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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 년을 하루 같이 (사 65:17-19, 벧후 3:8-13, 막 13: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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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하루 같이 (사 65:17-19, 벧후 3:8-13, 막 13:32-37)

오늘이 우리 달력으로 11월 말 주일이구요 교회력으로 해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 달력은 12월 말이 돼야 마지막이지만 교회의 달력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다음 주일이면 12월 첫 주일이지만 교회력이 새로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그럼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인 날은 무슨 주일로 지키느냐 하면, 우리 보다 앞서 죽은 사람들.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주일. 또 하나는 그분들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간구하는 주일.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동시에 다음 주일에 올 우리에게 약속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오늘 깨어 기도하라. 주님이 오신다. 깨어있는 주간이 이번 주간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다음 주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올 테니 깨어 기도하고 나를 영접하여라. 오늘 이 말씀을 하십니다. 오시는 분이 누굴까? 그분은 미리 약속을 이렇게 하십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사는 사람들의 주님. 천년이 지났는데  하루 지난 것 같다고 느끼시는 사람들이 가야할 나라의 주님. 여러분 한번 여쭙겠습니다.

속으로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한테 지금부터 천년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기꺼이 받으시겠습니까? 저는 아직 대답이 없습니다. 제가 얼마 살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현 상태에서 천년을 준다. 어떻게 살까.

제가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나님 저한테 지금부터 천년 주시면 생각해 본 다음에 받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천년 좋으십니까? 사실은 천년 지난 것이 하루 지난 것처럼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너무 좋아서. 이런 분 한 테는 천년 줘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서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하루를 살았는데 너무 지긋지긋해서 천년 산 것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천년은 너무 깁니다. 하루 살아도 천년인데 천년 살면 몇 년을 더 살아야 됩니까?

근데 성경말씀에 천년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천년은 그냥 시기적으로 봐서 시간대로 보아서 천년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단위. 그걸 천년이라고 했습니다.

또 상대적으로 시간 단위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은 하루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가장 짧은 거 하고 가장 긴 거 하고 둘이 합쳐 가지고 둘이 짧고 길지만 긴 시간도 짧은 때처럼. 짧은 시간도 천년이란 긴 시간처럼 살 수 있는 방법. 그 방법.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베드로 후서나 마가복음 얘기가 아니고 본래 시편에 있는 말씀의 얘기입니다. 시편 90편 4절에 보면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에 한 순간과 같다.

그렇게 하나님이 오시면 복 받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천년을 시편에서 약속을 했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하는 그 천년이 바로 아주 아름답고 보람된 하루처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천년 약속 받고 싶으면 주님과 함께 하십시오. 아까 우리 찬송도 들었고요 다음 주에는 또 바흐의 모테트도 들을 텐데 저는 찬송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찬송 속에 담긴 음은 수백 년 전에 작곡되어 불렀던 음인데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다시 불러도 질적으로 똑같은 가치를 가지며, 아니 더 가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음 속에는 시간의 길이가 없다. 음이 제가 반갑고 즐거우면. 수십 년 전에 불렀던 음인데 내가 듣기가 싫다 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금 다시 재생을 해도 듣기가 싫을 겁니다. 음이요 하나님이 주신 음도 시간 단위를 초월합니다. 제가 음악을 듣고 찬송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수백 년 전 아니 천 년 전에 불렀던 내 선조들의 아름다운 찬송 음을 오늘 내가 너무 기뻐서 찬양을 했더니 천년의 시간이 당겨졌습니다.

천 년 전과 천년 후가 지금 하나가 됐습니다. 음 속에. 혹시 기도 속에 제 생각 속에 수천 년 전 수백 년 전 있었던 것을 합쳐질 수 있고 오늘 저는 그렇게 되면 저는 사백년을 살았습니다. 가능합니다.

입장을 좀 바꾸어서 사백년 전에 오 백 년 전에 이 음을 만드신 분들은 오 백년 뒤에 올 우리가 그 음을 불러 주리라 어떻게 예상했습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거 것을 재생해서 부를 수 있다면 주님의 약속입니다.

오 백년 뒤의 것도 앞으로 올 오 백년 것도 앞당겨 끌어다가 지금 불러보아라. 신앙의 요체는 뭐냐 하면 이천 년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했으니 그분을 우리의 구세주로 모십시다. 그것이 신앙의 한 축입니다.

또 다른 신념은 그분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천 년 후에 재림할 텐데 재림 할 그분의 심정을 그분의 사랑을 지금 갖다가 누릴 수는 없느냐. 신앙은 과거와 연결만이 아닙니다. 신앙은 미래의 약속과의 연결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오늘은 주님이 오셔서 저희들한테 주셨던 약속. 천년이란 시간을 하루처럼 값지게 해주마. 받아 살아라. 내가 앞으로 올 영원무궁할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올 텐데 그때 약속을 지금 미리 줄 테니 지금 살아라.

오늘이란 시점은 과거 연속이 아니며 미래를 앞당겨 갔다가 제가 요리하면서 먹는 아름다운 잔칫상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보내라는 겁니까? 그래서 깨어 기도하고 찬양하고 깨어있어라. 내가 온다. 왔고 앞으로도 올 것이다.

저는 우리가 부르는 오늘 찬송이나 기도는 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수천 년 후에도 같이 불러질 겁니다. 똑같은 감동으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면 천년을 산다는 말이 그냥 시간 계산을 해서 하루 지나고 일 년 지나고 한 세기 지나고 이런 생각지 마시구요.

천 년 수천 년의 시간 흐름 속에 있는 의미와 보람과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지금 내가 요리해서 음식을 먹듯이 즐겁게 삽시다. 저는 과거를 삽니다. 저는 미래도 삽니다.

그런 방식으로 오늘을 제가 값지게 살겠습니다. 천년과 하루의 이야기는 시간의 길이, 시간의 공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다.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있으십시오. 내가 가겠습니다. 내가 약속한 천년이 하루같이 지날 수 있도록 보람되게 살도록 내가 가겠습니다. 오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런 말씀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천 년 살지는 못하지만. 몇 십 년 살지요. 몇 십 년이 과거의 수백 년이나 수십 년을 얼마나 끌어안고 살지는 여러분의 결단문제입니다. 앞에 있을 수천 년의 역사를 미리 앞당겨서 살아갈지도 제 결단 문제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오래 삽니까? 그런 성경 말씀을 제가 들어본 일도 없고 읽어본 일도 없습니다. 시간의 길이는 예수 믿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뭐가 상관있습니까?

길이가 아니고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보람, 의미, 아니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를 갖다가 얼마큼 끌어안고 사느냐. 이 차이지. 시간의 길이 차이는 아닙니다. 오늘 말씀보세요. 이렇게 오신 예수님이 앞으로 재림하실 때 어떻게  언제 오시냐하면 모르겠다. 천사도 모르고 보냄 받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 아무도 예언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만 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제 오는지에 관해서는 생각지 마라. 당신의 일이 아니다. 내 일도 아니다. 뭐가 내 일입니까? 언제오든지 상관없이 오늘 생명이 주어진 오늘 이 시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끌어안고 살아라.

그 말은 깨어있으라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아프신 분, 생명이 촌각을 다투시는 분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언제 하나님의 부름 받을지 모르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제 생명길이가 길어집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기도하면 제가 얼마큼 생명의 길이가 있든지 그건 그분이 하실 일. 지금 주어진 오늘이, 내일이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것이 저한테 축복입니다.

오늘 말씀 잘 보세요.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라. 내가 백년을 줄 테니 하루같이 살아라. 나와 같이 살면 하루하루 지난 것이 천년을 산 것처럼 보람이 있다. 그게 예수 믿는 보람이지 길이가 늘어진다고 구십년이면 예수 믿는 축복입니까?

백년이면 축복입니까? 이백년이면 축복입니까? 그 길이가 우리한테 행복을 줍니까?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염려한다고 제 생명 길이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 저한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살아가는 지금 시간을 천국처럼 살아라. 왜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느냐? 저는 현대인들이 똑똑한 거 같은데요. 아주 바보 같은 게 있습니다. 길이의 요약만 늘이려고 하고 의미는 찾지 않습니다.

오늘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천국처럼 살라는데 하나님 나라처럼 살라고 오늘 주었더니 오늘은 그냥 보내버리고 내일. 언제가 내일 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 그 날과 그 시는 나도 모르는데 당신들은 염려조차 하지 마라. 맡겨라. 그러나 지금 언제 됐든지 간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 시간대마다 하나님께서 축복된 시간으로 알고 보람되게 살지어다.

사실은 우리가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이 저희를 부르실 때 그때가 언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모르겠고 먼저 가신 분도 제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대충 짐작은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대로 닭이 우는 시간일지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시간일지 나도 모르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아냐.

하나님만 아시고 그분이 아신다. 중요한 것은 언제 부름을 받아도 오늘 깨어서 앞으로 줄 영원무궁한 시간이라 하는 그 영원을 오늘 너한테 맛보라고 하셨다. 그것이 예수를 우리한테 보내신 뜻이니라. 그것만 할 수 있으면 우리한테 주어진다고 약속된 새 하늘 새 땅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우리 오늘 한번 결단하셔야 합니다. 저한테 주어지는 모든 순간순간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러면 예수와 함께하신 거고 그냥 지나가 버린 시간으로 하면 몇 년을 살면 여러분에게 보람된 시간이 오시겠습니까? 한 세기요. 한 천년이요.

이 천 년이란 단어는 우리 인간 역사에서 가장 긴 시간으로 합니다. 그래서 이 천년이란 말을 밀레니엄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이천년이 넘었기 때문에 999년까지가 첫 천 년이고 1999년까지가 두 번째 천 년이고 2000년부터 지금 살아가는 세 번째 천 년입니다.

3000년부터 또 새 천년이 오겠지요. 그때까지 사실 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오실지 안 오실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근데 천 년이 하루 같으면 삼 천 년 되어도 이틀 지난 건데 그때 주님이 오시겠어요. 너무 빠르지요.

그러나 하루 천 년처럼 사는 사람한테 아마 천 년이 너무 길겁니다. 제가 모르겠습니다. 저의 뜻은 앞으로 있을 다음 천 년을 저는 지금 주님을 기다리는 아주 진실 된 소박한 진정한 마음으로 제가 다음 있을 제 사 천 년을 제가 지금 누리고 싶습니다. 주님이 약속한 미래 저는 지금도 맛보고 싶습니다.

맛있게 좀 살고 싶습니다. 골로새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시거들랑 주님과 함께 사는데 소금으로 맛을 내어 사십시오. 저는 그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지금은 조미료가 많아서 소금뿐이 아닙니다. 만들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기를 지금 이 시간을 예수라는 조미료를 가지고 살되 가정에서 살든 개인의 사업장에서 살든 자기 자신이 살든 맛있게 좀 살아라.

길이는 얘기하지 말고 지금 맛있다고 하여라. 제가 맛없게 산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맛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기쁘면 기쁨이라는 맛을 우리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고통의 맛도 맛있다.

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뒤에 올 기쁨 때문에 고통도 맛있다. 기쁨은 하나님과 함께 주시는 축복이기에 맛있다. 오늘의 모든 역사 속에서 진실로 맛있게 누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우리교회 멋있는 분들 많으신데요. 교회도 멋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멋집니다. 그런데 맛있게 삽시다. 멋만 부리면 뭐합니까? 맛도 있어야지. 예수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원조 맛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맛있어서 세상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너무 멋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맛입니다. 오늘 찬송아까 311장 불렀는데 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서 그대들에게 값없이 주었다.

이게 중한데 너희들이 나한테 줄 것은 뭐냐. 이것이 너무 중한데 용서와 사랑을 주었다. 맛있게 살라고. 그랬더니 왜 맛없는 음식만 내놓느냐. 죄 된 우리가 용서 받은 삶. 영광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삶. 이 모든 것이 저한테는 맛의 원천입니다. 오늘 용서를 받으시고 사랑 받으시면 십자가라는 맛에서 부활이라 이름 하는 멋진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게 사실은 우리는 다음 주에 경험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찬양하면서 기쁨을 얘기할 수 있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 그런 것 같지는 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인구도 많고 이제 경제가 많이 성장하고 그래서 중국과 함께 21세기 제 삼 천 년을 지배하는 그런 세계가 된다고 다 예측을 합니다.

차이나하고 인디아 합쳐서 친디아의 왕국이 될 거다. 뭐 좋은 얘기입니다. 근데 이분들이 이런 얘기에도 불구하고 아픔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갖지 않은 인도 사람들 속에 카스트라는 제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복 받은 사람이 있고 날 때부터 천민인 사람이 있습니다.

천민이라 이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결혼도 안할 뿐 아니라 접촉도 안하려하는 사회적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민 인구가 정확히 얼마인지 누구도 모르지만 한 30%에서 40%된다고 자기들이 얘기합니다. 불가촉천민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계층에서 나왔습니다.

상류계층은 잘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하류층이 예수를 믿는데 제 친구 분들은 대충 이쪽 카스트 지역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은 카스트도 없지요. 카스트 이외의 사람들입니다. 간디란 사람이 오셔서 인도에 민주화도 이루고 인도의 독립운동도 지도하고 하면서 간디가 위대한일을 했습니다.

교인은 아니었지만 소위 불가촉천민에 해당하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를 자기 양딸로 삼았습니다. 상징적인 얘기입니다. 나는 카스트를 반대한다. 불가촉천민들도 우리와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살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면서 30~40%나 되는 이 분들한테 간디가 자기 스스로 이름하나를 지어줬습니다.

모든 불가촉천민들은 신의 아들들이라고 하자. 신의 아들들. 그래서 이름이 하리잔 그렇습니다. 하리잔 이라는 말은 신의 아들들이라고 간디가 붙여준 칭호입니다. 근데 오늘 제가 간디를 만나보면 이분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간디가 이렇게 붙여줬지만 우리 사회는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역시 계속해서 따돌림 당하고 소외당하고 사회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는 본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훨씬 진실하고 절실하다. 본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는 핍박받는 사람들. 이름하여 달리트. 그렇습니다.

불가촉천민들을 흔히 달리트라고도 하고 하리잔 이라고 표현하는데 높은 계급에 속한 사람은 하리잔 계급이다 이렇게 하구요 자기들은 우린 하리잔 아니다 달리트다. 왜. 하리잔 이란 말속에는 비록 간디가 좋은 말로 주었지만 사회현실은 회칠한 무덤 같아서 속이는 거다.

차라리 핍박받는다고 하자. 두 가지 얘기입니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인종차별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한다. 그리고 우리는 핍박받는다. 우리는 카스트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자손이라고 불리게 되는 그날을 희망하며 기대하며 산다. 저항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어떤 희망이냐 그랬더니 인도사람들 죽으면 다시 회생을 하는데. 소위 윤회설입니다. 달리트가 죽으면 제발 달리트로 태어나지 않기를. 이런 꿈입니다.

근데 달리트의 인구는 계속 늘어납니다. 그러면 세기가 이것을 이기고 언젠가는 달리트가 없는 하리잔도 없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이 언제인가.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기로 합니다.

인도의 신앙은 그렇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한테는 카스트도 없고 달리트도 없고 하리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인간의 언어로 행복을 규정하지 말고 예수가 오면 지금 어디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그대는 천년을 사는 것과 같다.

지금 보람되게 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신자가 된 거. 오늘 하루를 복되게 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역사가 저 개인의 역사가 언제 끝날지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주어지는 우리의 역사의 토막토막마다 제 삶의 토막토막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오셔서 저와 함께 만들고 저와 함께 천년을 하루처럼 살게끔 아름답고 보람되게 이루신다. 이 사실 하나를 오늘 기억하시면 주님이 오심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천년의 길이가 아니라 천년의 질입니다. 우리는 천 년도 살 수 있고 만 년도 살 수 있고 주님과 함께 하면 그날 주시는 약속을 지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지금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 지금이 모아지면 지금들의 가정이 되고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고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다 지금 우리는 천년 뒤도 끌어다 살고 천년 이전 것 끌어다 살고 오늘은 만세 전 만세 후 우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지금 끌어다 오늘 맛있게 먹고 살 수 있다.

맛있는 사람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그날을 위해서 오늘 다시 오십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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