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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 (요 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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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 (요 14:1-1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시점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날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찬을 드신 후에는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 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십니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즉시 말을 바꾸어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신 것은, 그들 가운데 주님을 팔 자가 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리 중에 주님을 팔 사람이 있다니, 그들은 심히 근심하며 각각 “주여, 내니이까?”(마 26:22)라고 물었습니다. 그러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가룟 유다는 일어나 어두운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체포할 장소와 때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가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불안에 떠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정작 위로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신데 오히려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얼마나 자비하신 주님이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머지않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며,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는 목적도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거할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요, 나중에 처소가 다 마련되면 주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믿는 자들을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로 어떻게 가신다는 것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가시는 목적지와 그리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도 그 길로 주님을 찾아가면 될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 둘 다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도마가 나서서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이며, 또 그리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상의 어느 도시를 찾아갈 때처럼 하나님께로 가는 데도 눈에 보이는 어떤 길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신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십니다. 그것도 많은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종교 다원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종교는 결국 다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나 회교나 기독교나 할 것 없이 모든 종교는 다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무슨 종교를 믿든지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지 않으냐? 남쪽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도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동쪽이나 서쪽으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올라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지 않으냐? 이와 같이 무슨 종교를 믿든지 다다르는 목적지는 같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과 구원 받는 것이 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무지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기독교 내에도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 목회자, 교인들 가운데 종교다원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이 같은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신 말씀은 오늘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교회생활을 오래 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올바로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처럼 이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전에 우리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이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될 때 그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만한 수준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은 “너희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그 영광을 보여주실 것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등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자리의 일부를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로서 하나님을 육안으로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하셨으니 지금 그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했던 것입니다. 그 때 빌립이 나서서 말하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모세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현현을 눈으로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처럼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 그 자체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고,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셨으며,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신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이 이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창조의 근본이신 성자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6절, 7절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릇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운 폭군으로 알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완고하고 엄격한 심판자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서 형성된 그릇된 하나님 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한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는 뜻입니다. 범죄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운명에 놓인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 뿐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우리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피조물을 신으로 섬겼던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죄인은 그 마음이 어두워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해타산에 좌우되는 편협한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4장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인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하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준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와 창기와 같은 자들은 죄인으로서 멸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들과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기피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은 그들만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받아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은 병들고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에게 완전히 점령당하여 도저히 개선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천대받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 귀신 들려 폐인이 되었던 사람이 그 심령이 치료받고 거룩하고 순결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그려진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믿음과 사랑과 희생이 충만한 성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상한 심령을 치료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던 여자,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을 긷는데도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이 아닌 뜨거운 정오에 우물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게 되었을 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왔습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는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왜곡되어서 여전히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상하고 병든 심령이 치료받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마음뿐 아니라 육신의 병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신 내용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으며,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몰래 다가와서 주님의 옷가에 손을 대자 즉시로 혈루 근원이 마르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시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신 것을 비난하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그를 믿는 자들의 질병을 고쳐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병든 생활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불의한 재물에 눈이 멀었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선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김익두 목사님은 본디 마을에서 소문난 깡패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도끼로 연대장 일가족을 죽인 고재봉도 교도소에서 전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사형을 당하기까지 무려 1800명이나 전도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이와 같은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은 인생들을 동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시지만 정작 이 땅에 오실 때는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으며, 예수님 역시 목수가 되셨습니다. 양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장남으로서 대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예수님에게는 남 형제가 네 사람에다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가족을 부양하시느라 쉴 틈이 없이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노동의 고달픔을 아시고,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의 고단함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뿐 입니까? 그토록 신뢰하던 제자에게 배반당하시는 쓰라린 경험도 하셨습니다. 죄도 없이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 쓰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생의 모든 쓴 맛을 다 경험하신 까닭은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장 18절에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였고, 4장 15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고초를 몸소 체험하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동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을 대하듯,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별 관심을 나타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으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성경적으로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엡 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치료하시며, 동정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 모두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심으로 날마다 영육 간에 생명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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