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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 6: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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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 6:30-40)

  성경은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세상도 이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믿음 안에 있기에, 성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만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믿음이, 어떻게 하면 생길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 교회에도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들이 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경험했다. 홍해가 갈라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믿지 않는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이적과, 오병이어의 이적,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모두 목격했다. 그렇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는 본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다.

  (30)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표적을 보여 믿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날,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았다. 그리고도 믿지 않으면서,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 정도의 이적으로는 메시아의 표적이 안 된다. 아직 당신은 모세보다 못하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리게 하여,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는 하루의 양식을 채워주는, 이 정도의 이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적어도 40년 간은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셔야 한다며 나왔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았으면 믿어야 할텐데, 더 많은 표적을 보면 믿겠다는 자세로 나왔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증거를 대고,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여줘도 믿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병이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 따라서 복중에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복이 넘쳐나시기 바란다.

1. 생명의 떡의 숨겨진 의미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적은, 단순한 이적으로 끝나지 않고 표적임을 보여준다. 표적은 어떤 사인이다. 이 사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겉모습만 보게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적은 봤지만, 표적(사인)을 보지 못했다. 단순히 배부른 데만 만족했다. 이런 군중들을 보시고, 생명의 떡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새로운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고, 이미 보여주셨던 오병이어의 표적의 의미를 다시 설명해 주신다.

  따라서 표적 안에 숨겨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나는 …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의 본질과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상징으로 예수님을 7가지로 말씀하신다.

  여기서 ‘나는 …이다.’라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께서 (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ה󰖻󰕞󰔟 ר󰚆󰔣 ה󰖻󰕞󰔟)”라고, 신적인 명칭으로 대답하셨다. 이와 같이 여기서의 ‘나는’, 하나님이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나는 …이다.”라는 표현을 보면, 전부 이적과 연결되어 있다. 오병이어 이적을 일으키시고 난 다음 “너희는 이런 떡에만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진짜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신이라고 하시며,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다.

  9장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내가 소경만 뜨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정짓지 말라. 나는 세상의 빛으로, 영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자다. 내게 오기만 하면,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 은혜가 나타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난 다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이적 속에는, 모두 다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적 속에 숨겨진 뜻을 깨달아, 진정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숨겨진 의미는,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떡은,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먹었던, 음식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 식으로는 ‘밥’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 같은 분이시라는 뜻이다.

  인간은 밥으로 사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다. 밥을 먹지 않으면, 육신이 죽는다. 그러나 밥을 먹고살아도 죽었다. 영원히 죽지 않으려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영생하려면, 영적으로 죽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밥인데, 밥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1) 밥은 필수적인 음식이다. 밥은 절대로 사치품이 아니다. 밥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분이다.

(2) 밥은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다. 어떤 사람은 짠 음식은 못 먹는다. 어떤 사람은 단 음식을 못 먹는다. 또 어떤 사람은 고기를 못 먹는다. 그러나 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밥을 먹기 싫어하면,  병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신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신다.

(3) 밥은 매일 먹는 음식이다. 예수님과 우리의 교제가 하루도 끊이지 않고,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영적 양식이다. 매일 교제함으로 채워야 할 분이, 바로 우리 영혼의 밥이신 예수님이다. 먹어야 힘이 생긴다. 먹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는다.

2.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본문은 그냥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라고 한다. 우리가 밥을 먹듯,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면,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처럼 계속 생명의 떡을 강조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우리 영혼이 살아나는 비결이 무엇인가?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생명의 떡을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나?

(1) 영적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정상적인 사람인 경우, 하루 세끼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먹을 것을 찾게 된다. 하지만 병든 사람인 경우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성자 ‘썬다 씽’이,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책자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기차에서 요한복음만 있는 작은 책자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어떤 불신자가 그것을 받자, 곧 갈기갈기 찢어서, 창 밖으로 내 던져 버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철기를 따라 걷다가, 철길 가에 흩어진 종이 조각을 발견하고, 주어서 보니 ‘생명의 말씀’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그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결국 자신이 발견한 그 책이 성경임을 알고, 성경을 한 권 샀다.

  그는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는 가운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2)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생명의 (그) 떡’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유일한 생명의 떡이라는 말이다. 생명의 떡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생명의 떡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배고픔을 느껴도 세상 속에서, 종교 속에서, 철학 속에서 자신의 영혼에 기근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는 결코 생명의 떡을 얻을 수 없다. 영적으로 배고프면 주님께 나오시기 바란다.

(3)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갔다가 스스로 돌아서서, 예수님을 떠나간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람이 있다고 하여, 모두 생명의 떡을 먹는 축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영생에 대한 바램을 가진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예수님은 그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그는 근심하여 예수님을 떠나갔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떠나, 제 곳으로 가버린 사람이다(행1:25).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떠나간 자들은 아무도, 생명의 떡을 얻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머물러 있어야,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음을 알았다(68).

  생명의 떡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39, 49-50).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불신자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다르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잔다’고 한다. 죽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3.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사모하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했더니,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여기서 수군댔다는 말은 ‘불평했다, 원망했다’는 말이다. 마치 구약의 백성들이 원망했듯이, 신약의 백성들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수군거렸다는 말은,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준다. 그러면 왜 수군거렸나? 하늘에서 내려온 떡에 대한, 진정한 영적인 주림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배고픔이 없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자신의 영적 누더기와도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지옥의 뜨거운 불길을 발견하면, 결코 이렇게 수군거릴 수 없다. 자신의 운명이 지옥 갈 운명이요, 성한 곳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위대한 의사 되신 예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다.

  병들어 다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고, 주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아직 자기 자신이 죽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아직 배고픔이 없기에,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다.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영적인 주림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위기를 당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의 비참한 모습을 본 사람은, 울부짖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부르짖었다.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그랬나요? 아니다. 자신의 범죄한 모습을 보았기에, 이런 고백을 했다. 울부짖었다.

  바울 보다 더 악한 죄에 빠져 있지만, 그것을 모르면 이런 고백을 안 한다. 위암인데도 소아불량 정도로만 알고 지내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니까 태평하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 갔다가,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얼굴이 사색이 되고, 그때부터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닌다.

  왜 이전에는 뛰어다니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가? 자기가 병들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우리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꼭 우리에게 배고픔을 주신다.

  그러므로 주림을 느낄 수 있음은 복이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주리고 목마름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배부름을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시기 바란다.

  세상 제물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은혜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 받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보통 때는 몽둥이로 패면서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를 안 한다. 그러면 언제 공부하는가? 자신이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 그때 공부한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사람과 낙오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 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좀 더 일찍 깨닫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겨우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빨리 깨달으면 빨리 성공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으면, 그만큼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갈급 함을 통해, 기도의 중요성, 말씀의 중요성, 선교의 중요성, 충성의 중요성을 깨닫기 바란다. 우리교회가 부흥하려면, 항상 주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름이 있고, 주님께 충성하는 일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배부르게 해주신다.

  결론이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강절이다. 주님의 탄생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예수님은 영생이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에게, 하늘로부터 오시는 생명의 떡이요, 영생의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했다.

  이 떡을 먹을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이 떡을 날마다 사모하고, 말씀을 묵상하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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