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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삶의 주유소 (수 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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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삶의 주유소 (수 8:30-35)

오늘 성경에는 온 이스라엘이 민족적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치고 계속 진격하는 전쟁 중입니다. 이 때 아이성에서 30km 북쪽으로 떨어진 세겜 땅 벧엘 근처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산이 있는 골짜기로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백성을 다 이끌고 이 땅에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몰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9장 1-2절을 보면 가나안의 여섯 왕이 남부 동맹군을 만들어 연합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런 때 에발산과 그리심산의 골짜기로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을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갑니다. 기름이 떨어진 차가 주유소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신 27:1-8에서 말씀하였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과감하게 그 말씀을 전쟁 중에 지키는 것입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영적 삶의 주유소입니다. 달리던 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전투하던 비행기도 공중 주유를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예배는 영적 에너지를 채우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현장입니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는 생활의 핵입니다. 인생의 승리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승리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예배에 있습니다.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과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에게는 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와 예배에 실패하는 자입니다. 아벨은 예배에 성공했지만 가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예배에 성공했지만 사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세리는 예배에 성공했지만 바리새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사역이 예배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생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의 빛에 완전히 싸여 지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중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회개의 역사가 있습니다. 생명의 구원을 받습니다. 인격이 변화됩니다. 질병이 났습니다. 기적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지혜를 받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와 부귀영화를 받았습니다.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6장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았을 때 3백명으로서 모래알 같은 미디안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대상21:22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니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쳤습니다.
대상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위하여 우리의 정성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계획하고 계신 모든 역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예례미야 29장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능력을 체험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예배 받으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 삶의 주유를 받는 성공적인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1. 제단 중심의 예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30-31)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여호수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협곡에 들어가 처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1)어느 산에 만들었습니까?
에발산입니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는데 에발 산은 저주를 위해, 그리심 산은 축복을 위해 이미 선택된 산입니다(신 11:29). 그런데 에발산에 단을 쌓습니다. 왜 저주의 산인 에발산에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까? 저주를 제단을 통하여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갈3:13).

2)제단을 어떻게 쌓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자기 임의로 만든 단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단입니다.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모세가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27:4-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철연장을 통하여 이방 신상을 만드는 가나안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미 모세를 통해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출 20:25)"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방 사람과 같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다듬지 않은 돌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저주의 산에 세워진 다듬지 않은 돌로 세워진 제단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제물이 되어 우리를 단번에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뜨인돌(단2:34)로 상징했으며 시편기자는 건축자의 버린돌(시118:22)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했습니다.

3)제단을 무엇을 위해 쌓는 것입니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번제'는 속죄함을 받기 위해 짐승을 다 불태워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 헌신을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레 1:13-17). '화목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와 친교를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레 3:1-16)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단 번에 속죄제물이 되셨고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바쳐졌습니다.

4)제사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구약에 번제와 화복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와 항상 만나야 할 분이 우리를 위해 단번에 십자가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쉽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많은 유혹이 있고 핍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단번에 속죄 제물과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이미 요단강을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여리고 성이 있고 아이성이 있고 남부 연합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승리도 하지만 실패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고 지치고 쓰러져 힘을 일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일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의 현장에 있는 아이성의 죄를 용서받고 정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듯이 우리의 심령이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난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진학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결혼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앞에 있습니다. 이런 때에 먼저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예수님을 만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을 만나 살아났습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남편 다섯을 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에 나와 우리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 충만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2. 율법을 돌에 기록하는 예배 즉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32)/율법을 그 돌에 기록

1)여호수아는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무엇을 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율법을 돌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의 핵심적인 규정 명령들을 그 돌에 세긴 것입니다.

2)그 돌은 어떤 돌입니까? '그 돌'은 징으로 쪼지 아니한 거칠거칠한 제단의 돌이 아니라, 신 27:2, 4의 규례를 따라 석회로 매끄럽게 칠한 돌을 말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신 27:2)" 돌에 징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왜 석회를 칠하고 율법을 기록하라고 했습니가?
돌에 석회를 칠한 후 사람들이 쉽게 보고 읽을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분명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삶이 말씀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증거되고 말씀이 심령에 새겨지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증거되고 하나님의 교훈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믿음도 말씀을 들을 때 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어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책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년에 신간도서가 2만 5천 종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그 무수히 많은 책 중에 인간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책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 메시아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 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됩니다. 요20:31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벤허를 지은 웰레스는 기독교 불필요성과 모순,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벤허를 지었습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도 말씀을 통해 변화되어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누리게 됩니다. 말씀은 살아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렘15:16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말씀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불안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말씀을 들음으로 평안이 옵니다. 번민과 고뇌에서 헤매던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소망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나태와 게으름으로 인생을 살던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열정이 생깁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회복되는 새사람이 되어 장성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라고 했습니다.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바른 신앙으로 올바로 가르치고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책망은 말씀을 근거로 꾸짖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당하게 행동하고 돌아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르게 함은 책망의 목적으로 말로써 허물을 교도함을 말합니다. 의로 교육하는 것은 들은 바를 실행하도록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 하나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나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선한 일을 우리고 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주고 불타는 열정을 주고 사명자로 그 일을 감당할 만하도록 자격을 갖추어 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이 모든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적합(딤전5:20 딤후2:21 딛3:1)한 것입니다. 존 번연은 말씀을 읽는 가운데 천로역정을 지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읽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19,20절에 감동되어 선교사가 되었고 아프리카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사54:2 말씀을 보고 세계를 향한 선교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명자로 서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나님의 말씀 붙들고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열정을 주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성경을 받아들이고, 읽고, 연구하고, 기억하고, 반영하면은 가슴이 불타고 사명으로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에 열정이 붙습니다.


3.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 즉 삶의 변화가 있는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모든 말씀 낭독하며 아멘으로 화답(33-35)
여호수아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돌에 석회석을 입힌 후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1)그 후에 무엇을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게 한 것입니다.

2)어떻게 낭독하게 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두 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수에 넣지 않았던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좌우에 서게 하였습니다. 절반은 그림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받아 다시 큰 소리로 백성을 향해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임의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 27:12, 13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여섯 지파(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서고, 또 다른 여섯 지파(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는 저주의 산인 에발 산에 서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때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가운데 선 후 율법을 선포합니다.

3)이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멘으로 화답을 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200만 여명이 그 계곡에서 모여 여호수아가 말씀을 읽으면 다시 제사장들이 받아서 큰 소리로 백성들을 향해 외치면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합니다. 얼마나 장엄한 예배이겠습니까?

신 27:15-26에 나오는 12조항의 저주의 율법과 신28:15-68에 언급된 저주와, 신 28:1-14에 언급된 축복의 말씀을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2)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3)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6)"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또 저주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 때에도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6)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7)"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0)"

파스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세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으로 분류하면서 이들을 각각 '어리석은 자', '불행한 자', 그리고 '행복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은 아멘이 없습니다. 하나님를 탐구하는 인생은 늘 물음표를 던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은 어떤 말씀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아멘의 의미는 '확실한, 확고한 신실한, 진실한'입니다. 부사로는 '확실히, 진실로'를 의미하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 질지어다'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반복 용법은 '가장확실하게'와 같이 최상급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그 성취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왕상1:36에서 브나냐는 솔로몬의 즉위식을 지시한 다윗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움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말입니다.
시편106:48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예배시의 기도의 응답이며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고 아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와 축복의 말씀을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자신이 말씀대로 살면 축복이 임하고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와같은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드릴 때 기도할 때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기도에 찬동하는 것입니다. 대표자나 찬양대가 하나님을 송축하거나 그러한 기도를 할 때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하였습니다(느8:6; 대상l6:36). 시편의 처음 4권의 끝부분(4l:l3[l4]; 72:19; 89:52[53]; l06:48)에 나오는 찬미는 모두 아멘으로 응답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멘은 대략 126회가 나온다고 합니다. 문장 초두에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아멘을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확실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위엄과 권위의 표현입니다. 문장의 종결부분에 나올 경우입니다. 기도나 송영의 끝부분에 나옵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냅니다.

아멘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3:l4에서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질적으로 아멘의 역어인 참된 증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65:16는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할 때 그 아멘 속에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아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아멘'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아멘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널리 사용되는 세 가지 성경 단어 중 하나입니다. 마라나타! 할렐루야! 아멘! 우리은 아멘 생활이 풍성해야 합니다.

스위스의 세계 최대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특히 예배에 있어서의 신인식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도(神認識度)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벌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차이는 신인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의 사람은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것을 믿고 의지하는 신인식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에 영적 삶의 주유소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예배의 승리가 인생의 승리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 중에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그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여 삶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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