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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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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준비하라 (마 3:1-12)

오늘은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전에는 강림절, 대강절이라고 하다가 최근에는 예배신학자들이 모여 대림절이라고 했습니다.  강림절이라면 다만 예수님이 내려오시고, 임하신다는 말이어서, 이 절기의 본래적인 의미를 잘 표현하지 못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여 대강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강절이라고 하니 강림하시는 주님을 대망하는 절기라는 본래의 의미는 잘 표현되었는데, 들리기는 대강대강 지키는 절기인 것 같아서, 임하시는 주님을 대망한다는 뜻으로 대림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수난을 바르게 보내기 위하여 40일의 사순절을 지키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탄생을 대망하고, 이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도록 4주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대림절이 되면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며,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의 시간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따라, 성 안드레의 축일인 11월 27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대림절 첫째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계산에 의하면 대림절은 11월 30일 보다 빠르지 않으며, 12월 3일보다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로마교회들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 같은 교회들은 대림절을 11월 중순 경부터 사순절과 같이 6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오는 절기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기쁨과 대망의 기간이기에 사순절과 같이 금욕적이지 않으며, 엄격한 규율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모셔 들인다는 의미와 마지막 심판 날에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차원에서 회개하며,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앞에 대림절이 왔다고 외쳐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다 관심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절기가 우리 한국에 소개되기를 먹고 마시고 놀자는 날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날 성탄절 전야가 되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밤새워 쏘다니고, 시끄럽게 놀고, 탈선하였습니다. 

성탄절이 연말연시와 겹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1년 중에 통행금지가 풀리는 날이어서 밤 새워 노는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새롭게 대림절이 되었으니, 경건하게 보내라, 회개하라, 헌신하라고 해도 목사가 외치는 말은 허공만 맴돌고, 교인들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전하는 사람도 뜨겁지 않고, 듣는 사람들도 전혀 감동으로 들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연말이 되었으니 한번 말하고 넘어가는 것이요, 교인들은 지겹게 또 들어야 하는 말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의미한 반복이 지난 2천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오면서 대림절을 보다 넓게 해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건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이미 과거의 한 시점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절- 초림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내주하시는 주님,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미래적인 사건으로 마지막의 심판 날에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시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사모하시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대림절이 되면 교회는 강단에 네 개의 초를 놓고, 첫째 주일에는 하나의 촛불을 켜고, 네 번째 주일이 되면 네 개의 촛불을 킵니다.  성탄절이 되면 5개의 촛불을 켜놓습니다. 

유대인들은 겨울이 되면 ‘하누카’라는 축제를 즐겼습니다.  과거 헬라의 수리아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고 돼지 피로 물들이고 제단을 더럽혔는데, 유다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성전을 되찾았습니다. 이제 성전을 수리하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봉헌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하누카라는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대인의 하누카라는 절기는 우리 성경에서는 성전을 수리한 명절이라고 하여 ‘수전절’이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에는 성전을 재탈환하여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으로 ‘성전 봉헌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제사장들인 유다 마카비우스 형제들이 성전을 되찾고, 들어가 보니 성소에는 촛대는 있으나,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다시 촛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밝혔는데, 이를 기념하면서 각 가정에서는 기스르월 12월 25일부터 8일간 하누카의 불을 밝혔습니다.  집집마다 창가에 촛대를 세우고 하루에 하나씩 더해가면서 불을 밝혔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촛대에 불을 밝히면서 어둠을 몰아내고 빛된 삶을 살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유다 마카비우스가 성전을 되찾고 촛대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할 때에 성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한 기름- 감람유가 조금 밖에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름으로 보충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정한 감람유를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 성전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적은 양의 기름을 부었는데, 8일 동안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았고, 그래서 8일 동안에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였고, 제사장들이 새로운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8일 동안 촛불을 밝히면서 축제로 지냈습니다.  우리 주님을 맞이하는 절기에 하누카라는 절기가 들어 있으므로 대림절이 되면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만이 참 빛이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12월 25일 하누카- 성전 봉헌절은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 되시는 주님을 봉헌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유명하신 신학자인 알프레드 에델샤임(Alfred Edersheim)은 하누카로 지키는 기스르월 12월 25일이 초대교회의 의하여 성탄절, 크리스마스로 수용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야말로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높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빛으로 오신 주님, 참 성전이 되신 주님의 몸이 봉헌된 날이라고 할 것입니다.  음력인 유대력으로 기스르월 25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12월 25일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진정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숙한 신앙, 연단된 신앙은 기다림에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하는 사람이요, 기다리는 사람은 정결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많은 기쁨 중에 사람 난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16:21)고 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10개월이라고 하는 고된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엄마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열 달이라는 기다림을 다 채우지 못하면 조산하게 되고, 미숙아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는 어린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까지 인내로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풍성한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열 달, 정확히 채우는 축복을 받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인류의 영원한 소망은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이요, 보장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아무런 기다림도 없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나에게 무한한 생명과 은총을 부어주셨기 때문이요,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소망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기다림이 있는 곳에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이란 절망에 가까운 것이요, 무의미한 적막이 흐를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는 복된 소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소망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나타나심은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소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디도서2:13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딛 2:13)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고, 앙망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이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이 우리로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고, 부르심의 소명에 충실하게 한 것은 기다림의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내일의 소망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었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과거에 이미 찾아오신 초림의 주님, 그는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주시고, 나에게 기름 부어주시고, 함께 가시기를 소원하시는 주님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을 모신 사람만이 오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성실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깔려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이 되어 찾아오셨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어둠이란 찾아볼 수 없고, 항상 밝은 대낮같이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적은 촛불을 밝혔지만, 우리 안에는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미움이나 원망이나, 절망과 같은 어두움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반년 전에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 전파하여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이나 여리고와 같은 대도시에 가서 외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 나가서 외쳤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제사장으로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었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험한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에서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보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예수님을 증거 하지만 한편 사모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실 것을 하나님은 이미 예정하셨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고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는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절)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곧게 준비하였습니다. 

사람이란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광야에 거하면서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이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말하고,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이란 점점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싶고, 안락한 잠을 누리고 싶은 것이 본심입니다.  그는 호의호식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연명하면서도 오로지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장소로 나오는 것을 요한이 보았습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란 뱀의 자식이라는 말인데, ‘자식’이란 말은 듣기 거북하지 않게 번역한 것이요, 본래는 욕입니다.  욕할 때에 점잖게 말하나요. ‘악마의 화신’, ‘사탄의 졸개’, ‘영원히 멸망할 종자’그런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이 오시기에 희망이 있고, 구제받을 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결국은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무엇을 해야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인이기에, 이 죄를 가진 채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하시는 주님, 구원이신 주님을 영접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윤리나 도덕적인 해석을 내릴 것이 아니라, 구원론적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족보 하나만으로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행여 마음속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기에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돌 하나를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소중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 노릇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자 노릇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목사 노릇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말만 많았습니다.  남을 지적하는데 빨랐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지나갔습니다.  오늘,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이 맺은 열매를 구경할 것이 없습니다. 

성홍모라는 저의 인격의 나무를 바라보니 이렇다한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급한 마음뿐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나뭇잎만 무성합니다.  그럴듯한 몸통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알아주는 것 같은데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고, 아는 것도 적지 않은데,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예수님을 준비하였고, 예수님을 말하였고, 예수님만을 드러내었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주님,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주시는 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알곡이 되셨습니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손에 키를 드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그 은혜 안에 살면서 열매를 맺는데, 알차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앞에 서는 날을 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야만 진정한 소망이요, 그날이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날이요, 가장 복된 날입니다. 

연로하신 성도님을 심방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의 욕망을 내려놓았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일생 살아오면서 행한 일들이 다 허물뿐이라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자기에게는 목사님이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하면서 자주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 초림의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다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영접한 날부터 주님을 기다렸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릴 수 없다면 만남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에 그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허비가 아니라, 알차게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핍박이나 환난이 주어지더라도 낙심치 말고, 주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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