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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1) (마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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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하면 기도의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기도 많이 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그래서 외국의 성도들이 한국에 올 때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기도원 등에 남다른 관심을 표한다.
이 기도의 열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아있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 뜨거운 교회로 알려져 있다. but 빛좋은 개살구처럼, 소문만 요란하지 실상은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 → 기도에 대해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공급받아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이 있다면 → 기도
그러므로 기도는 생명줄과 같다. 시145:18-19 여호와께서는...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도다.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아주 미천한 존재이다. 그리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기도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도를 외식하는 기도라고 책망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일부러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아마도 두 손을 들고서 꼿꼿하게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장황하게 오랫동안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들의 시간으로는 3시, 6시, 9시였다. 이것을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전 9시, 낮 12시, 그리고 오후 3시였다.

물론 그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하고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자체는 아주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자체를 나무라신 것은 결코 아니다.
→ 평신도는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 셀리더는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해야 한다.

but 기도에 힘을 쓰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기도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는 말씀 앞에 세 개의 수식어가 있다.
첫째,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이다. 그들이 기도했던 동기이다.
→ 사람앞에서 신앙생활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하는가?

둘째, "회당과 큰 거리"이다. 그들이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장소이다.
→ 주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한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다. 그런데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온갖 소음, 영혼을 죽이고 황폐화시키는 소리만 들린다. 생명의 소리는 고요한 중에 들린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시지만 세상의 다른 소리 때문에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를 피해 고요한 중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방에 시계가 있는데, 평소에는 똑딱거리는 소리가 잘 안들린다. but 식구들이 다 잠든 밤이 되면 똑딱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모세는 애굽 궁궐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40세에 혈기를 부리다가 살인하고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광야에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때 사명을 받고 출애굽의 대역사를 감당한다.

셋째, "서서"이다. 그들이 기도했던 자세이다.
→ 앉아서 기도할 수도 있고,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도 있다. but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보편적으로 취했던 자세가 바로 "서서"하는 것이었다. 눅18장9절부터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신을 뽐내면서 기도했다. but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는가?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때 세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했는가? 세리도 역시 서서 기도했다. 서서 기도하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but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꼿꼿한 자세로 서서 손을 높이 들고 오랫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 나는 서서 기타를 치며 기도할 때 가장 은혜가 된다.
  무릎 꿇고 기도하라. 기도의 능력이 배가된다.

그들의 잘못은 한 마디로 그들이 기도했던 동기에 있었다. →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를 찾아간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선 자세로 기도한 것도 역시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했지만 속으로는 사람들 앞에 자기들을 내보이기를 원했다. 그러니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하셨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기도의 결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영수증이 이미 지불되었다. 더 이상받을 것이 없다. 남은 것은 화뿐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기도 하지 말라 → <공예배 기도> - 길게 하는 것, 미사여구를 사용, 가끔보면 자기도 이해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식사기도 때 설교하는 것> - 창세기-계시록까지 but 식사기도는 빼먹는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도하라.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이 중요하다.
주기도문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다. 사람이 들으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2. 이방인들의 중언부언 기도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자녀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역시 잘못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르기 때문에 내가 계속 말을 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알 수 있도록 설득시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시139:4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혀에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나이다. → 내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응답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어디 있는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고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신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 아신다. 내가 그에게 지금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신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신다.

7절"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 중언부언(피트파트=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뜻도 모르면서 따라하는 것) →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똑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든지 흘러내리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해서 전심으로 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문제이다.

중언부언은 이방인들의 특징이다. 왕상18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행19장에도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서 연극장에 모였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두 시간이나 계속해서 외쳤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이와 같이 중언부언하는가?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자기들의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가 길면 길수록, 기도에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기도할 때 이방인들의 잘못된 영향을 받아서, 그들마저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암송하던 두 개의 기도문이 있었다.

첫째, 쉐마라는 기도문이다. 신6:4-9, 11:13-21, 민15:37-41의 말씀을 발췌해서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기도문을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다.

둘째, 쉐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이었다. 이는 히브리어로 18이라는 숫자를 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18가지로 압축했다. 그리고는 각 경우에 적합한 기도문을 만들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마다 그 장황한 기도문을 암송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기도문을 진실한 마음으로 암송 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but 그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암송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기도가 아무리 길었다 한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과 뭐 다르겠는가? → 주기도문도 이렇게 될 수 있다.

3. 우리의 바른 기도의 결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드리는 바른 기도 →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결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드러나는 기도, 외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찾아오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등을 돌려버리신다. 하나님은 귀를 막으시고 응답치 아니하신다. but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은밀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찾아와 주신다.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여러분, 자기에게 골방이 있고 그 골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주목해 보라. 다른 데가 있다. 삶은 힘든 것 같고, 그의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는 몹시 무거운 것 같지만, but 그 얼굴에 기쁨이 있다. 여유가 있다. 평안이 있다. 그런 사람을 쫓아가서 가만히 살펴보면 그에게는 골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잠잠히 보시며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그 분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 환경에도 그 사람은 웃고 기뻐하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써 놓은 것을 보았다. 기상이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계속 흔들리고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다. 벨트를 매라는 신호가 나온다. 그런데 뒤에서 자꾸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돌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귀에 리시버를 끼고 있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걸 들으니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웃는데 자기 혼자 웃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즐거운 것이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깨달았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저 사람은 듣는 것이 있고 나는 듣지를 못한다. 그것이 틀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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