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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요 1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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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요 12:24-26)

함께 60회 생일을 맞은 부부가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60살까지 사이좋게 잘 살았기 때문에 각자의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먼저 그 동안 가난하게 살면서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이 아쉬워서 부인은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정말 부인의 손에 세계 일주여행권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남편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자기보다 30살 어린 여자와 살고 싶다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남편은 90살 먹은 노인이 되었답니다.

너무 이기적인 남편의 쌤통인 모습입니다. 함께 사는 부부도 가끔은 이렇게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데 모르는 사람들끼리야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손해 보기보다는 저가 손해를 봐야하겠고, 내가 아파하는 것보다는 저가 아파하는 게 낫겠고, 나보다는 저가 슬픈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해서 여러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은 박수를 치며 원하지만 내가 손해를 봄으로 다른 사람들이 누릴 유익 따위는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흔히 떠오르는<손해>라는 단어 속에는 이미 마이너스 적인 생각과 개념이 깊이 연관이 지어져 있습니다. 가령 손해 본다는 것은 소유 적으로는 곧 잃어버린다는 것이고, 물질적으로는 가난해 진다는 것이고, 인간적으로는 바보가 되어 진다는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그래서 손해 뒤에 찾아 올 유익이라는 것은 아예 안중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손해 뒤에 무슨 유익이 옵니까? 말이 맞지 않거든요. 그런데 상식을 훌쩍 뛰어 넘어서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과연 손해를 보면 유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손해를 봐야만 유익이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 교회 입구 담장에 여름이면 예쁜 장미가 핍니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볼품  없는 가시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여름이 되면 교회에 오는 우리를 가장 반겨 맞는 장미넝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름에 가장 아름답고 탐스러운 장미꽃을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장미가 탐스럽게 피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지를 치는 일입니다. 반드시 필요 없는 가지를 잘라 버려야 보기 좋은 장미가 피는 것입니다. 올해도 몇 분들이 가지런히 울타리를 정리해 놓으셔서 내년 여름에 정말 아름다운 장미를 보게 될 것입니다. 보세요. 내 몸에 붙어 있는 가지이지만 쳐서 버리므로 손해되는 것이 아니라  잘라버려서 얻어지는 아름다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장미뿐이겠습니까? 우리가 탐스럽고 맛있는 과일을 먹기 위해서도 반드시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버리는 행위가 있고서야 얻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때로는 손해를 보고 다소 버리는 일이 큰 유익이 될 때가 있다는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를 좀 더 진보시켜서<죽어야 열매를 맺는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것보다 신비스러운 진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가치 있는 진리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들어보세요. 유명한 24절 말씀입니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예수님은 이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이 생명의 진리를 믿었고 이 생명의 진리를 따라 죽었습니다. 더 많은 영광스러운 생명을 위하여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한 알의 밀이 되신 이 죽음이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선택적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죽느냐"고,"내가 왜 희생하느냐"고"내가 손해 볼 짓을 왜 하느냐"고 아등바등 안 죽으려고 이리저리 도망가다가 억지로 어떻게 되어서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곧 친히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왜요? 저 앞에 있는 영광과 많은 열매를 맺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이요, 이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내 생명이 손해 보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어서 열매 맺는 결코 유익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결단이 23절의 말씀 중에 나타나 있습니다."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의식이요. 예수님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 있었던 소신이자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신앙관입니다.

오늘 우리는<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이 중대한 진리를 깨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미 행하신 구속자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또 시행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 희생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죽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생명이라는 극단적인 죽음 이전에 내 생에 죽어져야 할 것들이 죽어지지 않아서 신앙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의 죽음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품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욕심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교만과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욕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나에게서 이것만 죽이면 정말 아름다운 열매를 볼 수 있는데......'하는 아쉬운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삽니다. 내 성격이 죽으면 다른 사람의 인격에 아름다운 유익이 있습니다. 나 한사람의 욕심이 죽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찌울 수가 있습니다. 이걸 조금이라도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자, 이렇게 욕심도 죽어야 하고, 성격도 죽어야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죽을 때도 잘 죽어야 합니다. 제대로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죽이려고는 하는데 잘못 죽어서 열매가 없는 쭉정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밀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밀알이 죽어서 열매를 맺으려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먼저는 묻혀야 합니다. 공중에서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묻혀서 때로는 밟히기도 하고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게 순리이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열매 맺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견디지 못해서 올바로 죽지 못합니다. 떨어지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하겠는데 땅에 묻히는 것까지는 안 되겠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내가 정말 많이 양보해서 욕심을 버리고 나를 포기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까지가 한계입니다. 밟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한걸음 물러서기는 했지만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밟힐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이거든요.

하지만 여러분 밀알이 땅에 떨어져 묻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밟히지 않고 어찌 뿌리를 내리겠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한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원리는 내가 할 일을 아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여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며 맺는 것은 사실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일입니까? 네, 열매 맺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는 내가 할 일, 땅에 떨어져 죽는 것까지만 하면 됩니다. 그것까지만이 내 목적입니다. 때로는 좀 더 깊숙이 무게 있고 진지하게 누구도 모르게 땅에 묻히면 좋겠는데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를 좀 알아달라고 야단입니다. 묻히기는커녕 땅에 닿아보지도 않고 무슨 사랑의 보답이 없느냐고 얄팍하게 떠들어댑니다. 이건 아닙니다. 나는 내 욕심이 죽는 일까지만 하면 됩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는 일까지만이 내 일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 열매를 내가 만들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열매를 만들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옹고집 부리지 말아야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내가 죽고 나를 희생하는 것까지만 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조금만 손해 보면 전도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유익 되고 우리교회가 성장합니다. 내가 할 일까지만 해도 이런 열매가 있습니다.

갠지스 강둑에 어떤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는데 전갈 한 마리가 물에 떠내려가면서 육지로 나와 보려고 하는데 헤엄을 잘못 칩니다. 그래서 물결에 쓸려가는 나뭇가지를 붙들려는데 그 나뭇가지도 흘러가고 맙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동거리는 것을 보고 이 노인이 전갈을 건져주었습니다. 그런데 건지자마자 이 전갈이 노인을 물고  꼬리로 쏘고 말았습니다. 알다시피 전갈에 물리면 잘못하면 죽습니다. 그 만큼 독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 전갈을 건져주고 자기가 물리는 노인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노인, 아 그 전갈은 살려줘서 뭘 하겠다고 물리면서까지 그렇게 구출하려고 하는 거요?"이 노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전갈은 쏘는 것이 본능이고 나는 구원하는 것이 본능이요."세상은 나를 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요. 희생할 것이요, 손해 볼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열매는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르게 죽으면 영광이 옵니다. 이게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버렸기 때문에 나라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고 부끄러운 생을 살고 가문도 망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현재에 죽고 미래에 삽시다. 나 하나 죽고 많은 사람을 살립시다. 순간에 죽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는 열매를 바라신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도 가야할 것입니다.<죽어야 열매를 맺는 원리>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원리임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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