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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 (행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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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 (행10:1-8)

이솝의 우화 가운데 보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거위가 한 마리 생겼습니다. 거위가 매일 알을 하나씩 낳는데, 신기하게도 황금으로 된 알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농부가 횡재를 한 겁니다. 매일 황금 알을 챙기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젠 고된 농사일 하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거위 뱃속에 황금이 가득할 것이니 배를 가르면 크게 횡재할 게 틀림없어!" 그래서 배를 갈랐는데 황금은 보이지 않고 거위만 죽고 말았습니다. 농부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사실이고 결국 그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전1:7-8절에 보면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 하도다" 강물이 아무리 흘러 들어가도 바다가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심으로 만족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가 되는 고넬료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고넬료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주어진 일터에서 얼마든지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채워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고넬료를 통하여 유대인에게만 갇혀있던 복음의 물꼬를 이방인에게까지 열어놓은 다리 역할을 한 기독교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그의 삶이 얼마나 멋있던지 그가 머문 자리는 정말 향기가 나는 복된 자리 였습니다. 여기 1-2절을 보십시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는 당시에 흔하지 않던 일입니다. 이방인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도 드문데 이 사람은 고급 장교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도시인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이달리야대)의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군인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중대장에 해당되지만, 그 지위와 권세는 비교가 되지 않게 컸습니다. 대개 식민지 주둔군이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일제 치하에 일개 순사만 되어도 얼마나 세도를 부렸습니까?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백부장은 그 당시 상당한 지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했습니다. 정복자로서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는 '경건'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이란, 신앙을 전부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경건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보면 '유세베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더 쉽게 설명해 보면 평소에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모든 가족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 인간이 그 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생활의 풍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최첨단 과학 문명으로 편리함과 품격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 대가로 결코 잃어서는 안될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 중에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지금 많은 가정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오늘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을 'Homeless Mind' 즉 가정을 잃어버린 마음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음 편히 쉴 곳인 가정을 잃어버린 것 이것이 오늘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의 근본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피곤하게 일하다가도 돌아가 편히 쉴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복잡하고 분주한 삶의 경쟁 한 복판에서 그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가 돌아가 편히 쉴 안식처가 없다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오늘 그 많은 사람들이 편히 쉴 가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대열에 끼여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유명한 소설가 빅토르 휴고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집과 가정은 다르다. 집은 나무와 돌과 타이루로 세워져 있지만, 가정은 사랑으로 세워진다. 집은 몇 십 년 동안 지탱되지만 사랑으로 세워진 가정은 수 천년 살아간다." 오늘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 가정의 위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족들 간의 세대차입니다. 너무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세대 차를 30년으로 보았는데 요즘은 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서로 세대 차를 느낍니다. 그러니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 차이는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서로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가정이 하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가족들 모두가 너무 바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마다 너무 바쁩니다. 서로 얼굴 볼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같이 먹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하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가정은 가족들 사이의 사랑, 가족들 간의 하나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현대 가정들이 세대차이와 만남의 상실로 가족들 간의 사랑이 무너지고 하나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고넬료는 자기 아내로부터, 자녀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7절에 보면 하인들과 그 집의 몸종들, 노예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대하기 위해 보낸 그의 종이 주인에 대해 뭐라고 평가합니까? 22절에 보면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고넬료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한 이방인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수가 있었고, 당시 종들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기 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여기 두 가지 그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많이 구제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항상 기도했다." 는 말은 일상적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 전 교계 신문에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어느 기관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 생활에 관한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고 있느냐?' 하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현재 한국교회 성도들의 하루 기도 시간이 25분을 넘지 못합니다. 2년 전 한국 갤럽에서 조사했을 때는 27분이었는데, 2분 이상 줄어든 수치입니다. 기도 시간이 별로 길지도 않지만 그나마 갈수록 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번 각자의 기도 생활을 잠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하루 평균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과거에 비해 기도 시간이 늘었는가? 아니면 줄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곧 내 신앙생활의 성적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겁니다. 흔히 기도를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우리 영혼이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이 지쳐버립니다. 죽어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육신적으로 건강하고 환경 조건이 좋아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결국 무기력해지고 실패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혼에 만족이 없고 삶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병자가 되고, 시체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많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실패합니까? 무기력합니까? 그것은 바로 흡족하지 못한 기도 생활에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 성도들이 얼마나 육신적으로 부유해졌습니까? 그리고 세련되어졌습니까? 하지만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시간이 줄고 있기 때문에 힘겹게 살아가는 겁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도를 쉬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기도 쉬는 것이 왜 죄가 될까요?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겐 필요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빠 하나님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한 문제는 하나님도 해결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불신앙입니다. 모두가 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빠른 것, 바쁜 것이 미덕인 것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오죽 하면 요즘에는 인사가 뭐죠? '바쁘시죠?'입니다. 그래야 상대방을 대단한 사람으로 존중해 주는 인사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조건 바쁜 것은 인생에 큰 독이 됩니다. 바쁘다는 뜻을 가진 한자가 뭡니까? 바쁠 ‘망’(忙)이죠. 한자로 써보십시오. 마음 '심'(?, 心)에 망할 '망'(亡)이 힙쳐진 글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일에 바쁘면 물론 좋지만, 생각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은 자칫 마음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혁자 말틴 루터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요즈음 더 바빠진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할 필요를 느낀다'고. 그는 실제로 하루 24시간 중 기도를 위해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 하루 2시간 이상을 기도로 보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빠지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핑계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이런 기도의 격언을 만들어 피차에 기도의 삶을 격려해 왔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시다면 당신은 정말 너무 바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막1장에 보면 하루의 스케줄이 얼마나 타이트한지 모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파김치가 되도록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이 되면 여전히 기도의 동산에 머물러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기도의 필요가 있었다면, 연약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의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바쁘다는 핑계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그뿐만 아니라 "구제했다."고 했어요. 그 신앙이 생활화되면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게 되는데 피점령지 사람들을 돌아보았어요. 정복자로서 그 약소민족에 속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았어요. 비참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었어요. 권력자가 피지배자의 형편을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구제를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도 친히 그가 전도하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에서 행전20:35절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교회에서 에바브로 디도 집사를 통해 선교비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감사하면서 하나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빌4:17-19절에 보면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축복을 나눌 때 더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오늘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이방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삶의 현장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보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4절에 "내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여기 '기억하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영혼 속에 있는 갈망을 보셨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안에 왜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까? 왜 교회를 그토록 오래 다니고도 참 구원받은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영혼의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십니까?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이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열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제가 당신을 사모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갈망이 불일듯 일어날 때 오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준에까지 성장할 줄 믿습니다. 여기 구제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한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에요. 고넬료가 하는 일은 정성껏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고넬료의 삶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심령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는 더 이상 옛사람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지금 세상 말로 하면 길목 좋은 곳에 와서 사람들을 얼마든지 등쳐서 한 밑천 잡을 수도 있었겠지요.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하나쯤 달리 산다고 부패한 세상이 달라지기라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있는 지위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에 사용되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축복의 통로로 아름답게 씀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성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머리 둘 곳조차 마땅치 않는 삶을 사셨지만,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다락방에서 성찬을 베풀며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또 당신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줍니다. 하나같이 당신을 깨뜨리며, 찢으시며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랑, 이 은혜를 깊이 깨달았다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깨고 지갑을 깨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깨트려 지고 나누어 져야 할 우리의 희생과 사랑의 결단을 있어야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도 이번 성탄을 이웃과 함께 보내야하지 않습니까? 우리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노유 1동에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 독거 노인이라든지, 소년, 소녀 가장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추석에 우리 교회가 섬겼던 쪽방 교회에서 쌀 요청이 왔습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 모두가 이웃과 함께 성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섬기는 쌀 한 포대 나눔 운동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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