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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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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라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합니다.
전보다는 더 멀리 바라보고, 전보다는 더 깊이 생각하며, 전보다는 더 넓게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만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생각이 이후에 어떤 영향과 결과를, 그리고 지금의 행동이 이후에도 어떤 영향과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행동하게 됩니다.

내 마음 하나 기쁘고 내 육신하나 편하면 그만이다하는 생각에서 이제는 나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생각해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 되고 그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삶의 성장과 성숙, 연륜이라는 것은 단지 한 해 한 해 나이가 더 들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계기가 되어서 큰 깨달음이 있고, 삶의 어려움을 겪고 또 딛고 일어서는 과정 속에서 깨닫고 체득한 진리와 살아감에 대한 바른 도리와 깨달음과 터득으로 인해서 우리 삶에 이와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변적이기 때문에 나쁜 방향으로 달라지기도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양육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이루기를 소망하고 힘쓰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능력도 다르고 또 가진 바도 다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나, 소유나, 앎이나, 그 모든 것의 차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차이로 비췰까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 앞에 방대함에 결국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모든 삶속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우리로서 할 일은 마음을 넓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이해하고 섭리를 깨닫고 누리고자 하는 백성에게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며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뿐만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후서 6장 전체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은사가 사랑의 동기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교회건덕을 위해서 절제되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고린도교인들은 교만해졌고 자기중심적인 교악한 수준의 심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부정적결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용납하며 사랑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를 권면합니다. 즉 그들이 닫고 있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습니다. 내가 관대함을 가지고 너희를 향하여 우리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렸으니 우리가 너희에게 마음을 닫은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우리에게 마음을 닫은 것이라 내가 부모의 심정으로 말하노니 그동안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라도 너희의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의 온갖 험담과 비난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충분히 마음에 상심을 하고 상처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고 인내하며 그들을 사랑하려는 사도바울의 부성적인 사랑이 물씬하니 풍겨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제 오늘 이 부분에서 고린도교인들이 자신들의 벗어나지 못하는 내적인 자아의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와 억측,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은혜 받는 일에 대하여 느끼는 한계, 또한 하나님 앞에 진보하는 일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과 진보를 이루며 이것을 통해서 마음을 넓히는 역사를 이룰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늘 오해하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도저히 마음속에서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상대가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넓히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마음을 넓히면 내 자신이 더욱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내 마음을 넓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 첫째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구조와 발상의 전환자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도 이런 얘기 자주 합니다. 의식과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야 된다.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는데 있어서 이전의 습관과 구조를 벗어나는 파격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의식의 구조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어떤 정보가 입수되면 그 정보를 판단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여서 내가 그것을 흡수하기까지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경험과 이제까지의 사고의 틀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게 해석되고 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꽃을 보면 그 꽃이 가지고 있는 향기에 대해서 미리 어떤 선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합의 향기는 이래. 장미의 향기는 이래. 아니면 또 철쭉의 향기는 이래. 나름대로 각각 우리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선 개념을 가지고 있게 되면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이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꽃을 볼 때 그리 가까이 가서 향기를 맡는다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향기로 그 꽃의 향기를 쉽게 체득을 하게 됩니다. 그 꽃이 가지고 있는 다른 향기도 있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그것을 미처 체득하지 못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선 개념화되고 구조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 은혜가 되면 줄을 긋고 거기에 색칠을 하기도 합니다. 또 설교말씀 듣다 그 설교말씀을 들었는데 은혜가 된다 하면 그 설교말씀들은 본문을 색칠도 하고 줄도 긋기도 하는데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다음에 그 성경을 읽을 때 그 부분을 보게 되면 다른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줄친 부분만 눈에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우리가 새로운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줄 친 부분에 우리가 매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성경을 두 권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 받은데 줄도 치고 색도 칠하고 한 이런 성경도 한 권 가지고 ‘아, 그때 내가 이 말씀 가지고 은혜를 받았지.’ 하고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회상할 수 있는 이런 성경이 있어야 하고, 또 집에서 성경을 묵상할 때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깨끗한 성경책을 가지고 읽으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을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두 가지 다 안하는 경우도 있지요. 제가 너무 심하게 말씀드렸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떤 선 개념화 된 생각을 때로는 접어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 사람 이런 것이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면 우린 그 사람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이라는 것은 먼저 구조화되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입수되면 그것이 해석되어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로운 의식과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틀을 때로는 한 숨 접고 또 깨뜨리고 그것을 봐야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는다는 것도 이와 같이 우리 삶 가운데서 새로운 사고를 가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옳은 것은 이것이야, 좋은 것은 이것이야. 라고 정해버리면 우리는 결코 새로운 생각이나 현존하는 다른 세계를 이룰 수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파격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파격이 너무 많으면 생활이 불완전해지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이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일정한 부분만큼은 파격을 인정하고 스스로 시도함으로 이제까지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라는 것은 항상 익숙한 삶에서 오기도 하지만 언제나 끊임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또 모험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옴을 봅니다.

우리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을 넓히려면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없다면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되는 사람은 그 일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안 되는 사람은 그 일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환경 탓도 아니고 사람 탓도 아니고 분명히 나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 잘 되는 사람을 보면 분명히 잘 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잘 안되면 안 되는 이유도 있는 겁니다. 잘되면 잘되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 이유를 파악해서 안 될 때 잘되도록 하고, 잘 될 때 더 잘되도록 그 이유를 확대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 핑계하고 상황을 핑계한다면 우리들에게 진보나 전환이라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특별히 진보를 위한 의식과 발상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푯대를 정하고, 그 푯대를 기준해서 뒤틀어진 내 자아를 인정하고 수정하여 하나님 앞에 나를 부인하여 새로운 은혜로 서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삶의 사고방식, 그것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로소 나 자신을 부인하는, 나의 부족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운 은혜의 길에 접어들 수 있고 내 마음을 열고 진보할 수 있는 기회에 들어서게 됩니다.

진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내 현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이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굳이 무슨 변화가 있겠으며 변화 없는 사실에 무슨 진보가 있겠습니까? 진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무지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보는 눈을 가리웁니다.
그러니까 내 부족과 허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우니 우리에게 진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우리 마음이 넓어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왜곡된 자존심 때문에 고의적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된 것을 알아요.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꾸 나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진보도 없고 내 마음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왜곡되어져 가고 있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됨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할 때 오는 상실감, 혹은 손해 때문에 잘못을 알면서도 그 자신의 생각과 삶을 주장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정말 무서운 일인데요 사람이 어떤 일을 주장할 때 처음에 자기가 그것이 옳았다고 생각해서 주장합니다. ‘이게 정말 옳은 생각이야! 그래서 주장하는데 한참 가다보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된 일을 주장했구나!

여기서 두 가지겠지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된 말을 주장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라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요. 중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주장이 다 무너지게 되고 자신의 삶의 기반도 다 붕괴되고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어느 순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것을 주장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반드시 처음에는 푸른 마음 가지고 옳았다고 주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에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또 뿐만 아니라 책임지는 자세로 용서를 구하게 될 때 그는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 순간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끝까지 가 봐도 결국은 모든 사실은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에는 나중에 기회가 없습니다. 돌아오기에는, 거기서 출발하기에는 너무 늦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내가 어떤 일을 상실할까봐, 손해를 볼까봐, 기회를 잃어버릴까봐, 잘못됨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외적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우리는 더 큰 낭패를 받게 됩니다.
이때쯤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내 마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어느덧 나는 악한 영의 이끌림을 받아서 이리저리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때때로는 자기를 부정하고 다시 출발하는 이와 같은 과정이 우리들에게 필요한데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마음을 넓히지 못하고 더욱 더 얽매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일의 모든 것, 정말 반복하고 집중해서 어떤 일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무리 반복해서 익숙해져도 결과적으로 좋은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변화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개선돼야 하는데 개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며 진실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각오를 가지고 우리 자신의 진보를 위해서 의식과 발상의 전환을 이루며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넓혀가는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접어들 때 우리 삶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내 자신의 한계를 높이기 원하면 여기서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없을까? 내가 가진 것을 근간으로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도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오늘의 날이 어제의 날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나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임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똑같이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 그 일을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초라할 때는 자기 자신을 주장할 때입니다. 나를 설명해야 될 때.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나를 설명해서 그 사람이 나를 알아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엾은 사람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나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를 알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넉넉한 삶을 살아오고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만나면서 자꾸자꾸 그 사람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고, 만남으로 말미암아 자꾸자꾸 그 사람의 모든 매력에 대해 상실될 때가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사람도 있고, 알면 알수록 점점 실망만 늘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또 나를 인정할 수 있는 넉넉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그러기위해서 내 마음을 넓혀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더 많은 것을 우리는 베풀어 나가며 비축하여 갈 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저도 매년 연 초되면 ‘올해부터 또 새롭게 교회를 개척한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늘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내가 이 사람을 만날 때 처음 어떻게 만났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한 번의 만남에도 집중해야 되고, 그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푸른 마음을 가지고 ‘괜찮겠지’하는 편안한 마음보다도 언제나 때때로는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하는 이와 같은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는 더 깊이 알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서로 간에 더 깊은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마음을 넓히면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사람이 이해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가장 큰 수혜자는 내 자신이 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편하게 되면 결국 모든 것을 기쁨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개척의 정신을 가지고 한계를 극복하고, 한계의 영역을 넓혀가며, 삶의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정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바꿨기 때문에 장애물은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바꿨다면 우리는 분명한 삶의 개척의 정신을 가지고 삶의 장애와 장벽을 향해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의외로 삶의 한계라는 것은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도전적인 마음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고 넘어가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힘이 증가되고 우리 앞의 장벽은 능히 넘어갈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인격과 삶의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떠나가는 스스로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다운 결실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첫 번째는 능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인격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 참 능력 있어.”
그런데 그 다음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능력만 가지고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 참 괜찮아, 능력도 있어, 그런데 나 그 사람 정말 싫어.”
처음에는 능력을 보고 같이 일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싫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처음에는 능력으로 인정받아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인격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을 넓히지 않으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고 싫어함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마음속에 누구든지 품어갈 수 있을 때 결국 우리의 부족한 능력도 배려를 받아 더 큰 능력으로 발휘하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마음을 넓히고 진보하기 위해서는 방어적인 태세가 아니라 더욱 더 진보적인 태세를 가지고 진취적인 모습으로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골리앗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벌벌 떨었고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용기 있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향하여 물맷돌 하나 들고 달려갔던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열 두 정탐꾼 중에 열 명은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세는 험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사실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맞는 말 위에 더해서 여호수아, 갈렙은 뭐라고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들이시리라
즉 우리는 사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또 한 가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실을 인정하되 사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용기란 내 힘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신앙적인 확신입니다."
용기는 나를 믿는 힘이 아니라, 내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신앙적인 확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록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담대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삶의 모험이라는 것은 진보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징검다리입니다. 모험 없는 진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 마음을 넓히려고 해도 때때로 우리는 모험을 해야 됩니다.
가나안 입성이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참 우리 말조심해야 되겠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말조심합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잖아요. 그들이 얼마나 천신만고 끝에 출애굽 했습니까? 출애굽 하고 광야를 지날 때 힘들고 어려우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정말 어려운 출애굽 했는데 그렇게 어렵게 출애굽해서 여기서 우리에게 이렇게 고통당해서 죽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엉뚱하게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모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니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 묻으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그런데 말 참 잘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사람 광야에 다 묻혔어요. 그 말대로 광야에 다 매장 당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 다 묻혀버렸어요.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됐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난 또 다른 세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역사를 체험할 새로운 세대들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넓히고 멀리 바라보고 더 깊게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는데, 사진틀이 있다고 합시다. 요만한 사진틀에 있어서 한 부분이 매우 크면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진틀 큰 것을 갖다 대면 이것은 아주 부분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을 보면 출애굽한 1세대들은 광야에 다 묻혔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큰 역사의 틀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갔다. 우리 이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틀을 크게 하면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금 내게 있는 작은 것 하나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내가 이만한 큰 실패를 해도 결정적인 실패입니다. 내 사진틀에서 볼 때 결정적으로 내 삶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진틀을 좀 더 넓혀볼까요? 크면 내 실패는 내 삶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되죠?
실패와 성공, 실패와 성공이 날줄과 씨줄이 직조되어서 천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삶은 실패와 성공으로 매일매일 합해서 조직되어져가며 우리의 삶을 이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면 전부인 줄 아는데 사진틀을 크게 해서 보니까 내 인생 전체, 하나님의 역사의 전체를 보니까 지금 내가 크게 생각했던 실패라는 것은 부분적인 삶의 한 부분에 불과한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게 가지고, 마음을 크게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멀리 바라보고 삶의 현재를 바라보면 그 의미가 전혀 새로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것에 일희일비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임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잘됐다고 해서 교만한 것도 없고 안됐다고 해서 낙심할 것도 없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용기 있고 자신 있게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모험을 담대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실패했던 사람 같습니다. 가나안에 못 들어갔잖아요. 40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를 실패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물어봤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모세,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더이다.”
이스라엘 백성 입에서 탁 튀어나오는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능력을 가장 많이 행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각종 기적을 행하니까 엘리야를 생각했던 거고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큰 사람입니까? 모세는 가나안 못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와 같이 큰 백성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을 모습으로, 이름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험으로 보여 져도,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로 보여 져도 우리 하나님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면 사람에게도 그렇게 평가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결국 이와 같은 도전적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향해 달려가고 내 마음 넓혀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넓혀가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정서적 설득 뿐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적인 지루한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지루하지만 결코 넘어야 될 우리 앞의 태산입니다.
우리가 한계를 극복하고 간행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보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쉽게 넓혀집니까? 괜히 화나는 것이 화가 안 납니까? 정말 이것 쉽지 않은 일이라고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정서적인, 감정적인 은혜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지적인, 논리적인 이해인 경우가 많단 말입니다. 참 어려운 것들이 논리적으로 납득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고 우리가 정서적으로 마음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우리의 손과 발로 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겁니다.

제가 그래서 1년 수고한 사람과 10년 수고한 사람과 30년 수고한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잘한 것과 열 번 잘한 것과 백 번 잘한 것과 천 번 잘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한 번 잘하지 말고 백 번, 천 번 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 한 번 잘할 수 있습니다. 기분 좋아서 한 번 잘할 수 있습니다. 반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잘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보면 마음이 참 기쁜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역사를 소망하며 주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 앞에 꾸준히 주의 역사를 이루며 나아가는 것을 볼 때 참 감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전하다보면 이런 때가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 희망과 위로를 주는 말씀을 드릴 때가 있고 때로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부족한 것을 지적해서 성도님들에게 자각할 수 있는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또 목사는 그것을 적절하게 구사를 해서 줄다리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우리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또한 하나님 앞에 위로를 받으며 낙심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신상필벌을 반드시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목적지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 또 그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잘했으면 상주고 잘못했으면 벌주고 또 그들에게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가지를 구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나가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도 같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이와 같이 구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칭찬하거나 혹은 위로하는 설교, 또 힘과 용기를 드리는 설교를 하면 얼굴이 굉장히 밝아집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보면 마음이 참 슬퍼집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칭찬하고 또 격려하고 삶에 용기를 드리는 말씀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지는 것은 그만큼 삶이 어렵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삶에 낙심이 많고......
저는 요새 우리 성도들을 보면 야단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많이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참 삶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많이 낙심되고, 사람마다 각기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인 모습이 그런 겁니다. 낙심하고 실망하고 또 사는데 어렵잖아요. 제대로 되는 것보다 제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고, 좀 되는가 했더니 몸이 아프고, 또 좀 괜찮은가했더니 또 모든 가족가운데 문제들이 생기고, 좀 괜찮은가 했더니 여러 가지 예상치 않았던 일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저는 모세가 한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
모세는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 우리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이런 수고했어.
내가 이런 슬픔을 극복했어.
내가 이렇게 어려웠지만 이렇게 잘 살아왔어.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란 말입니다.

이런 생각하면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에 우리는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모든 일뿐만 아니라 우리 인격에 대한 모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을 넓히지 않으면 사람을 키우기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아주 작고 치사한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치사한일에 집착하는지, 왜 그렇게 작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 아닙니까?

별것도 아닌데, 뱀이 와서 “아무것도 아닌데 저 선악과 왜 못 먹게 하는지 아니?” 그러니까 조금만 욕심이 생기니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신뢰관계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겁니다. 뭐 별것 아닌 작고 치사한 일. 우리는 그렇게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능력이 뭘까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나뭇가지 열 개주고 꺾어보라고 하세요. 못 꺾죠?
그런데 그러면 그걸로 낙심하지 말고 한 개씩 열 번 꺾어보세요. 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힘이 자라서 열 가지를 다 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하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도 지금 판단하지만 말고 이 사람이 언젠가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멀리보고 긴 호흡으로 넓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도 좌절하지 말고, 그에게도 좌절하지 말고, 우리 모두에게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됩니다.
사람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거짓,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 다 들여다봐야 됩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허물뿐 아니라 그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호흡을 주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과 뜻을 바라보면 우리 삶은 훨씬 더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해야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을 따뜻함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삶이라는 것은 때때로 많은 어려움도 있고 간혹 우리들에게 기쁨도 주어집니다. 그 한 번의 기쁨으로 고통을 잊고 또 다시 달려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어차피 하루하루가 삶의 개척입니다.
하루 눈 떴을 때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이 내 앞에 있구나!
어떻게 이것을 아름답게 이루어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루어드릴까?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한 없이 기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저께도 있었던 일인데, 오늘도 눈앞에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일, 똑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은 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여러분, 삶의 가장 어려운 적이 뭐냐고 하면 저는 권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 계속해도 안 되면 그 가운데 권태롭습니다. 어떤 일이 잘 되어도 잘되는 일도 계속되면 그것도 또한 권태롭습니다. 이 권태로부터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서 일탈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삶을 망가트리기도 합니다.
늘 우리는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가운데 우리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을 넓히면 많은 사람에게 또다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또 우리 생활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을 볼 때 참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설교 들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여러분 여기 보니까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교회가 17년 되니까 꽤 오래 다닌 성도님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나는 주보에 몇 주씩 게시되는데 그 설교 제목만 봐도 목사님이 무슨 설교할 지 다 알아.’
그런 분들 계시죠?
‘다 알아!’ 그런 분들 계실 겁니다. 아니 그렇게 다니고도 모른단 말입니까?
저는 이렇게 원고를 쓰니까 1부부터 6부까지 설교가 거의 다 비슷합니다. 한두 마디까지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늘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라고 생각하고 그 마음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분이요.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 나는 다 알아. 우리 목사님이 무슨 말씀 하실지 다 알아.’
“무슨 말씀 하실지 알아? 예수 잘 믿으라는 거지. 뭐.” 맞는 말이죠?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지. 뭐. 또 믿음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다 천국 가서 하나님의 은혜 누리라는 말이지. 뭐.”
정말 정답입니다.
그 정답은 어떤 정도의 정답이냐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면 “예, 중요한 관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날마다 그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서 날마다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어제의 날이 아니듯이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어제의 사람이 아니야.
그렇죠?
여러분, 세상에서 늘 똑같은 것이 있습니까?
오늘은 어제의 시간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이 절대 어제와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이해가 잘 안 되세요? 그러면 주름살을 세어보세요. 절대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벌써 바뀐 사람입니다. 하루가 달라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여건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소망으로 바라보고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 믿지 말라고 하지만 사람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고 소망해야 됩니다.
정말 그에 대해서 기대하고 소망하고 그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그의 소망과 꿈을 이루어줄 수 있는, 우리가 섬길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이 우리들에게 쉽지 않게 다가오나 우리는 그것을 능가하는 믿음가지고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정말 삶이 세어지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머리가 세듯이 우리의 삶도 세어져 여러 가지로 이와 같이 우리가 허약함과 연약함을 느낄 때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또다시 마음을 넓히고, 더 멀리 바라보고 또 다른 기대를 가지며 하나님 앞에 다시 용기를 내어서 달려가는 것이 믿음의 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성도들은 어떤 경우도 오해하지 말고 이해합시다.
미워하지 말고 사랑합시다.
실망하지 말고 새로운 기대를 가집시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의 성도님들 되어서 그 모든 하나님의 꿈과 은혜를 소유할 때 가장 우리 자신이 기뻐지는 여호와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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