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국가는 길에서 부를 찬양 (요 12:9-19)

  • 잡초 잡초
  • 600
  • 0

첨부 1


천국가는 길에서 부를 찬양 (요 12:9-19)

먼저 제 이야기 드리는 것이 쑥스럽긴 합니다만, 저는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너무 좋아하지도 않고 너무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감정을 누르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재미없는 사람이 된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배도 엄숙하고 조용한 예배가 제 성격에는 맞습니다. 요란하고 열광적인 예배는 잘 안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이상하게 설교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울지 말아야 한다!’ 다짐합니다.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아도 요즘 제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리 높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춤을 추며 뛰며 찬양하고 싶은 마음과 통곡하며 울고 싶은 마음입니다. 화산 폭발 전 같습니다.
  아마 이것이 터트려지는 날, 모두 다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 나는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까? 춤 출줄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걱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더욱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날,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땅에 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린 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예루살렘 시민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환영하였다고 읽으면 전혀 분위기에 안 맞습니다,
여러분, 지난 번 노무현대통령께서 평양을 방문했을 때, 평양 시민들이 연도에 서서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며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리했을까?’ 제 마음 속에 나도 그 무리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찬양해 보았으면 하는 갈망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나도 그들처럼 예수님을 찬양하고 기뻐 뒤고 에배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사람들이 보면 ‘저 사람 미쳤나?’ 할 정도로 내가 예배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메시야가 오셨구나!”하는 확신이 예루살렘 사람드에게 들었다는 말입니다.
‘메시야가 아니라면 어떻게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예루살렘에 입 소문을 통하여 좍 퍼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사로를 한 번 보려고,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얼마 멀지 않으니까,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의식만 엄숙했지,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정말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내어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표적을 행하심을 들었음이라"(17절)

사람들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메시야가 오셨구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베다니 마을까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타셨던 새끼 나귀의 주인도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선뜻 내어 주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너도 나도 예루살렘 성문으로 달려나온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살벌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2년에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지만 3년째로 접어들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귀신에 들려 기적을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어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마치고, 예수님만 나타나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56절에 보면 사람들은 모여서 수근수근 하며 말했다고 했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지 안 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왕의 행렬이 지나 갈 때나 하듯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환영 인파가 얼마나 많았으면,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논하였던 바리새인들이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고 했겠습니까? 
온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을 찬양하며 높이고 있는 것을 보고 ‘이제는 끝났다. 저 예수님을 도저히 죽일 수는 없다. 이제 저 분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왕이 되실 분이 분명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이렇게 높임을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이렇게 높힘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예수님은 이처럼 높힘을 받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과 38절을 보면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람산에 올라가다가 예수님을 그렇게 찬양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똑같이 찬양했습니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 사람들이 너무너무 화가 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찬양은 하나님에게만 올려드리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찬양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기적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그 사람들이 기가막히게 5일 뒤에는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무리가 됩니다. 월요일과 금요일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렇게 열광적으로 맞이하고 호산나! 찬양을 하던 그 사람들이 5일만에 완전히 180도 바뀝니다. “예수를 못 받으라! 못 받으라!” 외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유는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을 듣고 ‘이 분이 메시야구나!’ 생각했고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곧 로마 총독을 내어 쫓고,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천국 복음만 가르치다가 목요일 밤,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실망하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하나님 아들이라 사기친 자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을 신성모독죄를 지은 사람이구나. 자기가 메시아도 아니면서 자기가 하나님인 것 처럼 다니다니!’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의 태도가 확 바뀌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친 것입니다.
이유는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했던 것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적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인 것을 전혀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기적 때문에 열광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군마를 타고 중무장한 개선장군의 위풍당당한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왕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어째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십자가 영광이 드러나고 난 다음에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께서는 12장 23절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영광을 얻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광이 진짜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찬양해도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해보니까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사업이 일어나고 들어갈 수 없는 대학에 그 자녀들이 합격을 하는 일이 벌어지면 성도들의 눈도 달라지고 얼굴도 달라지고 말도 달라지고 감사도 달라지고 예배도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광을 모르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지금도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감사도 예배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감격해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라며 꺽어져서 원망과 탄식과 낙심이 빠집니다. 결국 주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십자가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직도 마음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죽고 난 다음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천국에 가는 길에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돈 생각, 사업 성공, 대학 입시, 건강 생각이 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천국으로 가는 길에 섰나?’ 그 생각만 날 것입니다.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 때 무슨 찬양을 하시겠습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지 않겠습니까? 찬양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찬양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조용히 찬양이 되겠습니까?
  사업 실패 때문에 구원받을 계기가 되었다고 실패를 감사할 자도 있을 것입니다. 병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 위하여 애통하며 눈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천국가는 길에서 부를 찬양이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뜨겁습니다.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마음을 온통 세상에 빼앗기고 살아서 그렇지 잠잠히 영으로 찬양해 주십시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가는 길은 죽고 난 다음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 믿을 때 우리 인생 길은 바뀝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로 바뀝니다. 아멘!
지난 주간 분주히 살았어도 사실은 천국 가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힘든 일이 있었어도, 실패가 있었어도, 죽을 병으로 고생했어도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을 걸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 그렇게 유명한 사람 그렇게 권세있는 사람도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닌데, 나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니 정말 참을 수가 없는 찬양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천국 가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면 성도는 항상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언제나 찬양하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성도들은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보면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 모습이 나옵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보좌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예배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선 성도의 특징은 찬양입니다. 환경, 여건을 초월한 찬양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찬양할 수 있습니다. 언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서게 한 십자가 복음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 가는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시 84:5-7)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세상을 이길 힘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에게 찬양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찬양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손발은 착고가 채였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밤 중에 그들은 찬양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찬양하게 한 것입니까? 기적으로만 하나님의 찬양하는 믿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감옥에서도 찬양합니다.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감옥으로 인하여 더 기쁩니다. 이런 사람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 찬양이 빌립보 감옥을 지진으로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기적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결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찬양하게 되어있습니다.
 
  [암에 걸린 것도 감사한다] 암전문의 이희대박사는 30년 동안 암환자를 치료하던 전문의인데 자신이 4기 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열 번 암이 재발 되었습니다. [희대의 소망]이란 책을 내서 암을 이기는 법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제시한 것 중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라!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구원으로 기뻐하라! 암 4기의 공포를 이기고 생명의 5기를 사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암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 뿐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보는 사람에게는 암 4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암 4기가 그를 절대로 절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심령에서 터져나오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찬양의 능력으로 그가 일어납니다. 암도 이길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춤을 추며 찬양해 보셨습니까? 통곡하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마땅히 그런 예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었지만 한번 그렇게 예배 드려본 적이 없으신 분들은 오늘 마음으로 소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 가는 길에서 우리가 부를 찬송입니다. 여기서 그 찬송을 부르는 자가 천국에서 주님 오실 때도 그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이미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제가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며 살고 싶습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누리게 되는 그 복을 오늘 제게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건성으로 흘러나오는 기도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구별하실 줄 아십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구별할 줄 압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면 주님은 그렇게 해주십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는 말할 것도 없지요.

정말 우리는 춤을 추며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찬양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아마 숨을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래서 주님은 지금부터 우리에게 예배를 여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도록 계속 우리를 영적으로 열어주십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오늘 성찬을 받게 됩니다. 살아계신 주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주님, 제 마음에 터져나오는 찬양으로, 통곡하는 기도로, 정말 제대로 표현이 있는 예배를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십시오.” 기도하시고 성찬을 받으시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