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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사모할 진정한 부흥 (느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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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모할 진정한 부흥
느헤미야 8:1-9

지나간 역사에서 유명한 전도자요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의 집에 어느 날 청년 강도가 들어와서 그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웨슬레는 자기의 지갑을 열어 있는 돈을 전부 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이것을 당신이 내게서 강제로 가져간 것이 아니라 내가 기꺼이 당신에게 선물로 주는 것으로 하십시다."
강도는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고 돈을 받아들고 돌아서서 집을 떠나갈 무렵 웨슬레는 다시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잠깐만, 내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선물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 책을 꼭 가지고 가십시오."
그는 포장된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강도는 황급하게 그 책을 받아들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그 책은 웨슬레가 자기 집에 방문하는 분들에게 귀한 선물로 주려고 늘 준비하고 있었던 포장된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년 후 웨슬레는 어느 집회에서 다시 이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웨슬레는 그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기를
"목사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수년 전 목사님의 댁을 무례하게 방문해서 목사님으로부터 약간의 돈과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던 그 사람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주신 성경책을 읽고 저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에게 늘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사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저도 목사님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수년 전 저에게 주셨던 그 돈의 갑절입니다.  이것을 목사님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다시 선물로 드립니다.  이 돈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써 주시고 저를 목사님의 동역자로 받아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힘이 있습니다.  말로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말이 한 가정의 운명을 바꿀 수가 있고, 한 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으로 이 만물이 보존되고 섭리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동일한 말씀으로 오늘날 복음을 듣고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져 우리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존귀하고도 귀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를 세워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그들의 삶의 터전인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에스라라는 사람을 세워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성을 건축한다는 것은 일종의 하드웨어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성이 없이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은 그들의 삶에 필요하고도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이 준비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행복한 삶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에스라라는 지도자를 쓰셔서 그들의 마음의 성을 건축하도록 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보면 에스라를 가리켜서 학사 에스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겸 학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사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서기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학사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말씀에 정통해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학사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대학을 나오면 다 학사가 됩니다.  그런데 진짜 학사가 되려면 말씀에 정통해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학사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석사입니다.  석사는 이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그를 석사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최초의 석사는 스데반 석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에스라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재건시키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통속적으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부흥, 'Revival'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건설되고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는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흥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부흥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부흥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당시에 예루살렘의 여러 문들 가운데 수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  이 수문 앞 광장에서 거대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만지심을 받고, 그들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뜨거운 부흥의 역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야말로 이런 부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1903년 이 땅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 이 땅에는 아주 초라한 한줌의 크리스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주의 성령이 선교사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성도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회개하고 주 앞에서 심령이 새로워져 순식간에 부흥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부흥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이 땅에 다시 한 번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우리들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하는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첫째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읍시다."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좀 읽읍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 소망 사랑이 가득한 진정한 부흥과 승리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면 이 말씀은 당연히 읽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정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 다음에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습니다.  아파트를 사도, 넓은 평수로 이사를 가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할 수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건설되는 것, 심령의 부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흥을 위해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요청했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그 성경을 읽어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1절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그들은 에스라로 하여금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 개인이 성경 사본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에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본이었지만, 그만큼 희귀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에게 성경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서 이제 그가 읽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태도로 이 말씀을 들었을까요?  읽혀지는 말씀을 어떤 태도로 들었습니까?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이 말씀을 경청했는가?  본문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성경을 펴자마자 온 백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오게 되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의 경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읽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집중적으로 경청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얼마나 거대한 감동의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읽혀질 때 그들은 마음을 다해서 '아멘', '그렇습니다. 정녕 맞습니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공감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읽혀지는 말씀 앞에 전심으로 동의를 하는 것은 진정 아름다운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면 잡아먹습니까?  특별히 오늘과 내일 저녁 집회에서 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읽혀지고 선포되어지는 말씀 앞에 뜨겁게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멘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멘할 때에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만, 아멘하는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하늘의 역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옆 사람을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회개하고 아멘 좀 하십시다"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지만, 듣는 여러분들은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예배 속에서의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멘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경 봉독을 읽고 듣는 일을 새벽부터 정오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라면 적어도 6시간 동안 그들은 말씀을 읽고 들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주일에 제가 6시간 동안 계속해서 말씀을 봉독하면서 이 말씀을 설명한다고 하십시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시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인들은 1시간도 힘들다고 들락날락 거리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제가 헌신예배를 드릴 때마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 교인들은 1시간을 제대로 앉아서 온전히 헌신하지를 못합니다.  그냥 일어나서 들락날락 하지를 않나, 옆 사람하고 이야기하지를 않나, 핸드폰이 울린다고 받으러 나가지를 않나, 아이들 치닥거리를 하지 않나, 어디 그뿐입니까?  조금만 설교가 길어져도 시계를 보지 않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과 내일 저녁에 집회를 갖습니다.  이 집회에서 읽혀지고 선포되어지는 말씀 앞에 온전히 집중적으로 경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실 때 핸드폰 놔두고 오시기 바랍니다.
사오정이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서는 핸드폰을 집에 놔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려 6시간을 말씀 앞에 집중적으로 경청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더구나 그들이 하루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보면 날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일을 7일 동안 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바로 부흥의 시작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순간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신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저물어 가는 금년의 마지막 시점에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을 내 삶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말씀을 붙드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읽으십시오.

둘째,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부흥을 사모한다면 말씀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에는 깨달음의 중요성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무려 6번이나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말에는 다른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에는 한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합니다.  understand.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먼저 2절에 보면,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도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라고 했습니다.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깨달을 만한 회중 앞에.  내려가서 7절에 보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이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가 읽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깨달은 만큼만 그 말씀을 붙들고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대학에서는 QT를 매일 하도록 과제를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겨울에 QT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QT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경을 깨달았느냐 하는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살 수가 있습니다.

깨닫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소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밥을 많이 먹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랑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소화된 것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도 소화된 말씀, 깨달은 말씀만 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이 성육화 된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내 말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분량을 선택하여 천천히 읽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펼칠 때마다 시편 기자처럼 기도해 보십시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깨닫게 하소서"  성령께서 바로 우리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을 원하십니까?  내 심령에 부흥을 원하십니까?  말씀을 읽으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을 성령으로 깨닫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과 내일 집회에서 선포되어지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깨달아져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에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흥을 사모하신다면 세 번째로, 말씀에 반응할 줄 아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반응할 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읽고 깨달은 말씀이 성육화 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그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정서적 반응과 의지적 반응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정서적 반응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 눈물과 기쁨으로 이 말씀에 반응을 했습니다.  본문 9절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말씀을 듣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울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때 왜 울었을까요?  물론 성령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울었을까요?

우리가 느헤미야서의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보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그 말씀을 읽으며 듣는 가운데 그들의 죄가 책망되고 폭로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부족한 내 모습, 하나님의 기대치를 만족하지 못했던 내 연약한 모습을 붙들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눈물인가요?  언제 이런 눈물을 흘려보셨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눈물만 반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물과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으로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에스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기뻐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그것이 당신들의 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에 눈물과 기쁨으로 말씀 앞에 반응해 보셨습니까?  혹은 여러분의 눈물샘이 말라버리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내 눈물이 사막처럼 메말라버린 것은 아닌지요?

김진혜 집사님의 친정 아버님께서 몇 년 전에 갑상선암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잘못 치료를 해서 침샘을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침샘에 침이 고이지 않는 겁니다.  말을 할 때에 침이 있어야 혀가 부드러워지고 편안하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침샘에 침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말을 하실 때마다 엄청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샘이 말라버린 그 심령은 고독합니다.  눈물샘이 말라버린 그 심령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 합니다.  눈물샘이 말라버린 그 심령에는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는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성령님께서 내 눈물의 샘을 건드려 주셔서 내가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울며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며 또 주시는 말씀 앞에 감격해서 말씀을 붙들고 흥분하면서 일어나는 이런 놀라운 정서적 부흥이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정서적인 결단과 정서적인 반응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지적 반응, 그리고 의지적 결단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의지적인 반응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눔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을 받고 나서 그들이 제일 먼저 보여주었던 반응은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 그들의 놀라운 기쁨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있기에는 스스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 자기들이 가진 좋은 것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광경이 생각나십니까?  사도행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거룩한 나눔의 역사,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순종입니다.
느헤미야 9장 이하를 읽어보면 그들은 이제 그들이 읽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에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그들은 순종으로 응답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라 한 사람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 놀라운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에스라가 기도하면서 지금까지 준비해왔던 가장 중요한 에스라의 비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 전까지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에서 풀려 자유를 얻어 조국으로 돌아올 때 당시 에스라가 품었던 가장 중요한 비전이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말씀 앞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는 비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전 재건의 비전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에스라는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백성들의 비전을 바라보며 조국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에스라 7장 10절을 읽어보면 성경은 그 당시 조국으로 돌아온 에스라가 가지고 있었던 결심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가 결심했다.  무엇을 결심했느냐?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겠다.  연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말씀을 먼저 내 삶에서 실천하겠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받으면 내가 축복을 받은 것처럼 내 인생이 변하는 것처럼 나의 백성들도 변할 수 있다.  이 결심을 가지고 돌아왔고, 드디어 에스라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현장 앞에 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라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일어나기 시작한 부흥이 마침내 민족의 부흥이 되었던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12월 16일입니다.  내일은 17일입니다.  오늘과 내일 저녁에 우리는 심령대부흥회를 갖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심령에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집회를 통하여  저는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붙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이 말씀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집회 시간 시간마다 정결한 마음과 하나님 앞에 구별된 예물로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설 때마다 먼저 구별된 예물을 드렸습니다.  거기에 거룩하게 구별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하셨고, 그 심령을 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참으로 말씀 앞에 경청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이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붙들어 우리의 삶 속에 하나씩 순종을 시작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 개인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속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부흥을 사모하십시다.  이 부흥으로 금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거룩한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여, 나에게, 내 가정에,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 진정한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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