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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권세 (창 4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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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권세 (창 48:1-22)

I. 복의 근원

오늘 본문 야곱 가족교회는 창세기 12장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 이때부터 교회는 성도는 자신이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을 자손들에게 넘겨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란 말이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 교회는 복을 잠글 수도 있고 복을 열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축복하면 복이 임하고 저주하면 저주가 임했습니다. 세상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복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교회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교회엔 천국 열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교회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교회가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들에게는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앞장서 저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손에는 여러분들의 심장 속에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자식들보다도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달려갑니다. 갈 때 혼자 가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물론 병문안을 간 거지요. 아픈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갔지요. 이에 더하여 요셉이 알고 있었던 소중한 영적원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믿음의 조상에겐 축복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축복하는 일은 부모가 가진 가장 고귀한 권세요 가장 무거운 책임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 하루일과를 시작할 때, 아비는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합니다.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할때마다, 먼길을 떠나는 여행길에서, 전쟁터에 나가는 자녀들, 그들의 몸에다 손을 대고 아비는 축복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해서, 생일을 맞는 자녀들에게 아비는 그 몸에 손을 대고 축복했습니다. 수많은 축복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복은 부모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 때 자신이 걸어왔던 인생 여정의 모든 복을 담아 자녀를 축복하는 그 순간입니다. 아비 야곱이 그 복을 탐했던 것처럼 요셉도 지금 이 위대한 복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요. 꿈꾸는 사람은 축복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오랜시간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요셉이 이 놀라운 영적 원리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가나안 땅에서 요셉이 꿈을 꿀 때 17세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나이는 108세 할아버지 이삭의 나이는 168세였습니다. 이삭이 180세까지 살았는데 요셉이 잡혀간 이후에도 12년을 더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어릴 때 그 할아버지 품에서 요셉은 축복을 받으며 할아버지의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옛날 얘기해 줘. 칭얼거리면 너 아비 야곱이 얼마나 복을 그리워했는지.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했는지. 그래서 어떤 복을 받았는지 얘기했겠지요. 그리고 아비에게 조르르 달려갑니다. 아빠, 할아버지한테 아빠 얘기 들었어. 아빠 그거 진짜야? 그러면 아비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내가 왜 그 복을 그리워했는지 그 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문 48장 1절에 보면 강조하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곧" 달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말의 권세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지를 알고 살아갑니다.
축복하는 말, 믿음, 꿈, 비전...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일시적인 것들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참으로 귀한 것들이요 그것들이 영원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축복한다 그랬을 때에 아버지 축복은 무슨 축복이요 현금으로 주세요. 그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하는 말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은 내 인생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 엄청 더 귀한 유산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믿음이요 축복인 것을 알았습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의 예언자입니다. 부모의 예언대로 축복한 대로 자녀의 미래가 결정되어집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이 늘 하는 말은 자신의 명운을 결정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신구약 성경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격과 삶을 걸고 맹세한 얘기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말은 우리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쏟아놓았던 모든 말들은 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기적의 언어를 선포하면 기적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부정적인 말은 인생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부정적인 인격을 만듭니다. 긍정적인 말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긍정적인 인격을 만들어 줍니다.

말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생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말씀엔 인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태초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말은 칼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을 찔러 죽일 수도 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수술하여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이 말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할아버지 품에서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아주 어릴때부터 축복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지금 자신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이 놀라운 축복의 권세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내 아버지가 부어주신 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 심령밭에 떨어진 좋은 말은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요셉은 믿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엄마 아빠보다 머리가 더 커진 다음에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려고 하면 쑥스러워 합니다. 뇌의 구조가 커지기 전에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는게 훨씬 더 좋습니다. 아뿔사, 우리의 자녀들은 너무 커 버렸네.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렸네. 아니요.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이른 때입니다. 오늘 이 예배후의 축복의 권세가 회복되어 지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에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소중한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III. 축복의 의미

야곱은 지금 일어나기조차 힘들만큼 노쇠한 상태입니다. 요셉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침상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아마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축복하기전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서 가는 길에 루스 벌판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었고 자신에게 복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복은 네 후손에게 대를 이어 흘러갈 것이라는 겁니다. 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내것인양 자식을 축복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전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간증의 원문은 창세기 3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문과 간증하는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면 다른 모든 말은 그대로 간증하는데 한 말씀을 빼 놓고 있습니다.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35:11)는 말씀은 생략하고 요셉에게 전해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 왕가, 수많은 왕들,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가문이 아니라 유다의 가문에서 탄생될 것이기 때문에 유다에게 줄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전혀 얘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일찍이 하나님의 복을 이루기 위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다가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죽은 얘기를 들려줍니다. 왜 축복하는 좋은 시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슬픈 얘기를 들려주고 있을까요?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길은 임산부 라헬에겐 7절 "너무 먼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개역번역에서는 "오히려 격한 곳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지요. 내가 지금 축복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약속은 사랑하는 아내, 요셉에겐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으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지상 과제임을 강조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이 이루어질 무대를 확실히 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 47장 후반절에 보면 요셉에게 자신의 장지를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왜요? 애굽의 장례 실력을 못 믿어서 그랬을까요? 이 당시 애굽의 장례 실력은 역사상 세계 최고입니다. 미이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야곱은 귀족의 무덤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무덤을 가나안 땅 사랑하는 아내 곁에 써 달라고 합니다.

이 일을 어느 정도 간곡하게 부탁하느냐 하면 47장 29절에 보면 요셉의 손을 허벅지 아래에 넣고 맹세를 시킵니다. 옛 번역에서는 환도뼈에 손을 넣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즉 아버지의 생식기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까지 그곳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복은 너 혼자 받아 먹고 잘 먹고 잘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너의 대대로 거대한 강물이 되어서 흘러가야 할 복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아 네가 죽은 후에라도 이 사실을 기억시켜 반드시 이루어야 될 복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는 이 축복이 영원한 축복이요 천국의 축복이요 가나안의 축복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누구, 그 어느 대에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희생이 있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죽어 운구행렬이 가나안을 가게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애굽 예행연습을 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애굽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꿈, 우리의 마음, 우리의 비전, 축복을 애굽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야곱 가족교회의 마음을 가나안에 묻어두고 싶었습니다. 내 시신을 온 가족이 가나안까지 가서 묻고 돌아올 때에 그곳은 내 시신이 묻히는 곳이 아니라 거기는 너희들의 꿈이 묻히는 곳이다. 너희들의 축복이 묻히는 곳이다. 거기다 마음을 묻어 놓고 와야 되느니라. 너희들의 꿈을 거기다 묻어 놓고 돌아와야 되느니라. 언젠가는 그 꿈, 축복, 비전을 향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야곱은 축복이 갖는 의미를 확실히 해 놓고 축복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다. 그래서 나도 너에게 그 복을 전수한다. 그 복은 가나안으로 돌아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고 하나님이 네게 주는 복이다.


IV. 축복엔 계급이 없다

드디어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데 요셉에게 직접 축복하지 아니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요셉을 장자로 인정하여 12지파 가운데 두 몫을 차지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며 자신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동을 쏟아냅니다. 요셉아 나는 너를 잃은 줄 알고 다시는 네 얼굴을 못보리라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어서 네 얼굴을 볼 뿐만 아니라 네 자손들 나의 손자를 보게 해 주시는 구나.

이웃을 축복하고 이 민족 시대를 축복하고 내 자손들을 축복할 때에 불만이 목구멍까지 터져나오는데 축복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축복하면 축복이 아니라 독이지요. 억울한 마음, 손해보는 심정,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복을 나눠줄 수는 없습니다. 어이구 이런 것도 자식이라고 정말 축복해야 하나? 그렇게 축복할 수는 없습니다.

축복과정에서 재미있는 그림이 나타납니다. 요셉이 아이들을 물리고 큰 절을 합니다. 그리고 아비의 오른 손 밑에 맡아들의 머리를 갖다 놓습니다. 왼손 밑에는 둘째의 머리를 갖다 놓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의 기본은 오른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아비 야곱이 손을 X자로 뒤집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틀렸어요. 여기가 큰놈이예요. 그랬더니 19절에 "나도 안다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말합니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 자신이 둘째로 태어나서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자가 따로 있고 작은 자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엔 장자 차자 서열이 없습니다. 가진자 못 가진자도 없습니다. 배운자 못 배운자의 서열이 없습니다. 똑똑한 자 어리숙한 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요 목사와 평신도가 하나요 서열도 계급도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모두가 한 가족, 모두가 한 형제, 모두가 한 자매일 뿐입니다. 사역상 구별이 있을 뿐 차별은 없습니다. 교회엔 계급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복 받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복 받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천국은 요지경. 천국에 원리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가 있을 뿐입니다.


V. 예수 이름의 권세로 복을 누린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야곱의 축복을 받고 나면 이곳 애굽에서 각각 한 지파씩을 형성하여 출애굽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정통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10지파의 두령들은 즉 야곱의 10명 아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 가나안 땅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 뿌리가 가나안입니다. 나중에 그 지파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당한 뿌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가나안 땅을 본 적도 없고 밟은 적도 없습니다. 이곳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아브라함의 직계라 할 수가 없지 않느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야곱이 축복 한 가지를 더합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소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신용만으로는 12지파의 족장이 되기엔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소서. 이삭 그리고 야곱 자신의 이름이 이 아이들을 보증할 것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이 아이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삭이 보증하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을 이 아이에게 주어서 내 이름이 이 아이를 보증하게 할 것이다. 정통성 시비 끝. 우리나라 재벌 총수가 보증하면 은행이 돈 몇 억 안 빌려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재벌 총수 이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온 천지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의 흥망성쇄를 움켜쥐고 계시고 역사의 시작이 되시고 끝이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증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마귀를 물리칩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천국 정통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온갖 죄를 짓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인 정통성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게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VI. 축복을 받으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축복하는 방법까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접촉을 통해서 축복을 전달했습니다. 먼저는 신체적인 접촉입니다. 몸에 손을 얹기도 하고 따뜻한 포옹을 하기도 하고 손을 붙들고 기도하기도 하고 키스를 한 후에 축복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를 품에 앉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데 제일 먼저 키스를 합니다. 그리고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합니다.

히브리인에게 손을 얹는다는 것은 전달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속죄 제물을 잡을 때도 양이나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말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축복의 말을 통해 자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손과 좋은 말을 통해 자녀를 만지는 그 시간, 그 부모의 손은 인간의 손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부모의 손 끝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권세, 축복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비의 손은 곧 하나님의 손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은 천지를 창조한 손이요 모태에서 그 아이를 빚어 만드신 손이요 그 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동안 그 아이를 인도해 오신 사랑의 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미래를 인도해 주실 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축복의 권세를 주었노라. 너는 이미 복의 근원이 되었느니라. 축복하라. 네 자손들을 축복하라. 네 교회를 축복하라. 네 이웃들을 축복하라. 셀 가족들을 축복하라.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해온 아이는 건강한 인격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의 축복이 모자라는 아이는 열등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축복 받고 자란 아이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삽니다. 어릴 때 단점을 지적받고 자란 아이는 세상을 어둡게 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 장점을 격려받고 자란 아이는 세상을 밝게 봅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됩니다. 축복을 먹고 자란 아이는 건강한 인격, 건강한 정서를 가지고 삽니다. 축복을 먹고 자란 아이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문제를 헤쳐나갑니다.

부모의 축복은 예언적인 의미, 예언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부모의 축복은 씨가 되어 자라납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믹음의 선언입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의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부모의 축복은 아이로 하여금 축복의 통로로 또 다른 복의 근원이 되어 그 자손들을 축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가문은 아브라함의 가문, 축복의 가문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아비되고 어미된 여러분,
교회의 리더가 되고 목자가 된 여러분,
여러분의 손 끝에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무책임한 행동이 있다면 그 축복의 권세를 썩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손을 들어 자식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셀 가족을 축복하십시오. 이 교회를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십시오. 그 이전에 여러분의 영적인 지도자들로부터 복 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손이 병들어 있어도 그 손은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늙어 손 끝에 힘이 없다할지라도 권세가 힘이 없어진 것 아닙니다. 축복의 능력이 사라진 것 아닙니다. 얻어먹고 살아도 그 손은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심장, 우리 삶, 우리 손 끝에는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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