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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디매오의 믿음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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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의 믿음 (막 10:46-52)

  여러분은 한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저는 해마다 이맘때면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야를 듣는 것으로 한해를 끝나감을 느끼곤 합니다. 한국에 머물 때에 거의 해마다 빠지지 않고 메시야의 공연을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외국에 있을 때에도 기회가 되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메시야의 공연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가곤 했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지난 화요일 메시야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기독교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힙니다. 보통 작곡가가 한 곡을 쓰기 위해 몇 주일, 혹은 몇 달을 고민하며 만듭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모두 53곡으로 되어 있고, 각 곡마다 길이가 방대하기에 빠르게 연주해도 2시간 이상 걸리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24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야를 보고 감동을 받은 하이든이 천지창조라는 오라트리오를 만들었는데, 그는 3년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그것도 곡에 있어서 헨델의 메시야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헨델은 24일 동안 거의 식음을 전폐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작품이 완성을 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헨델이 밝힌 것처럼 주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거의 성경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전해진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헨델은 몸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생애는 이처럼 한 사람 음악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지금까지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었습니다. 대강절을 보내는 지금 우리에게도 큰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면서 그 곁에서 주님을 가까이했던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십자가에 임박한 때에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며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의 귀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내려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여리고라는 곳에서 있었던 귀한 사건을 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소경이 주님을 만납니다.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고, 그의 귀한 믿음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과연 바디매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리고’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무너트리는 사건일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이곳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무너트렸습니다. 이런 역사적 지명인 여리고가 유명했던 것은 안질에 좋은 특효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보다 이곳에는 소경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바디매오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당시 소경은 대부분 나면서부터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 바디매오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앞을 못 보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습니다만, 그 중에 눈이 아주 중요합니다. 시각장애를 안고 살다가 목사가 된 안요한이라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소원이 있다면, 단 5분만이라도 눈을 떠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디매오가 그런 상황입니다.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생애 한복판에서 오늘도 아무 희망이 없는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람을 거지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앞을 못 보는 것 만해도 원통한 일인데 가난합니다. 이건 더 참기 힘듭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구걸하여 겨우 하루를 이어갑니다. 아마 하루에도 몇 번 씩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으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입니다.

  그런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안 뒤,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신체적인 핸디캡이 있었던 그로서는 주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지나가시자 자기를 한번 봐달라고 그는 소리를 쳤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떠들면서 지나가던 예수님에게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의 귀를 막게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조용하라’고 타일렀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다는 심정으로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의 목마름, 애달픔,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그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해법, 열쇠가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간절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간절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닌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함에 축복과 은혜와 응답이 있음을 말합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달라지고, 역전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은 그의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아야 생명을 보존합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시냇물을 찾으려고만 움직입니다. 바로 우리 영혼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 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영혼의 풍성한 꼴에서 우리 모든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의 갈급함으로 살아갈 때 분명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형통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렘33:3) 하나님의 큰 일, 비밀한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간구한 모든 기도에 응답되는 것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만 크게 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간절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 간절한 외침,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것이 참 귀한 믿음입니다.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의지가 있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간절히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께서 그의 목숨을 건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디매오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기쁨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도 감동스럽습니다. 성경은 그가 겉옷을 버리고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우리의 코트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게 옷의 전부입니다. 겉옷을 벗으면 속옷만 보입니다. 그는 알몸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뛰어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좋아서 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남의 도움 없이 한발도 걷기 힘든 상황인데 뛰어갑니다. 주님이 부르는 곳으로 비틀거리고, 부딪치며 달려갑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지금 주님 앞에 있는 바디매오의 사정은 누구 보아도 잘 아는 상황입니다. 중심과 속을 보시는 주님께서 바디매오의 간절함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디매오의 입으로, 의지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이런 주님 앞에 자기의 아픔을 진솔하게 말합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이젠 마음의 소리까지 합하여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주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기적은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바디매오의 강력한 의지, 몸부림치는 열정, 자기 소원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간절함을 통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의지력을 가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부르짖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의 입으로 아뢰기를 요구하십니다. 결국 내 의지와 행동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믿음의 역사는 다 이렇게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웠지만, 인간의 의지와 행동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갈멜산에서, 풀무속에서, 갈릴리 호수에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난 모든 현장에 바로 이런 인간의 의지력, 강력한 수고와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능력이 임하려면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심지 않고 어떻게 거둡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눈물과 통곡이 기쁨을 만드는 것입니다. 구해야 받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고 어떻게 받습니까? 주님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구원도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며 죽으신 그 처절한 피의 절규와 고통이 있었기에 얻은 구원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내가 받는 모든 은혜와 축복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의지가, 때론 몸부림이, 내가 흘리는 땀과 눈물이, 결단의 행동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열매를 맺습니다. 나의 작은 날개 짓이 큰 폭풍을 몰고 옵니다. 이런 믿음으로 날마다 힘쓰고, 심고, 투자하고, 아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좇아가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바디매오가 부르짖고, 의지의 행동을 보인 것이 귀한 일이고,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본받을만한 하지만, 가장 귀한 것은 그가 주님을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에서 52절이 중요합니다. 특히 ‘길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만난 뒤, 그는 주님을 길에서 따라갔습니다. 여기 이 말에서라는 깊은 교훈을 발견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를 괴롭게 했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잘 살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싶었고,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보란 듯이 돈도 벌어 성공하고 싶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것도 길에서, 보게 되는 그 순간부터라는 말입니다. 놀라운 일이요,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주님은 지금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바로 그 길로 바디매오가 따라갑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현장에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바디매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누구보다도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가장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에 모인 120명의 성도 중에 한사람으로서 성령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며 살다가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좇아갔습니다. 그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붙잡고 있었고, 그도 평생 주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힘에 이끌렸습니다. 그 길이 때론 힘들고 어려워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이젠 그의 인생에 주님을 믿지 않기는 틀린 사람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힘을 다해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은퇴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는 이런 예화로 그의 일생을 회상했습니다. 어떤 갑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외동딸만 있었는데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사윗감을 고르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왔습니다. 갑부는 그들을 모두 넓은 수영장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 수영장에는 악어를 곳곳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갑부는 젊은이들을 자기 반대편에 서게 한 뒤 물에 뛰어 들어 건너오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참 난감한 일입니다. 사위가 되려고 자기 목숨과 바꿀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 풀이 죽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순간, 어느 한 젊은이가 용감하게 물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죽을힘을 다해 악어 떼를 피해 갑부에게로 건너왔습니다. 갑부는 젊은이의 용맹을 보면서 사위로 삼겠다고 반기려는데, 이 젊은이가 올라오자마자 쏜살같이 사람이 모인 곳으로 다시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등 밀었어!’ 알고 보니 뒤에서 어떤 사람이 젊은이를 밀었던 것입니다. 청년은 빠진 물에서 살려고 있는 힘을 다해 건너간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니 누군가가 자기 등을 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등을 민 사람이 바로 ‘주님’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고, 나와 동행하시며 천국까지 이끄십니다. 우리는 이제 믿지 않기는 틀린 사람들이요, 천국가지 않기는 매우 힘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주님의 열정이 우리를 강권하여 가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서 날마다 주저하고, 여전히 미지근하고, 신앙과 삶에 진정한 용기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여전히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의 등을 하나님은 밀어 넣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죽기 살기로 헤엄쳐서 가는 길만 남은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바른 길이고, 나와 후대가 복 받는 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오직 주님만을 따라가고, 주님의 길을 힘을 다하여 좇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간절한 믿음, 아뢰는 믿음, 그리고 좇아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 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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