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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을 준비하셨나요?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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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준비하셨나요? (마 25:1-13)

  프랜시스 쉐퍼 박사의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반대로 이성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 시대에 나타나는 세속주의, 성, 음주, 스포츠, TV, 오락, 폭력, 마약복용과 신비주의 이단이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성으로부터 도피하려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인생관, 가치관, 신관, 종말관 없이 되는 대로, 감각적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있다. 그래서 자기상실과 혼돈으로 이어져, 급기야 법도 질서도 필요 없는 사회, 두렵고 슬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말현상이다. (딤후3:1-5)은 종말 현상을 말씀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다. 정신차리고 살자. 오늘 본문은 ‘열 처녀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관해 말씀하신, 유명한 비유다.

  예수님은 우주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주님의 재림을, 혼인잔치의 때에 비유하고 있다. 그때가 가장 중요한 비유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유대의 결혼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결혼식은, 크게 3가지 순서가 있다. (1) 먼저 약혼예식이 있다. 약혼할 때에는 선물을 주고받는다.

(2) 결혼예식이 있다. 약혼 후에 어느 기간이 지나면, 결혼예식을 거행한다.

(3) 결혼잔치가 있다. 결혼예식이 끝난 다음에, 잔치를 배설해서 손님들을 대접하게 된다.

유대인의 결혼식에도, 3가지 순서가 있다. 다만 이름과 순서가 다르다.

① 우리는 약혼식을 하지만, 유대인은 정혼식을 한다. (마1:18)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했다. 이 정혼은 우리나라의 약혼보다, 법적으로 훨씬 더 무겁고,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만일 정혼한 다음에 도무지 결혼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면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 때, 파혼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당시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식으로 이혼하는 방법이 있다. 율법에 따라 이혼할 때는, 이혼증서를 써서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슬그머니 그냥 파혼할 수 없다. 이렇게 정혼은 법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② 잔치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 예식을 먼저 거행하고, 잔치를 배설하지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잔치를 먼저 하고, 결혼 예식을 나중에 한다. 결혼 잔치를 온 마을의 경사로 여겨, 일주일간 벌인다. 신랑은 신부집으로 갈 때,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축복 받기 위해, 일부러 긴 코스로 간다.

  신랑은 먼저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배설한 후, 그 친구들과 함께 나팔을 불며, 신부의 집을 향해 행진한다. 신부측에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친구들 10여명을 초청해서, 함께 신랑을 기다린다. 모든 처녀들은 등불을 준비하고, 춤을 추며, 신부 집 앞에서 잔치를 즐기며 기다린다.

  그런데 언제 신랑이 올지 모른다. 물론 신랑이 나타낼 때, 팡파르가 울리고 “보라 신랑이다!”라고 알리지만, 오늘 밤인지, 내일 밤인지, 모래 밤인지, 정확한 날과 시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신랑만 안다. 신랑이 오면 모든 처녀는, 등불을 밝히고 신랑을 맞이하여, 신부집에 함께 들어간다.

  이때 두 그룹으로 나뉜다.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하는 기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지만, 기름이 없어서 불을 밝히지 못하는 신부는, 신랑과 함께 결혼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신랑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면, 그땐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뒤늦게 기름을 구해도, 잔치집의 문이 닫히면, 문열어달라 해도 열어줄 수 없게 된다. 이 비유의 핵심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13)는 말이다. 왜냐하면 언제 종말이 올지,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말이 있다.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시는 마지막 날이 있다고 말씀한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말을 항상 준비하고 살아야한다. 개인적인 종말이나 우주적인 종말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날은 돌이킬 수 없는, 단 한번의 사건인데, 기쁨의 잔치가 될 수도 있고, 가장 가슴아픈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듯이, 우리에게는 재림의 날이, 최고의 날이 되시기 바란다.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귀중한 교훈들이 무엇인가?

1. 형식보다는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

많은 분들이 기름은 성령을, 등은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말씀만으로 안 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문제가 많다.

  만일 기름이 성령이라면, 등에 불을 켜게 되면 기름이 점점 줄어드는데, 그러면 말씀에 불을 켜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점점 없어진다는 말인가? 기름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처럼, 성령님이 우리에게 있다가 없어질 수 있는가? 이는 성령님을,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하는 데서 오는 오해다.

  인격이신 성령님께서는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에 성령님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서 기름만 나오면, 다 성령으로 생각하면 무리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옳다고 본다.

  본문에서 기름은, 신앙의 내용을 상징하고, 등은 신앙의 형식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삶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혼인잔치에 들러리로 초대받았고, 똑같이 기쁨으로 신랑을 기다렸던 자들이다. 한 밤중에 다 같이 졸고 있었다(5).

  열 처녀는 모두, 외형상으로는 등불을 준비했다. 그러면 지혜로운 처녀와 미려한 처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기름의 준비였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불은 있으나,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형식은 있으되 내용이 없었다.

  미련한 처녀들과 지혜로운 처녀들은, 겉으로 보면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형식적으로 보면, 다 똑같이 보인다. 모두가 똑같이 준비된 처녀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내용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전혀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이 보통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문제가 될 시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형식을 지키고 유지하기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주님은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물론 신앙의 형식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형식들 안에, 진짜 내용이 있는지, 실제로 점검해 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다.

  교회에 올 때 보면, 다 성도요, 경건해 보이지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없다. 어떻게 진짜 인지 알 수 있는가? 내가 혼자서 있을 때,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나요?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나요? 교회에서 예배할 때처럼, 진지하게 일하고 있나요?

  만나는 모든 이들을 배려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나요? 때로는 갈등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를 시도하고 있나요? 성경에서 그토록 많이 강조하고 있는 섬김과 봉사, 전도의 삶을 실천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전도해 본 적이 있나요?

  전도와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물질을 사용하고 헌금하고 있나요?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시나요? 우리의 삶에 갑자기 어려움이 찾아오고, 환란과 고통이 밀려 올 때, 원망과 탄식을 마구 쏟아내지는 않는지요?

  신앙의 내용이 있으면, 위급할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원망대신 회개하고 찬양한다. 외적인 신앙 형식, 예배, 봉사, 섬김, 교제, 훈련, 전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주님을 맞을 수 없다. 신앙의 진짜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예배하는 능력, 더 봉사하는 능력, 더 사랑으로 섬기고 교제하고, 말씀 안에 거하여 전도한다. 믿음의 모양보다, 복음의 능력, 주님의 인격,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어두움의 일을 벗어 던지고, 신실한 삶으로, 빛의 자녀로 삶을 살자(엡5:8-9).


2. 믿음의 내용은, 타인의 것으로 채울 수 없다.

갑자기 밤늦게 신랑이 도착했다.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등을 보았다. 기다리는 기간이 길어서, 준비한 기름이 떨어져 버린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에게 다가가,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조금만 꿔달라고 요청한다. 이상할 것이 없다.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그런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이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여지없이 거절한다. 얼른 보면, 매우 인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신앙의 내용은, 서로 빌려주고 빌릴 수 없다는 말이다. 구원은 어느 누구라도 대신할 수 없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아내의 믿음을 가지고, 남편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믿음을 가지고, 자녀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마지막 때의 구원은, 자기가 가진 믿음으로 받는다. 전도해보면 가끔, “목사님 제 아내가 믿음이 좋은 집사(권사)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철야기도도 빠지지 않고, 또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러니 아마 제가 죽을 때, 저희 아내 치마폭만 꼭 잡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이 땅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마지막 때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자기 신앙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내 것을 가지고 서게 된다.

  결코 아내의 것, 부모님의 것, 형제의 것, 나를 도와주고 기도해 주는 목사님이나, 어떤 성인이나, 마리아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는, 반드시 내 믿음만을 가지고 서고, 상급도 내 것을 가지고 받고, 면류관도 내 것을 가지고 받는다.

  시카고의 무디신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지, 결코 손자란 없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면, 우리 자녀는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녀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부른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게 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내가 잘 믿으니까, 우리 자녀들과 가족들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따라서 부모님의 신앙으로, 아내의 신앙으로, 내 옆 사람의 신앙으로 승리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 신앙으로 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제가 나눠줄 수 있다면, 막 나눠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믿음의 내용을 가져야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르는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3. 천국에 들어갈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열 명의 처녀들은, 미리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온 후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름가게로 사러갔다.

  그러나 그 동안에 신랑은 도착하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준비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준비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병에 따로 기름을 준비해 온 것을 보았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그 때라도 가서 기름을 준비했어야 했다. 기다리다 못해 졸며, 잠들 정도로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아무 대책도 없이 졸면서 보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형식이나 외식이 통한다. 겉으로 거룩한 척해도 통할 수 있다. 제 믿음이 최고라고 주장해도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믿음의 본색이 드러난다. 기름 없는 등에는,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이 꺼진 다음, 더 이상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회개해도 부르짖어도 안 된다. 인생의 최대 비극은,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과 영원히, 그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순간이, 가장 비참한 비극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 기회를 놓쳤고, 그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종말의 날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공급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오직 오시지 않았다. 이는 지금 준비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많은 날들을, 그 기회들을 덧없이 보내버리고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진짜 중요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초대되는 구원의 기회는, 오직 이 땅에서만 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다고 착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교회에 나갈 수 있고, 성경공부 할 수 있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할 수 있고, 전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기회는 그렇게, 우리에게 계속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 누구에게나 그 기회의 문이, 아주 닫혀 버릴 때가 반드시 온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영원히, 그 기회는 닫히게 되었다.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들을 놓치지 말고,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하며, 전도하며,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사는, 삶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시간에, 어느 순간에, 주님을 만나야 할 때가 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하는지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지구 종말까지의 시간을 추정하는, 둠스 데이(Doom’s Day)시계가, 11시 55분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시계는 시카고 대학의 저명한 학자 50명과, 인터넷으로 수렴한 일반인의 의견을 종합하여, 상징적으로 지구의 멸망 시간을 보여준다.

  국제 간의 분쟁과 핵 위기, 생태계 파괴, 질병, 계층 간의 갈등 등으로, 종말의 시간이 앞당겨지고 있다고 세상도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경고는 더욱 긴급하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종말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맞아야 하나?

  로마제국이 부귀영화를 누릴 때, 베스비우스 산 중턱에는, 2천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AD63년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마을 주민들에게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것이오. 살 길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곳을 떠나 이사하는 것이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과 성적쾌락 세상쾌락에 빠져있기에, 그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 후, 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 화산은 폭발했고,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예수님의 재림인 우주적인 종말과,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가게 되는 개인적인 종말이 와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준비가 되었나요? 교회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돌아온 어린 소녀가, 엄마에게 “엄마 교회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거래요, 그게 맞아요?”

  엄마는 딸이 너무 귀여워서 “암 맞고 말고”라고 하였다. 그때 어린 소녀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 엄마는 작년에 미국 갔다 오시고, 금년에는 유럽에 가시는데, 다른 나라에 가실 때마다, 여행 준비를 열심히 하시는데, 왜 천국 갈 준비는 하지 않으세요?” 엄마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가장 진지한 여행, 육체를 버리고 떠나가는 마지막 여행에,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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