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생활 제대로 할 것 같으니까 목사를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여 쓰실 때에 능력 순이 아니라 못난 순서대로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잘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못나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 이전에를 보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드러낼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아주 대단한 것 같지만 그들도 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보십시오.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냅니다.  갈멜산에서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합니다.  재단에 불을 내리게 합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땅에 비가 오게 합니다.  더구나 그는 불수레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엄청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면 그들도 약하여 넘어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합니다.  때로는 공포에 떠는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대단한 사람에게만 신경 쓰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 약하여 넘어지는 사람,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런 우리들을 불러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대사도 바울을 이토록 두렵게 하고 약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바울을 괴롭히던 육신의 질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외모적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말이 어눌해서 미리 겁을 먹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돕는 교인들이 모자라서 고독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가 쓸데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당당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대답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의 전도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헬라 철학의 본거지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바울의 학문적 끼가 발동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당대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의 철학적인 학문의 깊이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으로 논쟁을 하기도 하고 변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곳에서 전도는 완전히 실패를 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말은 참 그럴 듯하게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껏 자신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는 교회를 세우기는커녕 예수 믿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모진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도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철학적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십자가 초점을 잃은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철학, 경험을 의지하는 사이에 성령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실패한 원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를 합니까?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늘 넘어지고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지식이 모자라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경험이 부족해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이나 환경 때문에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돈이 힘인데 돈이 없어서 자신은 아무 일도 못한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돈이나 경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신앙생활을 성공적인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넉넉한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없으면 좀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편의 문제와 불행의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행복한 신앙생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환경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자신의 신학이나 환경을 의지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조건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일은 영적인 파워로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말도 필요 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나 말은 능력입니다.  복음전도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말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불신자를 전도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그들이 승복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달변이나 웅변이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이 없는 말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불신자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로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삶으로 그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십시오.  어떤 사람을 보면, 그가 하는 말은 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따르겠으며, 누가 그에게 감동을 먹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절에 이어 본문 4절에서도 똑같은 결심을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전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신앙생활에서 내 것을 들어내고 나를 자랑하면 실패합니다.  은혜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의는 무익합니다.  내 재주, 내 경험,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해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결단하십시다.  사도 바울처럼 포기하기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기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세상에서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기로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결단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강력한 무기는 무엇입니까?  복음 전도에서 가장 탁월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에서 '작정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복음전도에서 달변이나 설득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최종 결단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겠다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병이 낫겠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수님만 붙들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얻겠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고민을 하고 거룩한 수고를 하더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학은 깨끗이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자세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바울이 아덴에서의 전도에 실패를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피묻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굳었던 심령이 부서집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능력이다.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잘나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내가 의를 얻게 됩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그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오늘도 승리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으십시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십시오.  나에게는,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보십시오.  4절에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라는 말이 나오고, 5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위로부터 하늘의 능력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형벌 받게 될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란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유일한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진리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분은 죽었으나 사흘만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던 인생의 모든 가치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무릎꿇어 경배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누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안 믿고 싶어도 저절로 믿어집니다.  그때부터 지옥 가기는 영 걸렀습니다.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별것 아닌 설교 같았는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찡하더니 예수가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강퍅한 심령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표적이 나타나고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난 사람만 잘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못나고, 못생기고,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이룹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힐 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마른 막대기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혔을 때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속이 텅 빈 길거리에 내버려질 수밖에 없는 양각나팔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혔을 때에 300명의 기드온 군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인생은 반드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의 믿음이 있고 배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오직 십자가의 능력, 오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에 의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인 저는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회복의 능력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십자가의 능력이 회복하고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함께 새로운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이 주목하고, 교단이 주목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십시오.  회복과 치유의 능력을 맛보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오.  문제만 보면 문제가 보이고, 문제를 문제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보는 대신에 예수만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부족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내놓을만한 지위나 명예도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늘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별 볼일 없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부흥의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당신을 통해 비범한 신앙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당신을 통해 비범한 전도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당신을 통해 비범한 가문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당신을 통해 비범한 부흥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당신을 통해 비범한 교회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하늘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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