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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II) (슥 8: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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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읍 예루살렘(II) (슥 8:14-23)

  우리는 이 스가랴 8장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폐허 위에 겨우 초라한 모습의 성전이 재건되어져 가고 있는 형편에 불과했지만 장차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으로 불리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스러운 약속이었는데, 그 예루살렘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워질 신약 교회를 통하여 성취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주일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영광스러운 교회는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을 믿는 교회이며 둘째로 '충성된 신행일치의 삶'이 나타나는 교회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스가랴 8장의 후반부의 말씀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의 나머지 두 가지를 계속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3.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 사이에 진실과 화평의 교제'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본문 14절로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14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15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16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재 사정이 과거와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음을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는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바벨론의 압제 밑에서 고난당하게 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당연한 징벌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후회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공의로운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8장 2절에서 밝혔던 대로 하나님 편에서 먼저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을 발휘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즉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은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은 은혜의 때를 선포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뒤를 이어서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약속하신 일에 대하여 이처럼 신실하게 행해 주실 때 또한 사람 편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행해야 할 일, 즉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대인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란 우선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히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과 직결됩니다.
  사실 피차 진실만을 말하는 이것 하나만 완전하게 실천된다 해도 그 만남과 사귐이라는 것은 정말 '좋은 관계'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해도 피차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이, 무슨 말을 나누어도 그 입에 나오는 말을 서로 항상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공동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 '새 예루살렘'의 인간관계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도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라고 했습니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피차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 재판정에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필요하기만 하면 없는 말도 지어내고, 아는 말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했던 말도 부인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재판의 목적이 상대편과 '화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지 그저 상대편을 이김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차리고자 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재판정에서 원고나 피고나 공히 피차의 진실한 것만 증언하면서 서로 '화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면 그 얼마나 이상적인 재판이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재판이라는 것은 인간 욕심이 맞부딪히고 피차 서로 거짓을 겨루는 매정하고 악한 싸움이 아니라 오직 이웃 간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시키고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서로 '진실'하게만 대한다면 아예 재판 자체도 필요 없는 '화평'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심중에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동족을 서로 죽이려 함으로써 자기 유익을 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늑대이다."라는 소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이웃사이에서부터 시작하여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남을 밟아야 내가 더 올라가고 남을 해함으로써 내게 돌아오는 것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이 짐승보다 오히려 더 못한 악한 본성이 이 인간사회에서는 불변의 생존원리처럼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런 증오, 미움, 살인이 완전히 도말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로써만 말함으로써 서로 오해나 속임이 없는 '화평'을 이루게 된다면 '남을 해하는 행위' 따위는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가 과연 이 세상 어디에서 이런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나 조직은 근본적으로 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결국 미움, 시기, 멸시, 오해, 원한, 욕심, 거짓, 싸움, 살인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창회, 계, 취미클럽 등을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우리로 하여금 '정말 인간관계라는 것이 이래야지.'라는 생각이 들게 할 단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야말로 이 불신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실망하고 지치고 상처받고 고통당한 사람들이 '아,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 대신 오직 진실만이 오가는 만남, 서로의 이해만을 따지는 대신에 피차 화평을 늘 유지하는 사이, 미움과 싸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사랑과 기쁨만으로 채워지는 인간관계 - 이런 놀라운 교제의 축복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런 성도의 참된 교제를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 베풀어 주심"을 받게 된 것을 체험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자신부터가 '일만 달란트' 씩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완전히 탕감받았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감격할 줄 아는 자만이 그와 같이 곁의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같이 못난 죄인이었다가 꼭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아서 이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그런 자들끼리의 사귐은 반드시 무언가 달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자처하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본문 17절에서 "나의 미워하는 것"이라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천명하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같은 당원들끼리 툭하면 서로 싸우고 걸핏하면 갈라지는 당, 국민들의 눈에는 꼴불견일 뿐입니다.
  집안 식구끼리는 하구한날 밥 먹듯이 싸우면서 남들에게는 깍듯이 예의 차리는 사람, 이웃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점잖은 모습조차 사실 가식에 불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교회 안에서는 편당이 나누어져 있고 당회나 제직회 할 때마다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까지 나오는 교회, 그러면서도 표어는 '이웃사랑'이니 '종교 간의 화해'니 하고 번드르르하게 붙이고 있는 교회, 무슨 '영광'이라는 것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교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와 사귀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며 기독교가 타종교와 교류하기 위하여 세워진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행해야 할 일,' 즉 믿는 사람들이 일단 그 신앙의 공동체에 안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성도의 교제'가 각 교인의 제일 첫 번째 대인관계가 되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그 어떤 성도에게도 말 한 마디까지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서로 '화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며 그 심중에서라도 다른 성도에 대한 그 어떤 미움의 부스러기조차 남기지 않음으로써,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보여주는 실로 '영광스러운 교회'의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4. 영광스러운 교회는 성도들의 즐거운 신앙생활을 보고 '불신자들이 절로 찾아오게 되는 전도'가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18절 이하 2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8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20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21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이, 이방의 멸시와 조롱거리가 되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만국 백성들을 당신 앞으로 끌어 모으는 구속사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놀라운 미래를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현실로 벌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변화를 그 이방인들이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년이라는 시간은 내내 눈물과 탄식으로 지새우는 금식 절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마지막 함락된 때를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오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이 불탄 날을 기리는 절기였습니다.
  "칠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멸망 후 남은 자들이 바벨론 총독을 죽이고 그 보복이 두려워서 모두 애굽으로 도망함으로써 예루살렘이 완전히 버려졌던 때를 애도한 절기였습니다.
  "시월의 금식"은 바벨론 군대가 제일 처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던 때를 또한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가적 절기라는 것은 온통 눈물과 애통으로 지새우는 날들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금식의 절기들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바뀔 때가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번영하게 될 때에는 더 이상 그런 애도의 절기는 필요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두고 애통해 왔던 그 금식의 절기들은, 이제 그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 하나하나를 기념할 새로운 절기들로 대치될 것이었고 그것들은 실로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 민족들에게는 실로 신기한 일, 자기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예루살렘은 "이방 가운데 저주" 즉 망한 민족의 대명사였고 조소거리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항상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가 죽어 살 수밖에 없는 '망한 민족'이었고, 그들이 지키는 절기까지도 그저 '울고 재 뿌리고 금식할 수밖에 없는 한 많은 백성'임을 이방 민족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부터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을 지키고 있으니 그들의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좋아서 갑자기 이스라엘의 금식 절기들이 희락의 절기들로 바뀌게 되는지 그 이방 민족들은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궁금증의 결과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향하여 얼마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지를 그 이방 민족들이 보고 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업신여기고 마음대로 짓밟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희락의 절기를 지키는 백성으로 바뀐 것을 보고 "아,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셔서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해 주시고 끝내 구원해 주셨구나."라고 깨달으며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이방인들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보이게 될 때 그 다음에 이어서 자연히 나타나게 되는 과정이 바로 그들의 발걸음이 절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 사람에게" 서로 "우리가 여호와를 찾고 은혜를 구하지자"고 권할 것이고 그러면 "나도 함께 가겠다"고 화답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이제는 그 작고 연약해 보였던 예루살렘을 오히려 사모하며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고"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간청하게 되는,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넘치게 되니까 그 소문이 이방 민족 가운데 퍼져가면서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여 자기네들도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제 발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교회 밖으로' 나타내고 발휘해야 할 유일한 대인관계(對人關係)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세상 속에 뛰어 들어가서 불신사회에 짝하고 함께 멍에를 매려고 노력하는 단체가 아니라, 세상의 불신자들 쪽에서 절로 찾아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만 합니다.
  지역 주민들이 '교회가 우리 위해 이렇게 해 주지 않나?'라고 한 마디만 하면 냉큼 밖으로 나가서 소위 '교회의 사회참여'를 실천한다는 것이 교회가 나타내어야 할 본연의 자세라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만 소유할 수 있는 고유의 영광을 조금도 발하지 못하는 '줏대 없는 교회'이며, 세상을 향하여 왕 노릇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세상을 섬기는 '저자세의 교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짜 영광스러운 교회는 주변의 이웃들로 하여금 "우리 한 번 저 교회에 가 보자."라고 서로 권하는 말이 나오게 하고 '나도 기왕이면 저 교회 사람들처럼 예수 믿는 신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수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멋있는 일이 생기겠습니까?
  바로 교회의 교인들이 그 각자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참으로 '희락의 절기'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그런 놀라운 전도의 역사는 절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신자라면 자연히 그리고 당연히 나타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날이면 날마다 슬픔과 짜증과 원망만으로 살던 사람이었지만, 이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그런 '애통의 나날'들이 한순간에 '기쁨과 감사의 절기'로 바뀌게 됩니다.
  저주 아래에 살면서 지옥으로 치닫던 인생이 중생구원을 받고 천당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신자의 참된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최대의 은혜이며 그 축복 때문에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신자의 모습이야말로 불신자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자력(磁力)이 됩니다.

  약골이었던 사람이 무슨 몸에 좋다는 보약을 먹고 나서 눈에 띄게 건강해지게 되면 곁의 사람들도 자연히 그 약을 찾게 되지 않겠습니까?
  학생이 어떤 보습학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공부를 재미있어 하고 성적이 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친구들도 자연히 그 학원에 몰려가게 될 것입니다.
  전도 역시 꼭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 다니게 된 교인의 삶이 갑자기 바뀌어서 이전에는 늘 인상 찌푸리고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얼굴에 기쁨과 웃음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친지와 이웃들이 신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본인이 교회중심으로 은혜 넘치는 신앙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전하면 '열국 백성 열 명'이 그 '유다 사람 하나'를 붙잡고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교회에 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매사에 불만에 가득 차 있다면 이미 전도는커녕 남이 전도할 길까지 막아 버리게 됩니다.
  교회란 데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예배는 드려지지 않고 그저 하구한날 회개만 하고 울기만 하는 곳으로 불신자의 눈에 비친다면, 그러지 않아도 세상살이에 골치 아프고 찌들어진 인생들이 그런 교회를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리 만무할 것입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교회는 결코 그런 '금식의 절기'만 사시사철 지키는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인한 회개의 시기가 있었으면 죄 사함 받음을 인한 '기쁨의 절기'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며, 신자들은 바로 이것을 각자의 삶을 통하여 세상 앞에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을 죄와 슬픔의 인생으로부터 건져내어 구원과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을 체험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이 성읍 거민과 저 성읍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 나오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오히려 우러러보게 될 영광스러운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교회는 세상 앞에서 수치스러운 교회가 될 뿐입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많다 해도 '구원'의 복음이 없는 교회라면 그런 '종교적 인형' 같은 사람들만 모인 교회가 뭐가 자랑스럽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신행일치의 '충성'이 없는 교회라면 그런 '지푸라기 공력'으로 세워진 교회에 무슨 영광이 있다는 것이겠습니까?
  자기네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장로 사이에 알력(軋轢)이 그치지 않고 이 장로 저 장로 중심으로 교인들이 쫙 갈라져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무슨 '교단통합'이니 하는 소리만 높이는 교회가 어떻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사회사업은 부지런히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데모에 앞장서고 정치에 관여하는 교회가 도대체 어떻게 '많은 사람을 천당으로 이끄는 별과 같은 교회'의 영광을 누릴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는 자기네 딴에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오히려 교회라는 간판을 달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실로 당신의 성호를 대변할만한 교회, 실로 당신의 높고 위대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기에 부족함 없는 빛나는 교회,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 아름답고 흠모할만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바로 이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란 구원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진리를 지키고 그에 따른 신행일치의 충성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중심으로 나타나는, 즉 우선 대신관계(對神關係)가 바로 되어 있는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그런 후에 교회 안에서는 같은 신자끼리 진실과 화평으로 교제를 나누고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이 구원과 축복의 길로 끌어들이는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대인관계(對人關係) 역시 완벽하게 실천하는 성도들의 교회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경향교회가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등록교인들이 많고 강서성전이 크고 아름다워서 자랑스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향교회는 우선 기독교 진리의 정수요 꽃과 같은 개혁주의 신앙, 곧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에 입각한 '구원의 복음'이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는 '진리의 성읍' 같은 교회입니다.
  장로님들과 집사님들과 권사님들과 그 외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평화시대에 순교하는 각오'로 '생애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을 다 바쳐' 희생하고 섬기는 것을 생각하면 기도할 때마다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지지 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웬만한 대형교회 안에 흔히 있는 편당 같은 것은 아예 뿌리조차 내릴 틈이 없고 장로 피택 선거를 해도 아무 잡음 하나 없이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어떤 교인이든지 일단 이 교회의 주류에 들어오게 되면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느라고 바빠서 싸울 여가도 없이 절로 화목하게 되는 신기한 교회입니다.
  주중에도 사랑의 편지니 새소식반이니 어린이 선교원이니 하면서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리며 곳곳에 천국 그물을 치고, 교역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아무 보수도 받지 않는 심방장들까지도 매주 사역보고서까지 쓰면서 전도하고 심방하는 등, 일주일 내내 이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걸음들이 생생하고도 뜨겁게 느껴지는 교회입니다.
  저는 정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교회에 담임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은혜인지 알 도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진정 '경향인'이 된 여러분들 역시 저와 꼭 같이 공감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광스러운 교회운동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런 '진리의 성읍, 거룩한 산'을 더 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흔한 교회, 있으나마나한 교회, 세상으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아니라, 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택자 구원의 확신이 있는 교회, 그 은혜에 감사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 먼저 용서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오직 진실과 화평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 예수 안에 얻게 된 새 생활의 기쁨이 항상 넘쳐흘러 동서사방으로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을 절로 끌어들이는 교회 -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바로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계속하여 함께 세워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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