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롬 13:11-14)

  • 잡초 잡초
  • 650
  • 0

첨부 1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롬 13:11-14)

이제 연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정초에는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는 때라면 지금은 일을 마무리하고 결산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처럼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한 해를 무사히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획했던 일들 가운데 이룬 것이 많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과(大過) 없이 연말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진보가 있었다면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게 어려운 일을 만나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하시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를 일컬어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신 8:15)이라고 했습니다. 마실 물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사방이 거친 황무지요 모래로 되어 있는 삭막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족히 200만이나 되는 큰 민족이 40년 동안이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 주셨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으며, 아말렉 족속, 모압 자손과 같은 대적들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지켜주셨습니다. 지난날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신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 뿐 아니라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우리의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영원한 하늘 본향을 향하여 길 가는 순례자요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을 정도로 이 땅의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영구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다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큰 업적을 이룰지라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가치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세상일은 다 그런 것입니다.

더구나 이 지구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보니 “…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증언합니다. 주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날을 말하는데, 그 날이 오면 우주적인 대격변이 일어날 것인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 곧 이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폭발하여 녹아버릴 것입니다.

주의 강림은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는 인류가 이룩한 문명뿐 아니라 각 개인이 이룩한 성취도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주의 날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강림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의 강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와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공회에 서셔서 심문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마 26:).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경은 주의 강림이 임박하였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7:29에 보면 ‘때가 단축하여졌다’고 하였고, 히브리서 10:37에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는 주님의 약속으로 끝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상고할 로마서 13장 11절에 보니 ‘너희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함은 곧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는 이미 2천년 전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느 때일까요? 말세지말(末世之末)입니다. 본문에 보니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 지 벌써 2천 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얼마나 종말에 가까운 때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성도들이 얻을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그 날에 우리가 몸의 부활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므로 마지막 날에 믿는 우리를 살려내실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입을 부활의 몸은 병들거나 늙거나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방문을 걸어 잠갔는데도 방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부활의 몸은 물리적인 장벽을 초월하는 신비한 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영으로 생각하고 놀라고 무서워하자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

주의 강림 시에 우리는 이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만 믿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강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천신지에서 누릴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또 계시록 2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장차 구원 받은 성도들이 들어가 살 새 예루살렘은 기초석이 열 두 보석으로 되어 있고, 열두 진주 문에,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에 힘들고 지칠 때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을 생각하시면서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저와 성도님들이 거할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다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처럼 우리에게 큰 소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강림이 모든 사람에게 다 영광스런 날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계시록 1:7에 이르기를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떤 때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시기”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대입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마는, 수험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기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수험생이 시기를 분별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 시간을 보낸다면 그처럼 답답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기’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의 강림이 가까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는 기상청에서 정확한 일기 예보를 하기 위해서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각종 첨단 장비를 사용해서 기상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순전히 경험에 의해서 일기를 예측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54)…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지금이 역사의 시계에서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지 파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대는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대의 표적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과 재앙들을 통해서 종말이 가까움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강림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 지구상에는 민족 분규가 얼마나 빈발하고 있습니까?

성도님들께서는 8년 전에 온 세계가 큰 기대 속에서 21세기를 맞이하는 행사를 치룬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실제로는 2001년부터 21세기가 시작되지만,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1년 앞 당겨서 2000년도 1월 1일에 각 국에서 21세기 맞이 대규모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서 축하 폭죽을 쏘아 올리면서 대통령을 비롯해서 전 국민이 기대에 들떠서 행사를 치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사람들은 21세기는 그야말로 꿈의 세기가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인류가 분쟁을 그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공해가 사라지고 쾌적한 지구 환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들의 기대는 무참하게 깨어졌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세계는 전쟁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평화로워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위험해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음 놓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양식(良識)이 있는 사람들은 인류가 어쩌자고 이러는지 안타까워하지만 이 같은 현실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말세의 징조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불교권이나 회교권, 힌두 권은 복음의 불모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회교국가에서는 가족 중 누군가가 기독교인이 되면 남은 가족이 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활약하는 시대도 없었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이단과 사이비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법이 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현대는 불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부정부패, 거짓과 사기, 살인과 폭력과 음란, 인신매매, 황금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악함을 보고 통탄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주의 강림이 그만큼 가까워 왔음을 알고 믿음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종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기독교인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복음화를 의미하는 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 예언 역시 현실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서 12장 4절에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식은 참으로 놀라울 지경까지 발전했습니다. 이제 유인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은 보통이고, 심장 수술이나 뇌수술도 합니다. 교통수단이 눈부시게 발달해서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고 있습니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든 지 오래되었고, 세계 어느 나라든 하루 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통신의 발달은 세계 어느 곳과도 통화가 가능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하여 인간 승리를 외치며 편리한 생활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현상들을 보면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가까워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영적으로 깨어 상급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자는 사람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알지 못할뿐더러 대비할 수도 없습니다. 자는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하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또 자는 사람은 잠꼬대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잠꼬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은 신앙의 권면을 받아도 알아채지 못하고 잠꼬대 같은 말만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고 졸며 자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처럼 잠들면 시험에 들기 때문에 성도들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자는 것은 무언가에 깊이 취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7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라고 하였습니다. 수술을 할 때 마취 주사를 놓으면 깊은 잠에 빠집니다. 칼로 살을 째고 뼈를 잘라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죽음을 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자기가 처해 있는 형편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다 무언가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쾌락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명예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정치권력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잠자는 자나 취하는 자는 다 밤에 속한 자들입니다. 시간이 한 낮이라도 잠자거나 취하는 사람에게는 밤중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역사의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중 다섯은 슬기있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별도로 가지고 가지 않았으나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신랑을 기다렸으나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자 다 졸며 잤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소리가 나기를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열 처녀가 일어나 등을 준비하는 데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슬기 있는 처녀들이 대답하기를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왔습니다. 이에 슬기있는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얼마 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하였으나 신랑은 대답하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강림하실 주님을 가리키고, 슬기있는 처녀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미련한 처녀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자,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힘 쓸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풍조에 따라서 살지 말고, 성도답게 거룩한 생활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신본주의에 입각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부지런히 장사하여 많은 이를 남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는 칭찬을 받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하였습니다.

육상선수가 경주에 임하여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달리듯이 성도들의 믿음 생활도 중도에서 그치는 법이 없이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지금입니다. 지금 주님을 믿는 데 힘써야지 한 때 잘 믿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의 현주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상태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부실하게 살 수 밖에 없지만 내일은 잘 믿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열심을 내어서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내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셨으며, 히브리서 3:14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역사의 시계 바늘이 새벽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동이 틀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들께서는 한 분도 예외 없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상급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