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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인도하소서 (창 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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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인도하소서 (창 46:1-4)

지난 2주간의 특새를 통해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고 여러분 모두가 열심으로 새벽을 깨워 주었다. 거룩한 손 높이 들고 보좌 위에 계신 왕 앞으로 나아갔던 2주간이었다. 큰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자. 3시부터 성도들의 줄이 이어지고 4시에 본당이 채워지는 것을 보고 이게 왠 거룩한 난리(?)인가 싶었다. 매일 3,2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이중에 2,500여 명의 성도들이 개근을 하였다. 한 시간 반 전부터 열심을 내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였다. 첫째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갈급하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그 어느 때보다 기도와 말씀이 필요한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교회의 20주년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기도로 우리 심령의 지경을 넓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잘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매년 이 때에 특새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기도로 한 해를 돌아보며,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upgrade할 것은 그렇게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해를 기도로 준비하며 새로운 계획들을 마음에 새기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계획할 때에, 혹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즉 ‘fear of unknown’의 마음이 생긴다. 이러한 fear of unknown에 대한 역사적인 예화가 하나 있다. 페르시아가 강국이었을 당시에, 페르시아 황제가 포로들을 앞에 두고 처형을 준비하며 그들에게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앞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사형에 쓰일 도구들이 보였고, 다른 한 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그 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더니 놀랍게도 그들은 예외없이 열린 문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잠겨 있는 문에는 어떤 길이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길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fear of unknown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아는 것이 조금이나마 평안을 줄 수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길이라는 이유로 닫힌 문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지 못하는 길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에게도 있었다. 그는 지금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을 향해서 출발하고 있다. 그들은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오래 전에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것도 애굽의 총리로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더욱 이런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요셉이 아버지를 위해서 보낸 수레를 보고 다소 믿음이 생길 수는 있었겠지만 그의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이 report한 내용도 듣기도 했겠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받아드리며 애굽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앙교훈은 이 땅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 애굽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때 아브라함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고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으니 이것이 야곱의 신앙교훈이 되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야곱은 조상의 신앙교훈을 외면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온 가족과 함께 이민을 왔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시대에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두려움을 극복하여 온 가족을 이끌 수 있게 된다. 우리들도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며 여러가지 일을 준비하게 된다. 우리 교회도 새해에는 교육선교관을 준비해야 하는 큰 project를 앞두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같이 알 수 없는 새로운 미래 환경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치밀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첫번 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떠한 틀이나 형식에 담아두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한 장소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온 세계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 야곱의 환경 속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 안에 애굽을 포함시키시고 있다. 우리의 생각, 상식, 방법, 그리고 전통을 가지고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이번에 오신 특새 강사님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우선 이찬수 목사님은 물 위를 걸으려면 보트 안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보트 안에 삶의 평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선입관을 깨뜨려야 한다. 주님은 두려워 말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베드로가 배에서 뛰어내리니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트 밖에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Francis Chan목사님은 성령오심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떠날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니 이를 들은 제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떠나야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로마서8:11을 보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신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이번 특새 때에 중독이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하였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담대히 나와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자주 ‘주님 안됩니다’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우리에게 더 이상 안된다고 할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며 오직 우리를 인도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선입관을 없애고 우리의 생각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2)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야곱은 희생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저 했다. 사실상, 그의 상황은 한 순간에 풀리고 있었다. 그의 상황을 보자. 죽었다고 믿었던 요셉이 살아서 돌아왔다.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그를 위한 수레까지 보내주었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은 상황을 따라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며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비록 세상 일이 꼬이고 있더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다락방에서 다윗을 공부하고 있다. 두주 전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상24장에서 다윗이 절호의 기회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그를 찾아온 사울은 급한 용무(?)때문에 한 굴을 찾아서 혼자 들어온다. 그런데 수많은 굴 중에서 그가 들어온 굴은 정작 다윗이 숨어있는 굴이었다. 사울왕은 혼자이었고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상황을 보고 판단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판단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하였고 결국 자신의 칼을 들지 않았다. 상황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인기가 있을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지만 주님은 무리를 떠나서 산 위에 오르시곤 하였다. 왜 그런가? 그 분위기로부터 자신을 옮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저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하는 QT는 이런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매일 조용한 시간을 택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또 우리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다. 예레미야15:16을 보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선지자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새는 말씀과 기도의 자리이다. 진짜로 우리가 사모하고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천지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오늘도 말씀의 밥상을 차리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

(3)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인간적으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야곱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창세기46:7절을 보면 한 사람도 남기도 않고 모든 자손이 야곱과 함께 떠났다고 했다. 혹시나 모르기 때문에 몇 사람은 남기고 갈 수도 있었다. Just In case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matter of choice)가 아니다. 이것은 오직 순종의 문제(matter of obedience)이다. 사도행전16장에는 사도바울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 역사가 나온다. 그는 순종하여 소아시아로 향하지만 하나님이 막으신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비두니아로 향하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는 이번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행동을 준비하는데 환상을 통해서 마게도냐를 보게 된다. 그리고 유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결국 유럽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이후에 세상이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모든 구체적인 일에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믿음을 같고 약속을 의지하며 행동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실패하기 쉽다. 어느 정도 방향이 잡히면 나아가야 하는데 더 구체적인 것을 보여 달라며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걸을 것을 요구하신다. 물론 실수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운전하다가 detour sign을 만나면 안내하는 길로 우회해야 한다. 불평하고 비난할 수 없다. 믿음과 순종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한 step만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 한 step을 밟으면 다음 한 step이 보이게 되어 있다. Walk one step, step by step, moment by moment 걸어 가야 한다. 멀리보이지 않아도 one step 만을 택하라.

(4)궁극적인 계획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곱의 온 집안이 이동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3, 4절)을 보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큰 민족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큰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명령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막연한 약속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picture를 보고 나아갈 때에 우리가 받을 수 궁극적인 명령이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볼 때에, 그리고 우리 교회로부터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picture를 보며 시작해야 한다.

우리 Holy Wave 예배를 보면, 이것은 당장의 상황만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만을 볼 수 없고 장차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아야만 한다. 우리들은 디아스포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특별한 환경을 보고 계획하시는 궁극적인 일과 당신의 궁극적인 뜻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에 이바지 할 수 있게 된다. 교육선교관 Project 역시 단순한 공간확보의 차원이 아니다. 소극적인 생각이라면 안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꿈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과 선교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대표적인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20-30년 안에 복음이 온 나라와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하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하고 선교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을 받은 종들이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시지만 우리들이 들을 수 없다면 이것은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우리에게 큰 나무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20-30년 전에 나무를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선교관 project를 두고 왜 두려움이 없겠는가? 20 million짜리 project이다. 말씀과 약속 가운데 담대히 나아가는 것 뿐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는 것 뿐이다. 이것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road map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의 방향 감각을 가지고 두려움 속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road map을 가지고 따라가면 된다. 이것을 따라가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자.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목자되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동행하며 그 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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