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옛 남편과 새 남편 (롬 7:1-13)

  • 잡초 잡초
  • 503
  • 0

첨부 1


옛 남편과 새 남편 (롬 7:1-13) dud

이 세상의 좋은 말을 다 함께 쌓아올린다 하더라고 "은혜" 라는 말보다 더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생명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 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은혜" 라는 말을 빼놓고서는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는 것도, 우리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하는 것도, 찬양대가 찬양을 하는 것도, 봉사자들이 각 부서에서 봉사를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를 주일날마다 강해하면서 저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젖어드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이 살았던 우리들,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은혜를 운운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은혜의 포로가 되어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과거에는 법만 따졌던 율법적인 사람이요 매사에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포로가 된 이후로는 입만 벌렸다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한 은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6:14절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소속에 대하여 분명히 말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은혜 아래에 있으며 따라서 은혜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저와 여러분들도 많은 갈등을 느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이 부분입니다. 마땅히 은혜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율법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매사에 법아래 매여서 살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자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민을 하였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본문을 통하여 명쾌하게 해결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 관계를 예로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옛 남편과 새 남편"이라고 정하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법아래 있습니까? 은혜 아래 있습니까?

누구든지 사람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학교에는 교칙이 있고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법을 어기면 거기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 즉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을 우리는 충실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러 가지 법을 솔선수범하여 지켜야 하지만 여기서는 세상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 아래서는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우리는 죄에게 억눌려 살 수밖에 없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 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하라"는 율법이 248가지고 "하지 말라"는 율법이 365가지 도합 613가지의 규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을 얽어매는 것이겠습니까? 이 많은 규정을 다 지키려고 하니까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으며 거기에 무슨 자유와 기쁨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라 하지 말라는 법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결과는 심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이러한 상태에서 살다보니 무엇하나 실수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긴장하고 여유가 없이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지옥 아니면 천국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 시절에는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지금도 실제로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만 보아도 지옥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 온 것이 전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금기사항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고 따라서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식으로 지금 살고 있지를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고민을 결혼 관계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십시오. 어느 집에 폭군 남편이 있습니다. 이 남편은 날마다 부인을 때리고 난폭하게 굽니다. 아내를 식모처럼 노예처럼 부려먹습니다.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주먹이 날아옵니다. 이러한 남편과 살 수 있습니까? 매 맞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남편들은 이런 자들이 없겠지요? 하기야 요사이는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매를 맞아서 못살겠다고 이혼을 하는 자들도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만 하여튼 이러한 사람들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이혼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 남편이 허락한다 하더라도 성경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이 부인이 남편의 사슬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그것으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음부라고 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본문 1절에서 3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옛 남편은 율법입니다. 이러한 율법 아래에서는 더 이상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남편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남편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옛 남편이 율법이고 새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새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을 옛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무서운 옛 남편인 율법이 죽으므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옛 남편 즉 율법이 죽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율법이 죽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쉽게 생각하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우리가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이 분명하지요?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율법을 완성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예수님만 믿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 받은 모든 죄에서 해방 을 받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와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들이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죄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터득한 사도 바울은 이미 살펴본 로마서 6: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2: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릴 때 악한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살아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고 선언하면서 살아갈 때 이제는 은혜 아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법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자랑을 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자들은 교만합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다가 안 되면 좌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완전히 죽으면 교만도 없습니다. 좌절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충성 오직 감사 오직 겸손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옛 남편과 사별하고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세력들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들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습니다.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남편이 되어 양육하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새 남편은 폭군이 아니기에 우리들을 은혜로 다루고 계십니다. 이제 그 안에 있기만 하면 과거에 누릴 수 없었던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약한 남편이 죽었습니다.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자기의 몸과 생명을 주신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이러한 신랑을 모신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감사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II. 새 남편을 주신 것은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 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롬 7:4절을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옛 남편인 율법에서 해방을 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면 이제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죄를 마음대로 짓고 신앙생활을 자유스럽게 하여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시면서 새 남편을 허락하신 것은 마음대로 죄짓고 마음대로 신앙생활하고 하고 싶은 대로 방종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새 남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열매를 맺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내를 하시면서 거름을 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이 없다면 벌써 우리들은 찍힘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찍힘을 당하지 않은 것이 우리들에게 열매가 있어서라고 착각을 하고 교만하게 살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칩니다. 그때에는 불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열매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를 맺도록 참고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왜 우리들의 사업이 이만큼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왜 우리들의 직장이 이만큼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왜 우리들의 가정이 이만큼이라고 사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잘하여서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것보다(물론 이것도 전혀 부정하지 않음) 앞으로 있을 마지막 대 심판 때에 열매 없는 이 무익한 종을 찍어버리라는 심판을 받지 않고 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고 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참고 있는 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모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은혜를 남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각자에게 깨달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당장 채찍이 없다고 하여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심판을 받지 않고 어찌하든지 열매를 맺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인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아는 자는 누가 시켜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억지로 하거나 체면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는 자는 너무도 즐겁고 기뻐서 자원하여 일을 합니다. 스스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여 안달입니다. 십일조만 아니라 십의 이조 삼조 아니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바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도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법으로 다루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다루신 것을 깨달으면 죽기내기로 충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 더 이상 옛 남편에 얽매이지를 않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 "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생 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기만 한다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어찌 감격이 없겠습니까? 어찌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옛 남편과 사별하고 새 남편과 결혼을 하였는데 어찌 새 남편을 사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없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예수님과 결혼을 하였는데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이 책임지신다고 하였는데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다른 남편 을 찾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괜히 한번 해보는 말씀이 아닙니다. 새 남편을 맞이하였는데 옛날 남편 생각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 줄 아십니까?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아무리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라도 다른 사람하고 연애하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면, 그것도 한 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번히 이야기한다면 좋겠습니까? 부부싸움하기 좋을 만한 일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율법과도 죄와도 상관이 없는 자로 만들어 주시고 오직 새 남편만 따라오도록 하였는데 여전히 세상적인 남편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실 우리가 이런 새 신랑을 맞이할 수나 있습니까? 인간적인 자격이나 우리의 모습가지고서는 정말 분에 넘치는 과분한 대우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정상이 아닙니까? 사랑한다면 무엇을 주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에 생명까지 주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찌 반응이 없겠습니까? 우리의 남편은 폭군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어야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의사의 진단).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서는 죄와 사망가운데서 해방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여 주신 것입니다(의사의 수술). 예수의 십자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다루어주신 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랑으로 은혜로 이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순종하는 삶 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넉넉한 은혜로 모든 사람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관점을 바꾸면, 행복해 진다

어려운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 정탐군은 똑같은 가나안을 정찰한 후에.. 열 명은, 큰 성과 큰 사람을 보고 절망과 좌절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가슴 벅차 합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태산이, 평야처럼 보일 수도 있고 평야가, 태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태산이 평야로 바뀌는 것은, 기적이지만 태산을 평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지하셋방이 고급 빌라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질병에서 놓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거나 실패한 삶이, 성공의 삶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만큼 노력하고 몸부림을 쳐도,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고,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우리의 오염되고 세속화된, 시각과 관점이 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느낄 수 있고, 쓰레기통 같은 곳에서도, 기적을 기대할 수 있고, 사막에서도 샘물을 마실 수 있으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크고 비밀한 은혜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청년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큰 실망과 좌절을 느끼며,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임재), 말씀을 풀어 주셨고, 그때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저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저들은 새로운 희망과 설레임을 품고 떠나온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무엇인가, 달라졌는가요? 비관적인 상황인가요? 절망적인 현실인가요? 아닙니다. 저들의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의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저들은 변화됩니다.

사람은, 시각이 바뀌면 변합니다. 사람은, 관점이 달라지면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눈이 열리면, 딴 사람이 되어 기적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열린,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쓰레기통 같은 곳에서도..아우슈비츠의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카타콤 같이 형벌 같은 환경 속에서도.. 절대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매 맞음과, 고난과, 헐벗음과, 추위와, 불편함과, 감옥 같은 현실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이며, 영광이며 축복입니다. 이러므로 눈이 닫힌 상태에서의, 기적이나 체험이나 은혜나 열심이나 수고나 노력은 변화를 일으키거나, 가슴 벅찬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일 뿐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핍박자 바울이, 다메섹에서 눈이 열릴 때 충성된 사도로 변화되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바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어두운 바울을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시니, 바울은 고꾸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과 목적과 의미를 바꾸게 됩니다. 스데반을, 기억하십시오. 돌이 날라오는, 기막히고 참담하고 처절한 저주 같은 상황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은 스데반 집사가 만난, 상황이나 환경이나 현실을 바꾸어 주신 것이 아니라 스데반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십니다. 그때 스데반은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런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선택받은 주의 종인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고, 결국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에너지입니다. 이 땅과 세상에 고착되어 있는 시선을, 눈을 들어 하늘과 주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지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그런 참담한 현실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사면초가를 통과하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아무리 힘써도 달라지지 않는, 동굴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극한 외로움으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과 가능성이 있음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그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을 보게 하시며, 가능성을 찾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영광스런 하늘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오염된 시각과 관점을, 정화된 시각으로 바꾸어 주사 가슴 벅찬 미래와 주체할 수 없는 현실을 느끼게 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은혜만 받을 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솟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