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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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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네가 어디 있느냐?       
♠본 문: 창세기 3:1-10

어느덧 2007년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며 2008년 새해의 계획을 세우는 때입니다. 모두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자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늘 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위치 확인을 소홀히 하게 되면 열심히 살아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항해하는 선박들이 항해하는 도중 위치 확인을 소홀히 한 까닭에 암초에 부딪혀 파선하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탄 배가 북방 한계선을 넘은 것도 잊어버리고 고기 잡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북한에 억류된 안타까운 어부들도 있었습니다. 항공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비행기가 위치 확인을 잘못한 나머지 구소련 영공을 침범하여 소련 땅에 불시착한 경우가 있었고, 또한 수련군의 공격으로 민항기가 공중에서 폭파되어 수많은 생명을 잃은 참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선박이나 항공기들만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심한 마음으로 내 영혼의 위치를 점검하며 확인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건강한 삶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한 나를 날면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둘째, “내 나이 몇 살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 마지막 달 첫 주를 맞이한 이 시간에는 “네가 어디 있느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본능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무숲 속에 숨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길은 누구도, 무엇으로도, 그 어디에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9:1~12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지 못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육신이 숨어있는 위치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신앙의 위치 즉 나무숲 속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이류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어야할 위치는 에덴동산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예, 저희들이 여기 있습니다.”하고 달려 나가야할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낯을 차마 뵐 수 없어서 숲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귀하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되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질문은 아담과 하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질문입니다.“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사람들아 너희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에“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리 즉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위치에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사람의 위치를 떠나도록 했습니까? 창세기 2:16~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만 뱀이 유혹한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축출되어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고, 이 저주의 고난은 천추만대에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뱀이 미혹한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의 눈에 어떻게 보였기에 그들로 하여금 위치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까?

一. 먹음직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인 창세기 3장 6절에 기록하시기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했습니다. 이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6-17)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먹으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하게 보였습니다. 맛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따 먹었습니다. 먹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뱀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뵙기 죄송스러워 나무 사이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자자손손 저주를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선악과가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다. 즉 물질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물질로 하나님의 사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1년 동안 살아오면서 물질에 대하여 깨끗하게 살아왔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물질을 취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경고하기를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 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언 20:17)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뇌물 문제로 감옥에 가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원인은 취해서는 안 될 물질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기에 먹음직해 보였습니다. 먹으면 더 좋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훗날 입안의 모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듯 그들은 영광된 자리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권세 있고, 위엄있던 자리가 변하여 싸늘한 감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에 대해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7~10) 하셨습니다. 물질은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말로를 맞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사울이며,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입니다. 사울왕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자살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 역시 자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자살자가 되게 한 요인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먹음직스러운 물질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살진 소와 양에 눈이 어두워 그 짐승들을 살려놓았습니다. 이러한 사울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기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3) 라고 했습니다. 물욕으로 인해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은 그 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자 이방인의 칼에 죽을 수는 없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사울왕의 두 아들도 함께 전사하고 말았습니다(사무엘상 31:1~6). 그 후 사울의 가문은 몰락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12명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았습니다. 여기에 포함된 행운아가 가룟유다였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가 스스로 버림을 자초하여 저주의 상징인 자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먹음직스럽게 보았던 물질이었습니다. 물질을 대하는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기를“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한복음 12:6)고 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14~16에는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말로에 대해 기록하기를 “이 사람이(가룟 유다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사도행전 1:18)고 했습니다.

어린아이 도시락인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두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자 5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가 먹을 것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는 물질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러다가 처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7~10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욕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정해 놓으신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입니다. 소득의 1/10은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말라기 3:9~12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

참존 화장품 김광석 회장(장로)은 자서전“주가 쓰시겠다하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장로로서 지금 매월 수천만 원씩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십일조를 하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부자가 되고 싶으면 십일조부터 하라”는 대목에서“이제 갓 교회에 출석한 사람에게 무슨 십일조란 말인가. 그리고 이익이 남아야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적자투성이 회사를 운영하는데 무슨 십일조인가. 더구나  아직도 8억 3천만 원의 부채가 남아 있지 않은가(1970년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된다는 권면과, 십일조는 모자라지 않게 넉넉히 해야 된다는 말씀을 믿고, 실천한 결과 몇 십 년째 수천만 원씩 십의 2조를 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G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캔들러는 의지력이 약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선언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할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한다.”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 부부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 후로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술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캔들러는 그때부터 하나님께 수입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습니다. 코카콜라는 창업주의 금주와 십일조를 드린 후부터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 소유 추구의 삶입니다. 이는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이 삶은 아름답지 못하며후회를 남깁니다. 롯의 삶이 그렇고, 사울의 삶이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의 삶이 그렇습니다. 처참한 실패의 삷입니다.

둘째, 존재 추구의 삶입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삶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립니다. 후대가 길이 기억할 보람된 삶의 발자취를 남기에 됩니다.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사탄의 수법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6000년간 사용한 수법인데 사람들은 계속하여 미혹되기만 합니다. 연못의 붕어들은 언제나 지렁이만 보면 탐을 내어 그 먹이를 뭅니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그 지렁이를 즐겨 먹다가 죽어 가는 것을 보았을 터인데, 그래도 그 미끼에 끊임없이 미혹되고 있습니다. 물고기야 지능이 0.3이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사탄이 던지는 미끼 앞에 동일하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물질 앞에서 어떤 위치에 머물러 있습니까?


二. 보암직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 말씀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했습니다. 보암직하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좋고, 내가 저것을 갖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도 좋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곧 명예욕을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명예욕 까닭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명예욕에 눈이 어두우면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내가 그 뒤에 있어야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에서고 주님을 뒤에 세운 상태에서는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이라면 나는 어디에 있어도 상관이 없고, 나는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다.”라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명예욕이 가져오는 합병증 같은 무서운 증상들이 있습니다. 명예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절대로 진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거짓으로 포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예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의 심중에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은 명예를 얻은 사람을 시기하여 비방하게 됩니다. 흉을 보며 헐뜯습니다. 비방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명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의 특성은 교만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우위에 두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예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성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 북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한 수도사가 그 성자가 보고 싶어 북아프리카로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성자가 살고 있는 곳에 도착한 수도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소문난 성자는 바로 길가에서 구두를 수선하고 있는 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온 수도사는 그 노인에게 “성자가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게 손님들이 구두를 맡기고 갈 때 나는 예수님의 구두를 수선한다는 마음과 정성으로 일한 것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참된 명예는 언제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그 모습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더욱 높여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三. 지혜롭게 할 것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습니다. 지혜롭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의 심리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방법대로, 내 상식대로, 내 경험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올바른 방법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저녁때가 되면 매일 같은 길을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산책 도중 뱀 한 마리가 길가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팡이로 내리칠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냥 다른 길로 돌아서 갔습니다. 다음날 보니 또 같은 장소에서 그 뱀을 보았습니다. 사흘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지팡이로 힘껏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 빙글빙글 말려서 뱀과 같은 모양으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한 말이 “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믿는데 그 눈도 나를 속였습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 있는 데카르트의 이론이지만, 의심하는 것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 씨가 지난 7월 23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74세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그의 딸 이민아 변호사가 암과 시력장애 그리고 과잉행동장애로 고통 받던 외손주가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어령 씨는 말하기를 “지상의 언어가 헛되다는 것 50년 만에 깨달아.” “마음속 묻혀있던 영성 이제야 나왔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5)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편 111:1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나를 패망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이 주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는 숲속에 숨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부르신 것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1년간 우리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의 배를 타고 험한 세파를 헤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거울삼아 나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먹음직한 물질에 대해 나의 위치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암직한 명예에 대해 나의 위치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지혜로운 것 같은 내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 대해 나의 위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하는 사탄의 수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 또한 어제나 이 세가지의 유혹에 심히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를 잘 지키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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