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삿 6:11-16)

  • 잡초 잡초
  • 726
  • 0

첨부 1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삿 6:11-16)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기드온이란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름 받아 단지 300명 용사로 무려 135,000명 미디안 사람들을 무찔러 버린 장본인입니다. 분명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대항해서 싸우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설 같이 들리는 일당백의 싸움도 아니고, 일당 사백 오십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따라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기드온은 우리와 달리 무언가 특별나고 비범하며 대단한 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7년 동안이나 약탈당할 때입니다.  6장 2절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약탈을 피하여 산으로 도피해가서 토굴 파고 산성 수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피처일 뿐 아니라, 재산과 필수품들의 은닉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사람들은 그 산까지도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의 토지소산과 짐승들을 털어가버리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 평지에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할 선민의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6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 6:6).” 벼랑 끝에 도달해서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어 오기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십니다. 왜 지난 7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이 죄다 털리는 신세가 됐는지 말입니다. 6장 8절부터 10절 사이에 그 원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노예생활에서 구출해주셨고,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사람을 쫓아내시고 이 땅을 차지하게 해주셨다. 그리고 이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두려워해버렸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두려워했으니, 제물이나 잿밥도 바쳤을 겁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충성하고 의지할 대상을 이스라엘이 잘못 정한 것입니다. 6장 1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행위가 여호와 앞에서 악했다고 이미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 징계하실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지자를 통해 7년 침탈의 원인을 진단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제 회복시켜 가십니다. 그 회복 과정은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번 선거를 통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세우신 지도자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지금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작하다”에 “하바트”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막대기로 치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탁 트인 마당이나 들판에서 밀은 타작됩니다. 당시에는 타작용 신발을 신거나, 마차나 황소를 사용하여 밟는 방법을 썼습니다. 다만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이 막대기로 타작했습니다. 적은 양의 밀을 수확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막대기로 친 것은 가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11절 말씀에서 밝혀집니다.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들키면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대항하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막힌 장면이 그려지십니까? 미디안 사람들한테 속수무책 털리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보아온 기드온, 오죽했으면 소리도 소문도 내지 않고 숨기듯이 땅에 묻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려고 했겠습니까? 기드온도 별 수 없습니다. 여느 이스라엘 범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기드온 역시 어깨 펴지 못한 채, 숨죽이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눅 들어 있는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12절 “큰 용사여!” 영어로는 “mighty warrio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용감무쌍한 능력의 전사여!”란 뜻이지요. 이 땅의 어느 누가 기죽어 있는 일개 범부한테 용감무쌍한 전사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십니다. 미래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너 비록 일개 범부이지만, 곧 큰 용사 되리라! 주눅 들은 지금의 모습 속에서도 쓰임 받게 될 큰 용사를 발견해내시는 하나님! 목숨 두려워 주님 부인하고 도망치는 제자들 속에서도 로마 제국 변화시킬 믿음의 전사들을 보시는 하나님! 지금은 비록 평범하고, 연약하고 심지어 결함투성이의 우리들이지만, 마침내 이 세상 변화시켜갈 신앙의 용장을 보시며, 지금부터도 우리를 “큰 용사여!, 믿음의 전사여!, 신앙의 용장이여!” 불러주시는 하나님! 여러분,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그런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느낌이나 판단은 틀릴 수 있고, 유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올바르고 우리에게도 언제나 유익합니다. 내 비록 잘난 것 없고, 대단한 것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리 인정하시니 아멘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게 겸손한 겁니다. 기드온의 위대한 승전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촌부 기드온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내가 큰 용사라고요? 하나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요? 주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어찌하여 미디안 적들에게 노예로 팔려간 것이나 다름없이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까? 계속해서 따져 묻습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끌어내면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이적이 지금은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지난 7년 동안의 가혹한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동안 왜 아무 말 없이 침묵하셨고, 우리를 방치하셨습니까?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구원자 여호와 맞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좋으신 분 맞습니까? 우리가 범죄하여 자초한 시련을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는 인류의 전형적인 항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선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선지자 통해 그 고통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이 자초한 것이라고 이미 답변하셨기 때문입니다. 곧장 소명 주십니다. 14절 “내가 함께하여 지금 주는 이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라. 내가 너를 보낸다.” 하나님께 등 돌렸던 이스라엘이지만 그래서 버림받아도 할 말 없는 이스라엘이었건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선민들을 사랑하여 구출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한 때 하나님을 등지고 산 적 있습니다. 그래서 전후좌우 캄캄하여 답답한 적 있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든 삶을 이어간 적도 있습니다. 이런 세월 언제 끝나나 한숨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릴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와 이처럼 따뜻하게 품어오셨습니다. 우리는 영혼 사랑하여 영혼 구하려는 하나님 마음 이미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구출을 위해 기드온을 파송하고자 소명하십니다. 여러분, 이 소명은 비단 기드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지요? 하나님의 이 소명은 베드로 전서 2:9을 통해서 우리 귀에 지금도 메아리쳐 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주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을 이끌어오는 오늘의 기드온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높은뜻숭의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높은 뜻 이루며, 그 높은 뜻 전파하는 사명자로 우리 모두를 파송하고 계십니다. 목회자로 소명 받게 하시고, 사회 속 직업으로 소명 받게 하십니다. 목회자든 성도들이든 만나는 영혼들을 하나님 진리의 빛에 들어가도록 돕는 제사장으로 하나님께서 파송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겁먹고 주눅 들어 있는 범부 기드온이 주저주저 하는 모습은 15절에도 계속됩니다. “주님 무슨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하겠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저의 집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고,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졌습니다. 저는 큰 용사 못됩니다. 자격 없습니다. 자질 없습니다.” 이후에도 세 차례나 표적을 구합니다. 소명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중 어른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6장 27절. 심지어 미디안을 치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엿보입니다. 7장 10절. 이런 기드온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발견됩니다. 부담스러운 사명과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할 때 표출되곤 하는 반응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부적합하다고 느낄 때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감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호응해주지 않고, 따라주지 않을 것 같을 때는 두렵기조차 합니다.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결정타를 날립니다. 16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바로 여기에 위대한 사건의 핵심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여러분, 우리는 무능하기보다는 유능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실력도 키워야 합니다. 인간의 유능함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인간의 유능함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사실 인간이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인간이 높아봤댔자 얼마나 높겠습니까? 인간이 가져봤댔자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그 대단해 보이는 권세와 물질, 알고 보면 일순간에 사라지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평범하고 연약하며 심지어 결함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위대한 역사는 반드시 일어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함께 하시면 사람변화 시키는 회개와 감동의 위대한 역사 일어납디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면 예상치 못한 결과 나타나는 위대한 역사 일어납디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함께 하시면 기적 같이 일 성취되는 위대한 역사 일어납디다. 하나님의 강건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떨어지지 않는 열매 맺는 위대한 역사 일어납디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미디안과의 전쟁에 동원되는 이스라엘 군사의 수를 특별히 단속하십니다. 7장 3절부터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선 135,000 미디안 군사와 싸울 이스라엘 군사의 수를 32,000명에서 10,000명으로 줄이십니다. 그것도 많다고 또 다시 300명으로 줄이십니다. 7장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려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 사람의 수와 인간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철저히 막으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때때로 우리 스스로 확보해놓은 안전장치가 해체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요구하신 것은 유능함도 탁월함도 비범함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대한 충성입니다. 사사기 6장 25절,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아버지 집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내라고 하십니다. 미디안 7년 침탈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충성했기 때문이었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바로 그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고전 4:2 말씀처럼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사랑하고 있는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차분히 묵상해보십시오. 내려놓고 폐기해야 합니다. 오직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주님만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만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안에서 안심하게 되는 나의 안전장치는 무엇입니까? 차분히 묵상해보십시오. 해체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오직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인지라 기도온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 충성되이 순종해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일당 4백5십의 싸움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훗날 신약 히브리서는 기드온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들은 확실히 귀합니다. 아무나 쓰임 받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쓰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위대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라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일로 어떤 사명으로 보냄 받고 있습니까? 혹시 자신은 부족하고 약하며 결함투성이라고 여기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하나님께선 우리를 큰 용사라고 부르고 계시는데 여러분께서 자신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높이는 교만입니다. 단지 한 가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충성하십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교회를 통해 위대한 역사 이루기 위해 함께 하십니다. 이 대강절 기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찬양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