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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사랑은 이렇게 하라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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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은 이렇게 하라 (눅 10:25-37)

◈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인 의사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이방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예수님이 유대인들만의 주님이 아니라 온 세계 모든 민족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음.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알려주고...

오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떤 율법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을만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소위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골고루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행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똑똑한 율법 선생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정확하고 똑똑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눅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율법사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통한
이론을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율법사는 행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아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해라 고 했습니다.
이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이 아들은 싫습니다. 라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여러분 두 아들 다 마음에 안들지만 이 두 아들 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교회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면 행함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행할 때에 그 곳에서 나타납니다.

②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는 말씀에 이 율법사는 자기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찔리는 마음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영생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율법을 어긴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다시 보시겠습니다.
눅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사람의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물음에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한가지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다른 사람의 권면을 전혀 듣지 않고 아예 귀를 막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종류는 너무나도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귀가 얇은 사람들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자기가 너무 고지식해서 불만입니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줏대가 없어서 불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 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율법사는 남에게만 옳게 보이려고 하다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또 남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꼬투리를 잡고 비판을 하고 잘 안 되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율법사가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시는 일입니다.

③ 이웃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을 두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할 일이 바쁘다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레위인도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된다 하는 관념으로 그를 피해갔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다른 지방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길에 쓰러진 나그네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충격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 강도는 다 유대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유대인이 유대인 강도들을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길에 반쯤 죽은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제사장은 그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유대인을 돕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로 지나갔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을 돕는 한 레위인도 도움을 주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복장은 멀리서도 구별이 됩니다. 길에 누워있던 유대인은 그들이 자기를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길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가 사랑을 받아야 할 이웃,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사람이 누워있는 곳에 사마리아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 끝장났다. 체념하며 죽음을 기다리며 실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와서 전혀 뜻밖의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늘 멸시하고 천대하며 짐승취급하며 원수처럼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이 상상을 초월하여 사랑을 하는 것은 놀랄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36절).
이 질문에 대해 율법사는 분명하게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37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양심이 찔렸습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너도 이와 같이 이웃이 되라!
율법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누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이웃 사랑은 원수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명을 받는 기본적인 틀이 있습니다.
우선 자기 발견의 과정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신약 시대의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방탕하게 인생을 살고 있던 어거스틴은 어느 날 성경을 집어 읽었습니다. 그 구절이 로마서 13장 11-14절입니다.
(롬 13:11-14)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둠에 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나는 경찰서에 가출 신고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려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침 마당에 나와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실하게 서는 사람이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과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발견한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자기를 발견한 베드로에게 새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고기잡는 어부가 아니라 이제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를 발견한 어거스틴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겸손한 성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발견한 다음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한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만히 서서 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우선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1. 이웃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율법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행함이 없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 율법사는 율법박사라고 할 정도로 율법을 많이 알고 있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웃의 대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도 얼마나 이웃에 대하여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해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 차별합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이웃을 이용합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예의가 되고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작은 관심을 가지고라도 돌봐주어야 할 이웃은 없습니까?
불편한 이웃, 고민하는 이웃,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이웃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시작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실천은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것을 나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함께는 천국의 단어입니다.

2. 구체적인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한 마음을 먹고 있다 하더라도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마음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돌봐주었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33절- 어떤 사마리아 인은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이 불쌍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그에게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 그는 행동할 수 있는 발이 있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 그는 섬길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사랑은 아주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생이 아까와서/ 귀찮아서 사랑을 거절합니다.
사랑할 기회를 애써 외면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의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 이 사랑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 이 사랑을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 사람이 내 은혜를 알아줄 것인가?
따지지 않았습니다.
㉣ 자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을 감당한 사랑이었습니다.
㉤ 그 사랑은 무한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 받은 사람에게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기를 무시하고 욕하는 원수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까?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 저는 이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사랑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간절히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얼굴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인생의 눈물과 고통과 모든 질병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값도 없이 공짜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사장처럼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합시다 전도합시다. 외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품잡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는 현장에서 매일 일어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기도하시고 행동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진 너무 귀중한 예수님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나누시기 바랍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들리는 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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